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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와 부산의 불교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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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와 부산의 불교 전래
  • 조현수 기자
  • 승인 2016.03.09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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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의 숨결 가야문화 학술대회가 `가야문화 원형의 탐색과 콘텐츠화`를 주제로 지난 16일 가야대학교 대강당 국제 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김해 여여정사가 주최하고 동명대학교 문화 융ㆍ복합 콘텐츠 연구소가 주관했으며 가야대학교가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는 제1발표: 가야불교 전래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황정일 박사ㆍ보조사상 연구원, 기획실장) 제2발표: 불교의 가야 전래에 대한 일연의 인식과 가야불교의 성격(석길암 교수ㆍ금강대학교) 제3발표: 기원 1~3세기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한지연 교수ㆍ금강대학교) 제4발표: 가야시대 부산지역 불교에 대한 예비적 검토(이근우 교수ㆍ부경대학교, 부산경남 사학회 회장)가 발표를 했다. <편집자 주>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현재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종교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 만큼 동아시아에서 언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는지도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고, 일본의 경우도 '일본서기'에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불교를 전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렇지만 부산의 경우는 언제 불교가 들어왔는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두터운 부산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 역시 관심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개관하면서, 부산의 불교 전래시기에 대하여 전망해 보고자 한다.

Ⅰ. 동아시아의 불교

1. 중국의 불교 전래

중국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전한 말 후한 초에 인도로부터 서역을 경유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전설적이고 단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安世高의 불경 번역을 들 수 있다. 安息國(파르티아) 출신인 안세고는 '安般守意經ㆍ陰持入經' 등의 部派佛敎의 경전과 참선에 대한 경전을 번역하였다.

또한 후한 말의 桓帝 때 洛陽에 들어온 大月氏 출신의 支婁迦讖은 靈帝 때 대승불교의 경전인 '道行般若經'ㆍ'首楞嚴經'ㆍ'般舟三昧經'을 번역하였다. 특히 '道行般若經'ㆍ'般舟三昧經'은 179년에 한역된 것으로 전하며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般舟三昧經'은 禪觀法으로 수용되어 동진 때는 白蓮社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번역된 경전은 인도의 불경을 서역의 언어로 일단 번역된 것을 重譯한 것이었다.

3세기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 경전의 한역이 시작되었다. 특히 江南地方에서 支謙 및 康僧會(?~280)가 불경을 번역하였고, 강남지방(吳)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인으로 출가자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로 생각된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출가자는 朱士行이다. 支遁(314~366)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고 譯經 사업의 중심에 선 竺法護도 있었다. 이어서 서역에서 건너온 佛圖澄(?~348) 및 鳩摩羅什(344~413) 등의 고승이 나타나 중국 불교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었다. 불도징은 釋道安(314~385)의 스승이 되었고 鳩摩羅什은 많은 불경을 번역하여 후대까지 영향을 주었다.

불도징의 제자인 석도안은 경전목록을 만들어 불경의 해석의 면모를 일신시키는 한편, 승제를 제정함으로써 중국 불교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석도안의 제자 중에는 백련사를 결성한 慧遠(334~416)도 있었다.

5세기에 들어서 '華嚴經'ㆍ'法華經'ㆍ'涅槃經' 등 대표적인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래되었고, 曇鸞(476~542)은 浄土敎를 전래하였다. 北魏에서는 平城 교외에 대규모의 석굴사원(雲岡石窟)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孝文帝 때에 이르러 새로운 수도 洛陽 郊外의 龍門石窟이 건설되었으며, 永寧寺와 같은 본격적인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洛陽伽藍記'는 이 시기의 낙양의 불교사원을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달마가 낙양에 도착한 시기도 이 때다.

5세기에는 중국 불교사상 최초로 불교탄압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북위의 태무제는 폐불을 단행하였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조에서는 蕭梁의 武帝가 숭불군주로 이름을 남겼다. 도읍인 建康에는 후세에 '南朝四百八十寺'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 양무제는 백제의 불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신라 및 일본열도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양 무제와 백제ㆍ신라의 불교

