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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인도불교 접점(接點) 언제쯤 겹쳐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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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인도불교 접점(接點) 언제쯤 겹쳐지나?
  • 조민규 기자
  • 승인 2017.09.05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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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학술대회, 서기 42년 가야국 건국 동시 가야불교 시원년 삼아야
▲ 허성곤 김해시장ㆍ민홍철ㆍ김경수 의원ㆍ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 등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를 규명하는 것과 인도 아요디야의 위치를 찾는 것이 우선시 되는 이유는 가야불교와 인도불교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가야불교학술대회가 지난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성황리에 마쳤다.

김해시와 동국대학교 세계불교연구회, 민홍철ㆍ김경수 두 국회의원이 주최했다는 점에서 사려(思慮)깊게 느껴진다.

또 지방에서 자주 개최되던 가야불교학술대회가 서울에서, 그것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리는 것은 좀처럼 보기드문 일례로 의미를 부여했다.

총 400석 규모의 국회도서관 대강당은 새벽 벽두부터 버스를 타고 서울 여의도 국회로 상경한 김해지역 스님 50여 분들과 불교신도ㆍ가락종친회원 등 500여 명의 김해시민들의 뜨거운 성원을 보여줘 뜻을 더했다.

이렇듯 금관가야는 가야제국을 주도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신문화를 꽃피웠던 불교의 전래 등에 이해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또한 이날 학술대회를 계기로 가야 불교사의 위상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더군다나 가야 불교사의 재조명과 재인식을 통해 고대 한국의 사국(四國)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도 컸다.

하지만 역사학자들는 가야를 포함한 `남방불교 전래설` 인정(認定)에 주저하고 있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 고영섭 교수.

◆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한반도 남부에 자리했던 가야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맞서며 왜국까지 경략(經略)했던 제4의 제국이었다"며 "수로왕은 붓다의 성도지이자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부다가야`를 의식하여 불교식 국명인 `가야국` 혹은 `대가락`(가락은 가야의 이명)으로 정했다"고 표방했다.

고 교수는 "수로왕은 가야의 새로운 왕성터를 `십육 나한이 살만한 곳`이자 `일곱 성인이 살만한 곳`이라는 불교적 왕성 비정을 통해 국제적으로 앞선 선진문물인 불교적 이념에 의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고 모색했다.

이어 고영섭 교수는 "수로왕이 대륙에서 서해(西海)를 건너온 서기 42년은 가야국의 건국 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왕에 의해 법제적으로 공인된 가야 불교의 시원년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수로왕의 8대손인 질지왕은 수로왕의 뜻을 받들어 `대왕사`와 `왕후사`를 건립함으로써 불교 공인을 재천명 하였고 재확인 했다"면서 "가야는 불교적 이념에 의해 나라를 통치하면서도 철기 문화와 조선(造船)기술을 주축으로 대륙과 해양과 교역했다"고 평가했다.

금관가야는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에 필적하는 사국시대를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또 고영섭 교수는 "금관가야는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반도와 대륙과 교역해 고대의 한일과 한중 관계사에서 매우 주요한 족적을 남겼다"며 "금관가야는 가야제국을 주도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이들 나라에 대한 통합적 이해가 필요하며 이들의 정신문화를 꽃피웠던 불교의 전래와 문화에 대한 종합적 이해도 요청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 최경아 교수.

◆ 최경아 동국대 교수는 "가야국의 존재는 우리는 붓다의 입멸 100년 후에 즉위했다는 아쇼카왕의 행적으로부터 인도 불교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며 "아쇼카왕이 인도 전역에 세운 석주를 통해 당시 민간의 삶과 그의 통치 이념 그리고 불교를 포함한 종교의 분포와 실상을 유추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최 교수는 "인도를 순례한 중국 구법승의 자료가 있다. 법현은 가장 먼저 인도에 대한 기행문을 남겼는데 4세기에 해당된다. 그 이후 현장, 의정, 혜초 등이 기행문을 남겼으나 모두 가야국이 멸망한 이후의 순례객들이다"고 예측했다.

허황후가 가야에 온 서기 48년을 불교가 도래한 원년으로 추정한 것이다.

최경아 교수는 "불교의 국제화는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야심찬 전도사 파견에서 시작된다"면서 "아프라카나 유럽에까지 전도사를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히 전파가 이루어진 것은 스리랑카뿐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 일대로 불교가 전파된다.

이 무렵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게 되고 중앙아시아를 통해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불교와 더불어 대승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전제했다.

최 교수는 "가야사에 대한 연구는 90년대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고분 발굴 등을 통한 사학자들의 연구가 지속되는 가운데 `삼국유사`의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기록이 특히 주목을 끌어 `아유타국` `쌍어` `파사석탑` `장유화상` `한국어과 따밀어의 유사성` 등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아유타국이라는 지명과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최경아 교수는 "인도 아요디야에서 눈에 띄게 자주 보이는 쌍어의 문양과 김해지역과 경상남도의 사찰에서 왕왕 발견되는 쌍어문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단정했다.

파사석탑에 대해서 최경아 교수는 "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재질의 파사석탑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 파사석탑의 재질은 인도 동부해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가야불교의 남인도 전래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구체적인 증빙자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춰낸 것이다.

최경아 교수는 "한국어와 따밀어의 유사성은 두 언어의 유사 단어들을 열거해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고 하면서 "슬라브어 등을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이 따밀어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따밀어를 포함한 드라비다어에서 모든 언어들이 파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시사했다.

최 교수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허황후와 아유타국, 파사석탑 이 외에 우리에게 알려진 관련 인물로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오빠 장유화상(長游和尙)이 있다. 그는 가락국에 불교를 전파했을 뿐 아니라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성불(成佛)시킨 이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전해진 것이다"고 설명했다.

