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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정치비화 -12- 시의원 낙선으로 한가정이 풍비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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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정치비화 -12- 시의원 낙선으로 한가정이 풍비박살
  • 경상도촌놈 조유식
  • 승인 2010.04.11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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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무소속 도의원 출마 낙선(동상동.북부동.내외동). 98년 시의원 출마 낙선(내외동).

이렇게 두 번의 선거에 출마하여 두 번다 보기 좋게 낙선을 했다.

하지만 학연, 지연, 혈연이라고는 없는 필자에게 두 번의 선거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성원과 격려,지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선거기간동안 매일 돈만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신 스스로 필자의 당선을 위해 선거 운동을 참으로 열심히 해준 사람들도 많았다.

고맙고 감사하고 은혜를 갚아야 할 분들이 참 많았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사회를 위해 묵묵히 봉사하면서 보람된 일을 하는 것만이 그 분들의 보은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까지 크고 작은 일들을 하고 있다.

신문사를 운영 하는 것 또한 그 일환일수도 있을 것이다.

힘없고 돈 없고 빽까지 없는 소외된 시민들의 입장에서 억울함이 없도록 보살피면서 권리와 생활문제 등 민원해결에 나름대로 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고 BBS운동과 어려운 청소년 후원결연 운동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여하튼 김해시장 선거를 돕기 위해 시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시의원출마를 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선거를 치렀지만 후회 막심한 선거였고 일생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선거이기도 했다.

그분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이 되었고 그날 밤 12시30분경 그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회장 수고했다. 조회장 은혜 평생 잊지 앉겠다. 정말 고맙다”

이렇게 평생 잊지 않겠다던 그분의 말씀은 그 전화 후 오늘까지 말씀으로만 끝이 났고 그 많은 지원과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쳐버렸다.

선거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아파트와 일부토지는 경매로 넘어가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했다.

입후보자였던 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의 충격과 고통은 더욱 심해 그 후유증이 한참을 갔다.

아들과 딸이 남들 다가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주유소와 음식점에서 일을 했고 아내는 김해시내 아파트 청소부로 취업을 했다.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선거에서 당선 되었다 해도 달라 질것이 없는 비참함, 그 자체이기도 했던 그 당시의 상황은 오로지 필자가 한순간 잘못 선택한 것이 원인이었기에 누구에게 원망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선거법위반으로 조사를 받기 시작 했지만 대부분 무협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선거 9개월후 김해터미널 이전추진당시 조합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전직 공무원이자 조합원 황모씨(활천동)의 고발에 따라 공금횡령혐의로 구속되어 한참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

일전에 언급을 했던 김해여객터미널 내외동 이전촉구 시민추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부터 거대한 권력과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선거에 낙선하고 몰락한 힘없는 터미널 이전 추진위원장은 그 거대한 힘 앞에는 추풍낙엽에 불과 했다.

대법원까지 가는 투쟁을 벌이다 특별사면과 복권을 받았지만 구속기간동안 필자가 격어야만 했던 수모와 고통은 죽을 때 까지 글을 쓰도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중 필자를 특수부 부장검사실에 불려 놓고 부장검사가 하는말이  " 당신 말이야 격지놈이인주제에 김해 유지들하는 일에 방해하지말고 함게 잘 살수있는 방법을 택해야지 그분들을 손해보이면 되겠냐" 며 자신을 사주한 그 김해의 권력 층을 비호하는 발언을 서섭치 안했다.

이후 터미널이전촉구 시위를 하면서 들어간 경비. 조합사무실 운영경비. 관련기관 담당자들에게 선물했던 병풍구입금액. 국회와 토지공사를 항의 방문하면서 집행된 경비. 터미널 앞에서 가진 대규모 시민항의 집회 경비 등에 대해 영수증(세금계산서)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횡령혐의가 적용되었다.

그기다 부장에게 대들은 괘심죄까지 포함하여 검사구형 5년이라는 후한 형을 구형받기도 했다.

필자가 부인 할 수 없는 혐의도 있었지만 이것은 누군가의 청탁을 받고 진행된 각본에 의한 조사였기에 어떻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한평생 징역이라도 살릴 듯이 모욕과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수모를 격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자자신을 반성해보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덕분에 책도보고 공부 참 많이 했다.

하지만 필자가 구속되고 난 후 필자소유의 땅(17필지2445평 생림면 하사촌)이 필자도 모르게 경매에 들어가 아주 낮은 가격에 모두 낙찰된 사실을 출소 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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