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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12)- 허황옥 공주자 지참한 황벽(黃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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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12)- 허황옥 공주자 지참한 황벽(黃璧)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7.21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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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황벽`은 옛부터 황색(黃色) 물감의 원료로 쓰인 식물로, 이곳 복주에서 일어난 선종(嬋宗)을 일본국에서는 황벽종(黃璧宗)이라 부르는 사실과, 왕후의 생국(生國)을 `허황국` `황국` 그리고 그 이름인 `황옥(黃玉)` 등의 `황`자는 이 복주와 무관할 수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 `복주`를 주목하게 된것은 이런 추리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국 규우슈우의 대외무역항으로 역사적으로 알려진 `나가사끼(長崎)`에 가서, 복주에서 옮겨와 지었다는 `아까몬(亦門)`이라는 산문(山門)의 지붕 장식이 수로왕릉 입구의 장식판을 입체화한 것임을 본 데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탑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두 마리의 물고기)

그래서 자세히 살피니 이 절(崇福寺)의 본존이 부처가 아니라 `보사(碼姐)님`이라는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신(神)이며, 지금도 옛(복주) 풍습대로 음력으로 7월 26일, 27일, 28일의 사흘에 걸쳐 `보사제(碼姐祭)`가 거행되면, 일본국 전 지역에서 화교들이 모이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숭복사(崇福寺)의 보존이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여신(女神)이며, 그 이름을 한자로 `마저(碼姐)`라 쓰고는 `보사`로 읽는 것은 허왕후가 재차 항해에 나설 때, 부왕이 하사한 탑(塔)을 `파사석탑(婆娑石塔)`이란 사실을 상기케 한다. `파사`란 뜻으로는 새길 수 없는 점으로는 `마저(馬姐)`와 동일 할 뿐더러 항해의 안전을 지키는 영험(靈驗)에 있어서, 그 음(bosa, basa)이 거의 같다는 것은 우연이 상의 부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 허왕후의 승선은 7월 27일 이전에 가락국의 남단 주포(主浦:현 지명은 酒浦)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 날에 맞춰 유중(惟宮)에서 혼례를 올리게 된 것은, 이 여신(女神)의 축제의 중일(中日:축제의 한가운뎃 날)이 음력으로 7월 27일이라는 부합이 또 하나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 날의 허왕후의 항로를 가설(假說)해 보면,

(1) 민이란 한족(漢族)을 지칭하고, 황국(黃國), 혹은 `허황국(許黃國)`이란 가락국 측에서도 지칭한, 복주까지 진출한 태양왕족(太陽王族),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군(君)이던 부왕(父王)의 명을 받아, 황옥(黃玉)공주는 서기 48년 음력 5월 중에 복주를 출항.

승선인원은 공주와 잉선 2명과 그 부인, 노비 20여명, 승무원(乘務員) 15명, 계 40명.

적재(積載)품은 다량의 혼수.

(2) 왕후의 승선은 외양(外洋)에 나서자 하중(荷重)이 큰 파도를 헤쳐나가기에 부적당하다고 판단, 일단 귀항하여, 부왕이 하사단 5층 석탑(파사석탑:수은 함량이 많은 화성암)을 적재하여, 10개로 나누어 지는 이 탑신(塔身)으로 승선의 발라트(Ballst:배의 홀수의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서 싣는 자갈)로 써서, 동진(東進)하여, 타이완 오끼나와 열도를 따라 동지나해(東支那海)를 건너, 북상(北上)해서, 당시 `용성국(龍城國)`으로 불리던 `나가사끼`에 당도하여, 현해탄을 건너 음력 7월 27일 이전에 가락국 주포(主浦)에 정박해서 대기.

(3) 수로왕과는 미리 약속된 혼례식의 날인 파사(婆娑)님 제(祭)의 중일(中日)인 7월 27일 주포를 떠나 낙동강을 북상하던 왕후의 승선은 그 왕조의 전통적인 기치(旗幟)인 천기를 게양하고 있었고, 망산도(望山島) 초소에 입대하던 유천간(留天干)에 의해 발견됨.

유천간의 거화(擧火) 신호를 받은 승점(乘點,上店)에 파견된 신귀간(神鬼干)은 당장 대청천(大淸川)을 건너 미리 건설된 유종으로 가서 혼례식 거행에 필요한 준비에 착수. (오전 10시 이전으로 추정됨)

(4)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갈아타며 상주(上奏)한 유천간의 보고를 받은 수로왕은 마련해둔 호화영접선에 윤천간이나 잔류간(千)들을 태워 왕후 승선에 가서 영접해 오기로 명함.

이는 용의주도한 왕이 왕후가 진정 지체높은 태양왕족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영접선에 동승하기를 왕후가 거절했기 때문에, 왕은 비로소 혼례 자리로 나아가기로 하고, 미리 보낸 안내인에게 승선을 별포(別浦)로 입항하게 하여 상륙시켜 대기시킨 가마로 왕후는 장유치(長遊峴)를 넘어 고개마루에서, 수로왕이 보낸 속옷을 갈아입고,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산령(山靈)에게 폐백함.(정오 이전으로 추정)

(5) 장유치를 내린 왕후의 꽃가마는 잠시 강변(현재 응달리)에서 휴식하면서 신부 단장(丹粧)을 하고, 이마에 곤지를 찍고, 영접선에 승선, 대안 행재소(현재 흥도로 추정)에서 수로왕의 일행에 합류 승점으로 수행(水行).

(6) 승점에서 가마로 바꿔탄 왕후는 수로왕의 행차는 따라 유궁에 도착. 계하(階下)에서 왕후 수행원을 접견한 후 횃불 밝은 유궁에서 혼례식을 거행.(하오 5시 이후로 추정)

(7) 유궁의 신방(新房)에서 어국침(御國寢)에 드신 자리에서 왕후는 `아유타국 공주`라는 신분을 밝히고 수로왕을 뵙게 된 경위와 감격을 피력하고, 수로왕은 왕후를 기다리게 된 경위를 설명.

(8) 다음 7월 27일. 수로왕은 왕후의 승선을 회항(回航)하게 하고, 이때 맵쌀 1백5십섬(碩)과 비단 4백5십필을 하사했음. 이 비단 4백5십필은 실크로우드 역사상, 최초의 비단 송출(送出)의 송장(送狀)이라는 세계사(世界史)적인 의의를 가짐.

이렇게 인류사상 기록에서는 최고의 혼례식 경위를 가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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