김해 은하사에 있는 장유화상의 영정에서 그가 월지국출신임(月氏國來駕洛國長遊大和尙之照 )을 밝히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최경아 교수는 "15세기에 들어오면 허왕후는 설화 속 인물이 아닌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되는데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纂地理誌)`에 처음으로 그의 능(陵)이 언급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허왕후의 이야기는 18∼19세기를 거치면서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확대 재생산되는데 현재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명월사의 `명월사사적비문`에는 허왕후의 남동생인 장유화상의 존재가 등장한다"고 말했다.

또 "1915년 숭선전 참봉 허식이 찬수한 `장유화상기적비(長遊和尙紀蹟碑)`에도 장유화상이 허왕후를 호위하던 태후의 아우로 만년에 가락왕자 7인과 더불어 방장산에 들어가 부처로 변하니 지금 하동군 칠불암이 그 터"라고 소화했다.

불교적 용어와 개념이 나오는 것은 후대의 부가일 수도 있지만 이름까지 후대에 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 관례이다는 것이다.

최경아 교수는 "가야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불교가 이미 도래했을 수도 있다"면서 "6세기 전반 신라는 불교왕명시대라고 하여 법흥황, 진흥왕 등 불교와 관련된 인명을 사용했고 562년 16세에 대가야를 정복한 화랑의 이름도 사다함(斯多含)이었다"고 유추해석도 했다.

최경아 교수는 "허황후 도래 이후 150년이 지났어도 절이 건립되지도 불교도 유포되지 않았는데 이는 상교 곧 불상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사석탑은 허황후 이후 250년 가까이 지나서야 왕후사의 건립과 더불어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가야국에 온 해가 48년 이었다면 당시 인도에는 불상의 조성이 아직 널리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파고 든 것이다.

▲ 정진원 교수.

◆ 정진원 동국대 교수는 "가야불교의 관련 자료는 방대했고 수많은 불교적인 암호와 다빈치코드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삼국유사 정독을 통해 드러난 불교적 요소들이 각분야의 학자들과 지역전문가들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가락국 시조 허황옥은 신라 시조 알영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이 함께 부각되는데 이들의 재조명이 필요하다"면서 "김수로왕이나 박혁거세의 내조자 역할로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그들을 능가하거나 동등한 개국의 시조라고 일연은 기록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특히 정진원 교수는 "허왕후에 대한 방증은 왕후사 건립 등 여러 곳에 나타나지만 현재까지 전하는 지명이 왕후(王后)의 `후포(后浦)`가 아닌 `주포(主浦)`에 서린 임금의 자취를 포착해낼 수 있다"며 "허황옥의 위상에 대한 기록을 되짚어 보면 그 권력의 연장선상에서 오라비(남동생) 장유화상이 순조롭게 가야의 불국토를 건설하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역사와 고고학계에서 엄격한 실증 사료 중심으로 바라보는 가야연구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각 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국어학적 어원 고찰, 인도 산스크리트 문자 비교 연구, 힌두문화의 시바와 삭티 신앙을 비롯한 문화 교류 등 빅데이터 구축을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빙산의 일각만 드러내고 있는 현재 가야에서 온전한 모습을 퍼즐처럼 맞춰 살려내야 한다는 대목이다.

정진원 교수는 "무심히 지나친 삼국유사 기록의 정독을 통해 여러 유형과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김해지역의 구전과 그 스토리텔링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가야 유적들의 자취를 귀기울여 듣고 공통 요소를 찾아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중요한 시점이다고 해석되는 부분이다.

정진원 교수는 "가야불교를 일부 편향된 종교적 시각으로 보기보다 당시 가야에 뿌리내리는 우리 고유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며 "가야는 오래 잠들어 있었지만 여전히 21세기 김해를 위시한 가야지역과 가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미답의 나라이다"고도 소개했다.

김해지역의 가야를 토대로 역사, 고고, 재야사학, 인도학, 언어학, 불교학, 지리학, 해양학 등이 함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일부터 시작하기를 제안한 것이다.

◆ 한편 가야불교진흥원 이사장 인해스님(바라밀선원)은 "유물발굴 위주의 고증사학도 중요하나 구전(口傳)되어오는 신화, 전설, 민담, 설화 등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며 "구전의 역사는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으나 사실을 매개로 하여 성립된다. 기록의 역사가 없던 시절에는 문자만큼이나 구전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인해스님은 "남방불교 국가인 미얀마, 라오스, 스리랑카 등에서는 그때의 전통 방식대로 수많은 스님들이 경ㆍ율ㆍ론 삼장을 다 외운며 다 외운이를 일러 삼장법사라 한다"면서 "우리들도 모르는 증조부ㆍ고조부를 모른다고 해서 조상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듯이 전승되어 오는 가야불교도 허구라고 할 수 없다"고 적시했다.

이에 인해스님은 "김해시 문화재과와 관광과를 비롯한 공무원들과 신경철 고고학자, 지질학 전공 이학박사 부경대 총장 박맹언 부경대 총장님을 모시고 파사석탑을 조사한바 있다"고 하면서 "정밀조사는 아니었지만 80프로 이상 맞다. 조사결과 돌의 학명은 탄산염 각력암으로 일반적으로 적색대리암으로 층리가 뚜렷하다"고 갈무리 했다.

▲ 1~2세기 무렵 가야의 장신구.
▲ 푸난의 오케오 유적에서 발굴된 로마産 염주와 구슬 목거리.
▲ 파사석탑 내부 모습과 재구성.
▲ 파사탑 해체(지름 10cm 깊이 6cm 사리공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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