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성서, 삼국유사
문화재를 아끼며 소장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둑을 맞거나 강도를 만날 위험도 있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생활고이다. 대개의 경우는 생활고와 싸우면서도 계속해서 소장할 각오로 수집한다. 한 점 한 점에 조상의 얼과 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할 사람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거금이 될 만한 국보급 문화재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스님의 길을 택한 주인공은 ‘도혜(道慧)’라는 법명으로 불리는 곽영대이다. 곽영대는 두 살 때 이병직의 이성손자(異姓孫子:혈연관계가 없어 성이 다른 양자)로 들어와 이병직의 무르팍에서 고미술품을 보고 배웠다. 이병직의 집안은 대대로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던 내관직이었고, 가까이는 고종 황제를 모셨다. 곽영대의 할아버지 이병직은 대궐에서 하사받은 고미술품을 보고 자랐으며, 생활민속품에서 시작한 이병직의 문화재 수집은 어느새 토기, 도자기, 서화로 옮아갔고, 사랑채엔 언제나 고미술품을 아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인영은 생활고로 고미술품전시회 경매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보물 제418호)’를 내놓았고 결국 낙찰받은 사람이 바로 이병직이다. 이후 이병직은 나라를 위해 초석이 되는 교육사업에 투신하겠다는 신념을 가졌고, 그의 신념은 그간 소중하게 간직하던 고미술품을 수도 없이 내다 팔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병직이 교육사업에 모든 재산을 쏟아붓자 집안은 급속도로 가난해졌고, 대지주였던 이병직은 일시에 농지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평생을 애장하던 유물 몇 점을 손자 곽영대에게 물려주며 유언을 남겼다. “네가 고생을 했으니까 어렵거든 팔아서 써라.” 그러나 곽영대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닿고 민족의 혼이 담긴 유물들을 단지 생활이 어렵다고 팔아 쓸 수는 더욱 없었다.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시시때때 조여오자 그는 ‘삼국유사’를 껴안고 여러 번 울었다고 한다. 이인영의 손을 거쳐 이병직이 소장한 삼국유사가 보물 제419호로 지정받은 것은 1965년 4월 1일의 일이고, 2003년 2월 3일 국보 제306호로 지정이 승격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곽영대는 1996년 10월, 삭발을 하고 ‘도혜’ 라는 법명으로 완전히 귀의했다. 삼국유사를 통한 일연 스님과의 귀중한 인연이 이렇게 열매 맺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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