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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 막힌 김해 -4- 김해가 낳은 큰 정치인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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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 막힌 김해 -4- 김해가 낳은 큰 정치인 김택수
  • 경상도촌놈 조유식
  • 승인 2010.11.21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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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허튼소리 코너를 통해 `氣 막힌 김해`편을 연재 하면서 걱정을 했던 부분이 있다.

김해의 역사와 인물들의 발자취를 살피면서 혹시나 잘못된 기록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1969년에 김해에 안착하여 살고 있다. 따라서 김해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저 필자가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대단한 도시였던 김해가 그 어떤 장애 때문에 성장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시민들도 화합보다는 사분오열로 상호 불신 풍토가 확산되고 있다. 김해 인물들이, 기업들이 자의적인 것 보다 타의적인 영향으로 나래를 접거나 고초를 겪어야만 하기도 했다.

김해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된 1973년 11월 14일 이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승승장구하던 의원들이 어느날 갑자기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여기에는 6,7,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고 김택수 전 의원도 포함된다.

한일합섬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배경으로 공화당은 김해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한일합섬 창업주인 김한수 회장의 동생 김택수 씨에게 제6대와 7대에 공천을 주어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김택수 의원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공화당 원내총무를 역임하는 등 정권실세이기도 했으며 IOC위원으로서 한국 스포츠발전에 큰 기여를 하면서 승승장구 했다.

7대 후반기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을 이끌다 당 총재가 김택수 의원을 공화당 원내총무로 지명하자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달리하여 3선 개헌 통과에 눈부신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같은 당 의원들과 야당 시민사회 단체로부터 욕이란 욕을 다 들으면서 당의 방패막이가 되어 죽을 고생을 했지만 김택수 의원은 결국 제8대와 9대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하고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8대와 9대 김해 지역구를 같은 당 김영병 씨에게 금배지를 내준 이후 제10대(선거일 1978년 12월)때 공화당 공천을 받아 김해에서 당선 되었다.

이때는 김해, 양산 중선거구로 1선거구에 2인을 선출했다. (신민당에선 신상우 의원 당선) 김택수 의원은 형이 이끌고 있는 한일그룹이라는 든든한 배경으로 6~7대 의원시절 3~4선급 의원으로 예우를 받을 정도로 거물급 의원으로 추진력 있는 차기 유망 정치인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다수의 김해 사람들은 김 의원을 보고 김수로왕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큰 정치인이 될 것이라며 많은 기대 속에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성원을 보냈다.

이러했던 김택수 의원이 제8대 공천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나라와 국민을 위한 당신의 큰 꿈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김택수 의원을 아끼던 종친들과 지역 인사들은 김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시절에 돌아가신 모친의 산소가 문제가 있다며 이장을 권유하기도 했다.

당시 김 의원의 모친 산소는 김수로왕의 탄생지인 구지봉 하부능선에 있었다.

산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일합섬가의 자녀들이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김 의원도 공천에서 탈락 됐던 것이다. 결국 모친의 산소를 지금의 김해시 내동 수인사 아래로 이장하였다.

김 의원은 제10대에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3선 의원으로 재기했지만 그동안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김 의원은 곡창 지역인 김해평야가 홍수로 상습침수 되어 농민들의 1년 농사를 망치는 일이 빈번하자 정부의 예산으로 수입한 대형양수발전기 2기중 1기를 김해로 가져와 김해의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김 의원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형 김한수 씨가 있었다. 1978년 김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김 의원의 자택(왕릉 앞)에 머무르고 있던 고 김한수 회장께서 당시 필자를 비롯하여 배석현, 조종택, 배칠만(모두 고인이 됨)씨를 앉혀 놓고 김 의원이 돈으로 부터 떳떳하고 나라의 큰 정치인이 되기까지 자신이 그 뒤에서 뒷바라지 했던 일화들을 들려주기도 했지만 생략한다.

김해의 큰 인물 나라의 큰 지도자 김택수 의원은 못다 한 꿈을 가슴에 안고 1983년 지병으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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