양무제와 백제 불교의 관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통사(大通寺)를 들 수 있다. 대통사는 熊津(현재의 公州)에 세워진 사찰로 백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가람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三國遺事'에 의하면 양무제 시대의 연호인 大通에서 왔다고 한다. 527년이 大通 元年인데 이 해에 대통사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백제가 양으로부터 '涅槃經'을 수용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이 해에 梁으로부터 '涅槃經義'를 받아들였다. 양무제는 '열반경'을 대단히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寶亮이라는 승려에게 '열반의소'를 편찬케 하였으며, 스스로 그 서문을 지었다. 또한 자신이 󰡔열반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寶海라는 승려에게 명하여 '열반경'에서 말하는 佛性論을 논하게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열반경' 속의 계율을 중시하여 식사는 하루에 한 끼에 그치고 고기는 먹지 않았으며 오직 콩죽과 현미밥만으로 지냈다고 한다. 또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음악을 듣지 않았으며, 종묘의 제사가 아니면 연회나 심지어 불사에서도 음악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斷酒肉文'을 발표하여 승려들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육식을 금하는 '열반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서 양무제는 중국의 天子思想을 인도의 아쇼카왕이 상징하는 바, 轉輪聖王 이념에 대입하여 자신을 보살천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래서 양무제는 천자로서 다른 신자보다 앞장서서 불교를 지원하기 위해 捨身까지 단행하고 있는 것도 전륜성왕으로서의 의미와 연결된다.

이처럼 양무제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涅槃經'을 수용하고자 한 사실은, 백제가 양의 불교문화의 압도적 영향 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양무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聖王의 시호가 ‘聖王’인 까닭도 轉輪聖王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백제의 성왕이 왜에 불교를 전한 것도 양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양무제는 스스로를 轉輪聖王이자 보살천자라고 생각하면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의 계율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양무제의 입장과 맞물려 백제는 양무제의 노선에 입각하여 왜에 불교를 전래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의 영향은 불교에 그치지 않았다. 五經博士로 대표되는 유학 경전에 관한 지식이 양으로부터 백제에 전래되었다. 역시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毛詩博士를 요청하였고 양은 이에 응하고 있다. 동일한 내용은 '南史' 梁武帝 大同 7년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南史' 列傳 卷七十一 儒林 鄭灼ㆍ陸詡條에 의하면, “陸詡少習崔靈恩三禮義宗,梁時百 濟國表求講禮博士,詔令詡行.”라고 하여 육후라는 인물이 梁代에 百濟에 講禮博士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는 段楊爾, 馬丁安, 高安武 등 五經博士를 倭國에 교대제로 파견하였다. 이들 五經博士는 왜국의 학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을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종래에는 이들 오경박사가 백제에 파견된 사실을 의거하여 五經博士도 백제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段, 馬 등의 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씨로 백제인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또한 백제가 양에 모시박사, 강례박사 등의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아울러 생각하면, 백제가 왜에 파견한 오경박사는 백제인이 아니라 양의 오경박사를 받아들여 이를 다시 왜에 파견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古事記'에 보이듯이 '千字文' 1권과 '論語' 10권을 전한 博士 王仁(和邇)도 양나라 사람이었을 수 있다. '천자문' 역시 양무제 시기에 周興嗣에 의해 편찬된 것이고 '논어' 역시 皇侃이 편찬한 '논어의소' 10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제는 자신들이 달성한 학술적 성과를 왜에 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 양의 학술을 왜에 전한 셈이다. 이 또한 당시 양이 선진문화를 발신하는 기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양무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에 의하면 “국사(國史)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흥왕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년(549)에 양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 몇 알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사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내용은 다시 “양나라 무제(武帝) 태청(太淸) 초년(547)에 양나라의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를 가져왔고 진나라 문제(文帝) 천가(天嘉) 6년(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劉思)는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을 받들어왔다.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섰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고 하여 재확인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原宗興法'에서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죽였다. 곧 소량(蕭梁, 梁武帝) 보통(普通) 8년 정미(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죽은 해는 달마가 양무제를 만난 해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불교사에서 蕭梁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에서 보면 가장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381년에 秦에 衛頭를 보내 황제 부견(재위 357~385)에게 토산물을 바쳤다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564년에 北齊에 사신을 보낸 이후 중국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불교 전래나 공인을 가야 지역에도 적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3. 일본의 불교 전래

일본열도에도 6세기 중엽 경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전래된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552년(欽明 13)에 백제의 성왕이 석가불의 금동상과 經論 등을 전래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덕태자의 전기인 '上宮聖德法王帝説'에서는 ‘志癸島天皇御世 戊午年 十月 十二日’이라고 하였고 '元興寺伽藍緣起'에서는 ‘天國案春岐廣庭天皇 七年 歳戊午 十二月’이라고 하였다. 무오년은 538년이다.

