그렇게 김해를 휘둘렀던 토호세력들은 남산을 깎아 시청과 등기소, 경찰서를 신축, 이전함으로써 구획정리한 주변의 지가를 올려 떼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연인지 아니면 남산의 분노인지는 몰라도 김해시청이 건립되고 나서 김해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적어도 남산을 발파하기 전에는 김해는 조용했고 이 지역 출신들의 정. 재계를 향한 출세의 길도 탄탄대로였다.그러나 남산을 깎아낸 후 남산 안(부원, 봉황, 서상, 동상, 대성, 구산, 삼계, 내동, 외동)에 거주하거나 주소를 두고 승승장구하던 정치인들이 줄줄이 몰락하거나 낙마 또는 옥고를
김해근대 50년 | 조유식취재본부장 | 2008-08-10 20:53
지금의 김해시청의 청사 터는 분산(盆山)줄기의 끝으로 개가 엎드린 복구형(伏狗形)이라고 개 혈(穴)이라고도 불렸던 고조산 즉 김해의 남산, 이 산을 원뫼뿌리라고도 하며, 분성산(盆城山)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좌룡맥(左龍脈)이 이곳에서 반전(返轉)하여 읍내를(지금의 부원동, 봉황동, 서상동, 동상동, 대성동, 구산동, 삼계동, 내동, 외동)되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므로 고조산(顧祖山)이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 산에는 성황당(城隍堂), 기우단(祈雨壇) 등이 있었고 수시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와 기원제가 열리기도
김해근대 50년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2008-08-02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