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고지(淸水幸次), 그는 한국의 도자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일본 골동상으로 그런 그에게 천하의 지인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백자가 있었으니, 바로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서 군정령에 의해 보따리 크기를 제한받자(배낭 한 개), 집안일을 돌봐주던 집사에게 이 항아리를 부탁하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1년 뒤 방탕에, 도박까지 즐기던 집사 아들은 이 항아리를 골동상 권명근(權明根)에게 넘긴다. 권명근은 살던 기와집까지 팔아 단칸 월세방으로 옮겨가며 6000원을 주고 잔금을 치렀지만 기분은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를 잘만 팔면 기와집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라고 ‘눈깔’이란 별명을 가진 한영호(韓永鎬)를 만나면서 일생에서 가장 가혹한 일을 겪게 된다. 한영호는 장택상(張澤相)의 심복 거간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집사를 백자 항아리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그 아들이 훔쳐서 한 거래를 원인 무효화시키려는 술책을 꾸몄다. 억울한 것은 권명근이었다. 20여 일을 버티던 그는 결국 포기 각서를 써주고 풀려났지만 그 후 시름시름 앓다 나온 지 석 달도 못 돼 목매단 시체로 발견됐다. 그 후 절대적 권세를 누렸던 장택상도 권명근의 원혼(寃魂)에 얽혔는지 국무총리로 있다 몇 달이 못 돼 물러났다. 6·25전쟁이 끝나고 부산으로 환도한 후에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 이승만과 겨루었지만 낙선하고 말았고, 선거 패배로 사정이 매우 어려워지자 이 항아리를 장규서(蔣奎緖)에게 넘긴다. 장규서는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을 도와 이대박물관의 전신인 필승각(必勝閣)을 설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박물관 기증을 전제로 백자 항아리를 필승각으로 넘긴다. 일금 1500만환. 당시 이화여대 신입생 1000명의 등록금과 맞먹는 큰돈이었다. 현재 이 백자 항아리의 추정 가격은 150억원 이상. 시미즈의 애환과 권명근의 한이 밴 이 천하의 명품은 그렇게 하여 이대박물관으로 들어갔고,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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