백제에서 가져온 불상을 蘇我稻目(506~570)이 받아서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모셨다. 이후 588년(崇峻 元年)에 백제가 파견한 승려와 기술자(寺工 2명, 鑢盤博士 1명, 瓦博士 4名, 畵工 1名)가 일본 최초의 사찰인 法興寺를 짓기 시작하였다.

590년 10월에는 산에 들어가 절을 짓기 위한 목재를 벌채하였고, 592년에는 법흥사의 불당과 회랑을 짓기 시작했다. 593년(推古 원년)에 법흥사의 찰주의 심초에 불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하였다. 절이 완성된 것은 596년이었다.

다시 본존불의 제작에 착수한 것은 605년이다. 이렇게 일본 최초의 불교 사원이 완성되는데, 짧게는 8년 길게는 17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대체로 절의 건립에는 15~30년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로부터 따지면, 법흥사의 건물이 완성되는 데까지 58년이 걸렸다.

그런데 이처럼 일본에 불교가 백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전래되기 전에 이미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이주인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불교 신앙이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주로 씨족 단위로 모여 살면서 씨족 내의 사적인 신앙으로 불교를 믿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성왕의 불교 公傳 이전에 불상이나 경전도 반입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522년에 일본열도로 건너온 司馬達等(止利佛師의 祖父) 등은 大和國 高市郡 坂田原에서 草堂에 불상을 모시고 ‘大唐의 神’으로 예배하였다는 내용이 '扶桑略記'에 실려 있다.

4. 불교 전래와 문화의 변용

이처럼 불교 전래의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의 경우에 모두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불교 전래를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떨까?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물증의 형태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전래되었다고 하며 아신왕(아화왕) 대에는 불교를 믿을 것을 포고하였다.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중국으로 따지면 5호16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 한반도와 일본에 전래되었고, 율령제와 더불어 고대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불교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형성되는 시기는 그보다 훨씬 늦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84년이라고 하지만,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유적은 공주 시내의 대통사지(527년 창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도 이미 눌지왕 때 묵호자가 와서 불교를 전래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최초의 가람은 진흥왕 때 완성된 대흥륜사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544)에 大興輪寺를 지었다. '國史'와 '향전'에 의하면 실은 법흥왕 14년 정미(527)에 처음으로 터를 닦고 22년 을묘(535)에 천경림을 크게 채벌하여 그 役事를 시작하였는데 기둥과 들보의 재목은 모두 그 숲에서 넉넉히 취하여 썼고 주춧돌과 石龕도 다 갖추었다.

이 자료를 통해서 보면 이차돈의 죽음으로 계기로 불교를 공인할 수 있게 된 법흥왕은 곧바로 불교사원의 건설에 착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527년에 절터를 닦고 535년에 재목의 벌채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9년 뒤에 절이 완성된 것이다.

절터를 닦는 데만 8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정도로 대흥륜사의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절을 짓기 시작해서 완성되는 데까지는 17년이 걸렸다. 이는 일본의 法興寺 건립에 걸린 기간과 같다.

또한 불교의 전래가 곧 불교사원의 건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궁중에 焚修僧이 있었다는 기록과 아도의 스승 현창의 활동시기를 생각하면 소지왕대에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고 볼 수 있다. 소지왕이 죽은 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불교사원이 완성되는 데는 44년이 걸린 셈이다.

그렇지만 신라 최초의 사원인 흥륜사는 현재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기록으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흥륜사지라고 했던 곳에서 영묘사와 관련된 銘文瓦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많은 기록이 존재하고 또 신라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Ⅱ. 부산 김해 지역의 불교

1. 김해 지역의 불교 전래

김해 지역의 불교 전래에 관한 핵심적인 자료는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는 금관성의 파사석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 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建武) 24년 무신(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은 이 탑을 싣고 가라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붉은 돛과 붉은 기를 단 배에 주옥(珠玉) 등을 싣고 있었으므로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 하고,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바지를 벗던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 해안에 들어선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5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전해오지 않아서 그 지방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가락국본기'에도 절을 세웠다는 글은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곳에 절을 두었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는데―아도와 눌지왕의 시대에 해당되니, 법흥왕 전의 일이다―지금까지도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는데 그 사실이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므로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란 책에 이른 닭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원군 대손 김질왕이 정치에 극진히 힘쓰고 또 진리를 절실하게 숭앙하였는데, 세조의 어머니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물을 들여 원가 29년 임진에 원군과 황후가 합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王后寺라는 현판을 붙였고, 사람을 보내 근처 평전 10결을 측량하여 함께 헤아려 삼보의 비용으로 삼았다.

