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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공병부대 은행나무 동상동으로 옮겨 심던 날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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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공병부대 은행나무 동상동으로 옮겨 심던 날의 비극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5.02.02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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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39>

김해 삼계에 있던 육군공병학교가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전을 추진하여 1995년 전남 상무대로 완전 이전했다.

6ㆍ25 이후 김해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던 공병학교가 김해에 있을때만 해도 교육을 온 초병 장교들의 숙소 대부분 부대와 가까운 매정마을이나 화정마을 삼계ㆍ구산ㆍ대성동 일대이다 보니 이들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업소가 부대 주변에 많았다.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김해에 도착한(서상동 정류장) 가족들은 약 2km 떨어져 있는 공병부대 면회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이용해야만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전국에서 면회 오는 가족과 애인들로 택시업계와 여인숙 갈비집들이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진영읍의 갈빗집 보다 김해읍(부원, 서상, 회현, 동상, 구산, 삼계) 중심지역에 갈비집이 더 많았던 것도 면회 온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갈비 한번 실컷 먹이고 싶어 면회를 왔다 하면 무조건 갈비집에서 회식을 했다.

그리고 토ㆍ일 외박 나온 장교(소위, 중위, 대위)들은 김해의 아가씨들과 연애하느라 정신없었고 김해의 별난 총각들은 운동장, 신못 주변에서 데이트 중이던 군인들을 발견하면 이유없이 시비를 걸어 구타하는 등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김해읍 내 사람들이 공병학교 때문에 먹고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병부대는 김해의 경제에 큰 역할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천재지변으로 무너진 도로나 농로 등 도로 복구와 농촌일손 돕기 등 김해를 위해 보여준 장병들의 희생과 봉사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 공병학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공병학교는 대한민국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모여들다 보니 모 교장(준장)의 제안으로 자기 고장 단풍나무 등 고향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 식을 휴가 때 가져오게 하여 식재하고 그 나무를 잘 관리하여 10여 년 후에는 공병부대 내부와 주변이 전국의 수목이 모인 아름다운 팔도정원이 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선 팔도의 대표적 수목들이 공병부대 이전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부대 내 사찰인 삼무사에서 필자와 김해불교신도회장(배석현)을 만나 교장(소장)은 이전 수송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중요한 수십 그루만 이전 식재하고 나머지는 두고 간다고 했다.

그때 배 회장님께서 삼무사 주변의 4~5백 년 된 은행나무 등 몇 그루만 주면 우리가 가져가 김해 연화사 주변에 식재하여 잘 키우겠다고 했고 교장은 쾌히 승낙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높이 40미터가 넘는 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어떻게 옮겨 심는다 말인가 하고 의아해 했다. 배 회장님은 필자를 보고 청년회원들을 동원할 수 있는 데까지 하라고 부탁하고서는 그때부터 은행나무 수송계획에 들어갔다.

김해의 중장비로는 턱도 없다는 결론에 따라 공병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탱크를 실어 나르는 초대형 추레라를 경기지역 부대에서 빌려와 은행나무를 실고 도로를 차단하고 한전의 도움과(도로 위 늘어선 전기선 절단과 복구 등)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동상동 포교당 앞까지 왔다.

도로가 한산한 오전 11시부터 상차하여 동상동까지 오는데 장장 3시간이나 걸렸다. 도착한 은행나무는 포교당 입구 좌측 김해객사 후원지에 세워 심기 시작했다.

한일합섬에서 빌려온 대형 삼발이와 체인블록으로 중심을 잡아가며 포크레인과 함께 은행나무를 거의 세워지는 순간 삼발이의 체인블록에 연결된 타원형 철 고리 줄 하나가 뚝 끊어졌다.

순간 은행나무가 휘청하며 넘어질 뻔 했지만 군용 대형 중장비인 포크레인을 운전하던 장병의 기질로 가까스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깊이 파진 구덩이에 옮겨 식재를 하고 야무지게 다진 뒤 큰 물통에 타 두었던 영양제 탄 물을 듬뿍 부어준 시간이 오후 5시경이었다. 그때 이송을 위해 잘라버린 대형 가지들은 아직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식재를 모두 마치고 감사하며 수십만 공병 출신 장병들의 애환이 담긴 이 은행나무에 공병부대 장병들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 그리고 김해발전을 지켜달라는 기원을 했다.

이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으며 그리고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께서 어제(26일) 오후 6시 40분경 서거하셨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옛 공병학교에서 옮겨와 포교당 입구에 심어 놓은 저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신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며 애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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