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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청소년들의 전당 연자루 폐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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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청소년들의 전당 연자루 폐쇄되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5.05.19 17: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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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53>

체육청소년부 박철언 장관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연자루는 전국 최초로 마련된 청소년시설이었다.

박철언 장관은 "김해 연자루와 같은 시설을 전국 도시에 설치하고 운영경비 등을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까지 했다.

이처럼 정부와 청소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인기를 누렸던 연자루가 5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평생 그대로 쓰라고 말씀하시던 건물주인 박 모 회장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그 아들이 상가를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평생 사용하라는 말씀에 따라 1억여 원의 경비를 들여 실내 인테리어까지 해놓았는데 갑자기 비워달라고 하니 황당하기만 했다. 사정도 해보고 임대료를 더 올려 주겠다고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실내인테리어를 다 철거하고 원상복구를 하라는 요구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공사업자를 불러 4천여만 원을 들여 한 달여 동안 철거작업과 원상복구공사를 마치고 상가를 깨끗하게 비워주었다. 당시 박 회장님의 아들 중 도의원을 했던 모 씨가 필자에게 불교회관과 연자루 이전비용으로 1억 원을 주었다는 소문을 퍼트려 필자가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필자의 고향 후배 김 모 기자의 중재로 큰아들로부터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그들로부터 단돈 일 원도 받지 않았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과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시설은 그렇게 폐쇄를 했다.

연자루도 불교회관도 그날부터 폐쇄되었다가 불교회관은 2013년 재 개원을 했으며 연자루를 대신하여 천원의 행복밥집은 2014년 부원동에서 문을 열었다. 그때 연자루와 불교회관이 탄생하기까지 숨은 공로자 한 분이 계신다.

처음에는 필자와 지인 3명이 공동으로 시설을 하여 운영하기로 했다가 지인 2명이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필자 단독으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진행과정에 일어난 일이라 공사비와 시설비 등에 상당히 큰 금액의 돈이 필요했지만 당장 자금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필자에게 평소 많은 가르침과 삶의 지혜 그리고 용기를 주시던 한 분을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분께서 "연자루와 불교회관 공사는 잘 되어 가고 있느냐"며 물어보시기에 "아... 예 그 문제 때문에 상의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하고는 그동안 추진사항과 중도에 동업자가 빠지게 되어 지금 당장 공사비 등 시설비 마련이 시급하여 찾아뵈었다고 했다.

필자의 말을 다 듣고 난 그분께서 얼마가 필요 하느냐고 물으시고는 "필요한 금액만큼 찾아 쓰고 나중에 통장에 도로 넣어 놓아라"고 하시며 통장과 도장을 주시면서 "요 앞 새마을금고 가서 찾아가라"고 하셨다.

필자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수차례 하고는 도장과 통장을 들고 모 새마을금고로 가서 예금인출 청구서를 창구에 내밀었다.

청구서를 본 직원이 통장과 청구서를 들고 바로 뒤편에 앉아 있는 이 사장(최 모씨)에게 건네고는 무어라 대화를 하더니 그 이사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필자에 관한 내용임을 직감했다.

잠시 후 전화기 속으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야단을 치시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필자가 자기 금고 회원의 통장에서 상당히 큰 금액의 예금을 인출하니까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하여 알려 드렸다가 사람을 의심한다며 야단만 맞았다는 것이다.

금고 이사장이 의심할 정도의 거액이 예금된 통장과 도장을 준 그분 덕분에 연자루도 불교회관도 무사히 계획한 날짜에 공사를 마무리하고 출발을 했다.

필자가 81년도 사업부도로 김해를 떠나려고 했을 때 모두가 김해를 떠났다가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유일하게 그분만 "절대 김해를 떠나면 안 된다"며 김해에 살면서 제기하라고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던 그분은 필자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이시기도 하다.

하지만 늘 부족했던 필자가 실망만 시켜 드리며 3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박영배 형님!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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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實 2015-05-21 06:26:58
농사도 옳게 짓지 못하면서 세월과 자연과 벗한다고 나선 이 영감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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