이 절이 생긴 지 5백년 후 장유사를 세웠으니 전(田)과 시(柴) 모두 3백결이 되었다. 이에 이 절의 삼강이 王后寺가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표 안에 있다고 하여 이를 폐하여 莊으로 삼아 가을수확과 겨울 갈무리하는 곳으로 만들었고 말 먹이고 소 키우는 외양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銍知王(김질왕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452)에 즉위하여 다음해 세조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처음 세조와 합혼한 곳에 절을 짓고 王后寺라 하였다.

이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김해지역에 절을 세운 것이 아도와 눌지왕의 시대라고 한 점이다. 또한 그 이전에는 절을 세운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 자료를 근거로 늦어도 452년에는 가야지역 최초의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왕후사가 건립된 것을 사실로 보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허황옥을 모신 것은 여성을 생산의 여신으로 모시는 고유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왕후사가 처음부터 사찰이었던 것이 아니라, 치술신모를 모시는 사당과 같은 성격이었던 것을, 김유신 때 와서 절을 지으면서 사당을 흡수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함안의 安羅國, 고령의 大加羅, 옥전의 多羅國 등에서도 불교의 흔적이 나타난다. 도항리 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판 꽃 모양의 점선무늬를 옆에서 본 연화문으로 보고 불교가 전래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연가 7년명(539) 금동여래입상 역시 안라국 권역에 불교문화가 유입된 근거로 보기도 한다. 다라국의 玉田 M3호분에서 출토된 연화문장식이 불교관련 유물인데, 이를 5세기 후반 다라국 지배층의 불교이해와 관련짓기도 하며, 옥전 M11호분의 연화문 관장식 역시 불교의 영향으로 본다.

2. 부산의 불교 전래 문제

동아시아 전체의 상황으로 보면 늦어도 2세기에는 중국에서 불경 번역이 시작되었고, 4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전래되었고, 5세기 말에는 신라에 전래되었다. 6세기 전반에는 불교의 영향이 일본열도에까지 미쳤다.

한반도 내부의 상황으로 보아도 선산 지역과 같은 경상북도 내륙에서도 묵호자나 아도 등의 승려가 그것도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였다. 선산ㆍ의성에서는 경주지역보다 먼저 석탑이 만들어지고, 그런 석탑이 경주지역 석탑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선산ㆍ의성이 고구려와 가깝기 때문에 조성된 특별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대의 교통과 교류에서 바다나 하천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철을 생산하고 철기를 만든 곳은 김해지역이었다. 철기문화가 해로를 따라 낙동강 하구까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세기 중엽에는 김해에서 생산된 철이 해로를 따라 樂浪, 濊, 倭까지 유통되었다. 모두 해로를 통한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해상교통의 중심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관가야ㆍ금관국(가라국)이 있었다. 남해와 서해를 거쳐 중국으로도 이어지는 교역의 거점이 김해였다면, 부산 지역은 동해로 나아가 울산, 포항, 울진, 삼척 등으로 연결되는 항로의 결절점이었고 또한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상도의 내륙지역보다 주변의 문물에 더욱 민감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해와 부산의 이러한 역할을 단순히 지역적인 분담의 결과가 아니라, 금관국이 김해의 대성동 고분군 축조 세력과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축조 세력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역할의 분담은 정치적ㆍ경제적 분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세력은 5세기 전반까지 낙동강 하류역에서 가장 큰 고분을 축조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전까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대성동 고분군 세력은 쇠퇴하였고, 복천동 고분군 세력은 신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고,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연산동 고분군을 축조하였다. 그렇지만 금관국이 멸망할 때까지는 두 세력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를 공유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묘제에 있어서도 두 세력은 같은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다(1:2 비율).

그런데 왜 김해지역에는 다양한 불교 관련 전승이 남아있는데, 부산지역에는 없을까? 이는 두 세력과 신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성동 고분군 세력은 구형왕(구해왕)의 전승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후손들이 경주 세력으로 편입되어 이른바 신김씨를 형성하였다.

김무력 - 김서현 - 김유신이 대대로 무장으로 활동했고,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될 만큼 신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대성동 고분군 세력의 과거는 기억되고 때로 과장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복천동 고분군 세력은 연산동으로 이동한 이후 부산 지역에 존속하기는 하였지만, 경주 세력으로 편입되지는 못했다. 이는 신라에 편입되는 과정이 김해와 부산이 달랐음을 뜻한다. 김해는 금관경이 설치되었지만, 부산지역에는 거칠산군, 동평현, 기장현의 1군 2현으로 편제되었다.

