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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석은 교회자리 구지가는 찬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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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석은 교회자리 구지가는 찬송가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7.06.18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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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기록돼 있다. 김수로왕은 지금의 김해 지역에 나라(금관가야, 金官伽耶)를 세워 가야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김수로왕은 김해 구지봉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김해와 김해김씨 허 씨 문중에 전해오는 정설이다.

이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해사람들과 김해김씨 문중은 동의하지 않는다.

정설이든 구전이든 2천 년 역사와 함께 구지봉의 탄생설화는 이제 정설 그 이상의 역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경남도민 체육대회 성화는 매년 '제4의 제국 가야'의 건국 설화를 간직한 이곳 구지봉에서 채화되어 대회장인 시군으로 봉송되는 등 성스러운 곳이다.

김수로왕의 탄생지인 구지봉이 1988년부터 일부 기독교 광신 목사들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교회가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 목사들은 구지봉 석에 교회가 있었다며 구지봉 석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기도 했으며 기도하는 장면을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발행인으로 있는 기독교 잡지 월간 신앙계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27년 전 당시 신앙계보도에 대해 필자가 발행하고 있던 월간 금관가야 잡지를 통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금관가야는 이 기사가 실린 특집호를 2만부 제작하여 전국의 불교종단, 전국 주요사찰, 언론계, 정계, 학계, 불교단체, 불교 지도자들에게 무상으로 발송하여 대대적인 이슈가 되면서 그들의 주장을 묵살 잠재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또다시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과 맹신 목사들이 이를 근거로 가락국은 기독교 국가였으며 구지가는 찬송가이고 수로왕은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고, 수로왕이 가락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포하고 교회를 지었다는 등 가락국 역사를 180도 뒤엎어 버리는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대구 말씀교회 조국현 목사는 다음과 같은 구지가에 대해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라고 하면서 춤을 추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과 여섯 가야의 건국 설화인 구지가를 “구하소서 구하소서 구원하여 주소서! 머리 되신 성령이여 나타나시옵소서!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적군에게 태워지고 포로 되어 갑니다”라는 찬송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또 구지봉은 서기 42년에 기마민족인 김수로왕이 김해에 처음 도착하여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하여 왔다고 선포하고 황금알 6개를 선사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수로왕이 음력 3월 3일 계욕일에 예수의 제자 도마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찬식을 가진 곳이 구지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발굴된 가야유물 중 굽다리접시와 각배 등은 기독교 성찬이었으며 국립김해박물관을 기독교박물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거로 사도 도마가 철을 들여와 강철 산업이 발달되었고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찬기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을 보고 가야 시대는 기독교 국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에 불교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서기 372년에 고구려 때 처음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가야불교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일반 용기가 아닌 다기와 성찬기로 그 당시(서기 42~532)의 예배 형태도 추론해 볼 수 있으며 가락국의 토기 자체가 기독교 문화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목사들은 사도 도마가 가져온 철의 기술 때문에 낙동강의 가야연맹 지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생산된 철로 낫과 도끼를 만들어서 나무를 쉽게 베고 철을 제련하고, 다시 나무를 베고 농경지를 개간하면서 엄청난 토사가 유입되면서 그러한 충적토로 지금의 김해평야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외에도 기독교인인 김수로왕과 역시 기독교인인 허황옥을 예수의 제자 도마가 중매를 했으며 파사석탑 역시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온 일반 돌이지 석탑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락 고찰 30여 곳도 5세기 전후에 건립되었으며 가락 국사 장유화상도 5세기 이후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수로왕이 어디다 교회를 지었으며 또 기독교 문화와 신앙생활의 근거에 대해서는 단한 가지도 증명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같은 기독교 학자인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조덕영 박사는 ‘가락국기에 나타난 기독교적 증거 논쟁도 설령 이들 증거들이 일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유물만 가지고서 검증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종교이다. 이런 구체적 흔적이 없다. 따라서 가야 기독교 설에 나타난 증거라는 것이 설령 어느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양보하더라도, 그것은 정통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앙 집단이라기보다는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된 일그러진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되겠다. 제도권 사학계는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김해 기독교계 일각에서 부활하고 있는 가야역사 왜곡 운동이 교인들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일본의 우리나라 독도 역사 왜곡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락 종친과 김해시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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