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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초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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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초선대
  • 이균성 기자
  • 승인 2008.08.17 15: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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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대(招仙臺).
김해사람은 초선대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대충 알기는 하겠지만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표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동공단을 들어서 약 200M. 주변의 공장들과 썰렁함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제78호)로써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야트막한 구릉형태라 앞으로 트인 동네의 모습에서 이곳이 먼 옛날에는 바다였다가 삼각주가 형성이 되고 그 땅은 평야로 일구어지고...그것이 지금의 김해가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하고 있다.

   
        ▲ 초선대 마애불

 

 


초선대는 멀리서 보면 나무 몇그루 서 있는 동산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백년을 넘긴 나무 숲에는 매미소리가 한창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보니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초선대에 대한 설명이다. "신선을 초대한다는 초선대는 현자를 초대한다고 해서 초현대(招賢臺)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락국의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초대하여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로 적고 있다.

초선대에 관한 옛 문헌의 기록은 몇몇 군데에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숭선전지' 등...1903년 허식에 의해 편찬된 '숭선전지' 에는 '가락국기' 의 내용을 인용, 초선대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명 초현대라고도 한다.김해부의 동쪽 5리쯤에 있다. 돌을 쌓아올려 대(臺)를 만들었다. 거등왕이 참시선인을 이 곳으로 초대하니 선인이 늘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더불어 환희하였다고 한다. 왕이 앉았던 돌을 연화탑이라고 하는데 가운데에 수십장 높이의 돌을 우뚝 세우고 왕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다. (一名招賢臺 在金海府東五里許 疊石爲臺 居登王 招참始仙人於此 仙人必乘舟抱琴而來 相與歡喜 王所坐石曰 蓮花塔 中有數十丈 屹立石 畵王眞像)"

거등왕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속에서 나오는 칠점산은 어디이고 가야금을 가지고 와서 거등왕과 놀이를 즐겼다는 참시선인은 누구인가? 궁금증이 더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칠점산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고, 산이 일곱개 봉(七峰)으로 칠점(七點)과 같아서 칠점산이라고 이름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점산이란 명칭의 산이 있는 곳은 부산 강서 대저동이다. 대저동은 조선시대에는 양산군이었다가 1906년 김해군으로 편입되었고 1978년 부산 북구로, 1983년 현재와 같이 부산 강서구로 된 지역이다. 초선대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지척이다.

칠점산은 7개 봉우리로 되어 있었으나 낙동강 제방 축조와 비행장 공사로 그 자취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겨우 봉우리 하나만이 옛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참시선인은 누구인가? 참시선인은 칠점산에서 사는 신선으로 옥(玉)과 같이 맑은 자태에 세상의 도(道)를 깨우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나무의 진과 도라지를 즐겨 먹으며 고고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거등왕에게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자문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治國之道)를 가르친 선인으로 거문고를 즐겨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 성도(成道)를 상징한다는 족적

그렇다면 초선대에 그려진 인물이 과연 옛 문헌의 기록대로 거등왕의 초상일까? 그 점에 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체높이 5.1m, 몸체높이 4.3m, 3센티 가량의 넓이로 그린 듯 얇게 음각된 이 인물상에 대하여 안내판에도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있다고 적고 있다. 결가부좌한 모습이나 두광(頭光), 신광(身光), 밋밋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육계(肉계)등은 불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가 탄생한 인도를 향해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기도 하다. 이러한 근거로 이 조각상은 불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 하고 있다.

이 불상 밑으로 커다란 족적(足跡) 하나가 있다. 이 족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또 다른 설화같은 이야기가 있지만 대개 이 곳의 마애불과 더불어 불교와 연관지어 해석한다. 족적은 석가모니가 生. 老. 病. 死를 떨치고 성도(成道)했다는 것을 알리는 증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후에 많은 마애불상이 만들어졌지만 초선대처럼 족적이 같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혹자는 이 족적을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왕이 세운 '마하보디 대탑' 의 금강좌대 옆에 새겨져 있는 족적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역불교가 가야에 들어 와 제 2의 불교를 탄생시켰다는 의미에서 마애불과 족적을 같이 남기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다.

어쨋든 초선대의 조각이 일곱 아우를 부처로 거둔 불심으로 가득찬 거등왕의 초상일 수도, 중생을 제도해 극락정토로 이끄는 아미타여래의 상(像)일 수도 있다. 다만 잊혀진 왕국에서 제4의 제국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야의 역사' 에서 초선대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선인을 불러 국사를 의논하고 잠시의 여유를 즐겼던 수로왕의 맏아들 거등왕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역사에 남아 있을 것만은 확실하다.

왕이 부르면 푸른 바다에 쪽배 하나 띄워 거문고 소리 울리며 찾아왔을 참시선인.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를 보며 백성들을 걱정하고 잠시 여유롭게 바둑과 거문고를 즐겼을 거등왕. 그 낭만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간직한 초선대. 그러나 지금의 어수선한 초선대를 거등왕이 봤다면 뭐라고 할까? 안타까움에 혀라도 끌끌 차지 않을까?  "네 이 놈들아, 이 꼴로 내팽개 쳐놓고 어찌 이 곳을 내가 신선을 불러 놀던 곳이라 이를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관리를 해가지고서야 원...쯧쯧"

이균성 기자   kslee473@yn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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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2009-09-11 00:39:31
같은 글자 '금'이라도 가야에는 가얏고 즉 가야금이지요.
그리고 같은 의미라도 신분에 따라 초상과 진상이 나누어지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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