대신 양산 부부총이 보여주듯이 부산을 견제하는 세력을 인근에 배치하였다. 그만큼 부산 지역에 대한 지배가 중요하였고 또한 복천동 고분군 세력의 현지 지배력이 강고하였기 때문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전반까지 동아시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하더라도, 신라ㆍ왜에서는 아직 지배층 특히 국왕 혹은 지방 소국의 수장급 주변 그리고 불교가 확산된 지역에서 온 이주민 집단 속에서 영위되는 수준이었다.

백제ㆍ신라ㆍ왜의 한 가운데 위치한 가야 지역도 일단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한 김해와 부산의 상호관계를 생각하면 불교 전래와 확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해와 전승의 차이는 오히려 두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는 과정이나 그 후예들이 활동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불교의 유물과 유적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공인한 경우조차도 사원이 건립되는 데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세워진 사찰도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불교의 장례법도 바로 보급되지 않았다. 신라의 왕으로서 최초로 화장한 예가 文武王이다. 불교를 공인한 지 150년이 흐른 후이다. 경주 석탑 중 가장 빠른 것이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분황사지 모전석탑과 감은사지 석탑, 고선사지 석탑으로 7세기 전반 이후다.

백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서, 미륵사지 석탑이나 정림사지 석탑은 7세기 초를 전후한 탑으로 보인다. 침류왕 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이미 200년이 경과한 때다.

우리가 보는 당탑을 갖추고 불상을 모신 불교사원은 애초에는 국가권력이 건립한 것이다. 재력을 갖춘 호족들도 처음에는 작은 불상을 토굴이나 초당에 모셨을 뿐이다. 신라의 석탑도 출발은 모두 국가나 왕실이 만든 것이다.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에 비로소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주민들이 힘을 모아 부도나 탑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신라의 석탑은 경주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반드시 불교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부산 불교의 원점은 이제 막 탐색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현재로서는 불교 전래를 말해주는 전승도 기록도 그리고 불교와 관련된 구체적인 물증도 없다.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의 유물에서도 불교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부산 지역은 동해와 남해를 잇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로 연결된다. 해로를 따라서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보타락의 관세음보살을 믿는 신앙이 확산된다. 자애로운 관세음보살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불교의 보살이 아니라 항해자의 안전을 지켜주는 영험한 신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사실 허황옥도 해로를 따라 왔다. 그녀가 배에 싣고 온 물품은 漢肆雜物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그 말은 중국의 여러 가지 물품이라는 뜻이다. 배에 중국 물품을 가득 싣고 온 것이다. 파사석탑이라고 전하는 것도 균형을 잡기 위해서 배 밑바닥에 까는 돌이었을지도 모른다.

허왕옥에게 불교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따라다니는 것은 그녀가 절강성 주산열도의 보타락을 거쳐 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김해에 온 시기는 3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고, 당시는 이미 중국에 불교가 상당한 정도로 퍼지기 시작한 때로 생각된다. 강승회가 吳에 온 것이 247년이었다. 대륙과 반도를 우회하는 경로가 아니라 양자강 유역으로부터 직접 낙동강 하구로 오는 해로를 통해서 문물과 신앙이 가야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해가 그런 조건이었다면 부산이 달랐을 까닭이 없지 않을까?

 

동아시아의 불교와 부산 지역의 불교 전래에 대한 토론문

정효운(동의대)

발표논문은 부산 김해지역의 불교 전래 가능성에 대한 시론적인 논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산 김해지역의 불교 전래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어 왔으나, 전래 시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발표논문에서도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중국, 백제ㆍ신라, 일본열도의 상황을 언급하고 왕후사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부산 김해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개연성을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토론자로서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몇 가지 사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1. 왕후사가 창건되는 단계에 아직 堂塔伽藍과 같은 본격적인 礎石瓦葺 건축물을 예상하기 어렵다. 일본열도의 경우는 6세기 중엽에도 草堂이라는 형식이 보인다. 왕후사 위치 등을 파악할 때 건축 유구의 범위를 확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불교 전래 초기 단계의 사찰이 대체로 평지 혹은 평지에 가까운 구릉에 위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므로, 산지가람에 국한시키는 논의로는 부족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왕후사와 관련하여 파사석탑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파사석탑의 현재 위치를 왕후사의 창건 위치 및 장유사의 위치와 연관시켜 고려할 필요가 있다.

4. 파사석탑이 왕후사와 관련이 있다면, 왕후사가 허왕후릉의 陵寺였을 가능성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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