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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1>“50만 김해 - 근대50년”김해의 역사와 배경 가락국 건국과 김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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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1>“50만 김해 - 근대50년”김해의 역사와 배경 가락국 건국과 김수로왕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0.05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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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 취재 및 보도일정
★취재기간 : 9월15~10월15일(1개월)
★취재지역 : 부산 강서구 . 진해. 김해 일원
★취재내용 및 보도기간 : 10월5~11월09일 (7회 연재)
1회(10월5일) 김해의 역사와 배경(가락국 건국과 김수로왕)
2회(10월12일) 50년 전 김해의 면적과 인구 생활양식(1960년대)
3회(10월19일) 50년 후 오늘의 김해면적과 인구 생활양식(2011)
4회(10월26일) 김해군 김해읍, 김해시로 승격 되다.
5회(11월2일) 곡창지역 김해평야가 사라졌다.(부산에 편입된 대저읍, 명지.녹산.가락면)
6회(11월9일) 김해시. 군 통합 상처뿐인 김해시 탄생 (50년간 김해와 함께한 정치인 현황)
7회(11월16일) 50만 대도시 김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1990년 당시 김수로왕릉 전경.  
 

■ 선사시대에 대해
선사시대(先史時代)란 역사기록(史)에 앞서(先) 존재했던 시대로 문자기록이 없는 시대이다. 김해에 대한 문자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지』의 구야국(狗邪國)과 구야한국(狗邪韓國)이며,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보이는 대가락(大駕洛)과 가야국(伽耶國)이다. 『삼국지』는 3세기 후반 경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이지만, 다른 기록과 고고학자료에 비추어 볼 때, 기원전후의 시기까지 올라가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고, 고려 문종 30년(1076)에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락국의 건국을 기원 후 42년으로 전하고 있다.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김해지역의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91년 김해 구지봉에서 수로왕 탄생을 재현하고 있다.  
 

■ 선사시대의 구분과 명칭
신석기와 청동기문화의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 김해의 선사시대에는 어떠한 명칭이 적당했을까? 문자기록이 없으니까 임의적으로 이름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김해의 신석기문화를 「최초의 김해인」, 김해의 청동기문화를 「구간사회(九干社會)」로 불러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초의 김해인」이란 처음으로 김해지역에 생활 흔적을 남긴 사람의 뜻으로 신석기시대와 문화를 뜻한다. 「구간사회」란 김해지역이 아홉 마을로 나뉘어 각 촌장인 구간들에 의해 영도되던 시기로, 때로는 전쟁과 축제를 위해 모였던 부족연합단계의 사회를 가리킨다. 구간(九干)이란 아홉(九)의 큰(干) 사람으로,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수로왕의 등장을 기원했던 가락국 이전의 지도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 가야시대에 대해
가야시대란 김해에 가야의 나라가 있었던 시대이다. 삼국시대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고대한국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야사가 소외되는 시대이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바르고 빠짐없는 한국고대사의 복원을 위해서도 반드시 고쳐져야 할 시대이름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시대가 삼국시대를 대체할 수 있는 시대 구분의 이름은 아니다. 주체적 역사관으로 우리 고장의 역사를 되살리는 이 글에서 가야의 나라가 있었던 시대라는 뜻으로 가야시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시대는 가야의 여러 나라가 경상남도 일원에 기원 전 후부터 532년 김해 대가락(大駕洛)과 562년 고령 대가야(大加耶)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대개 600여 년 간의 역사를 말한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대사회 청동거울.  
 

■ 가락국(駕洛國)건국
김해의 가야에 대한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가야인 자신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백제나 신라인에 의해 기록된 것이 후대의 역사서에 다르게 채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해의 가야인 스스로가 내세웠던 나라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에 채록된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삼국사기』보다 일찍 편찬되어 김해의 가야사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이다. 「가락국기」는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의식에서 편찬되었던 역사서였다. 「가락국기」가 김해의 가야를 가락국으로 칭했던 의미는 단편적 사실 속에서 여러 이름을 전하는 다른 역사서와 큰 차이가 있다. 수로왕(首露王)은 나라를 세우고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다. 대가락은 가라(加羅)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자존의식을 잘 나타내는 뜻으로 김해의 가야인들이 주장하고 사용했던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김해의 가야를 가라(加羅), 가라인(加羅人)으로도 표기하였다. ‘나라의 말씀’이 ‘나랏말씀’이듯이, ‘가라의 나라’는 ‘가락국’이었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증손인 김유신(金庾信)의 비문에도 수로왕 이전의 김해가 가락구촌(駕洛九村)으로 불러지고 있었다. 김해의 가야는 가락국(駕洛國)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금관가야(金官伽耶)는 수로왕도 몰랐던 이름이다. 금관(金官)이란 지명은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하면서 생긴 이름이었다. 금관(金官)은 가락국의 철(金)을 관리(官)하겠다는 정복자 신라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지 금관(金冠)이 아니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이 금관주(金官州)였다. 금관주에 있었던 가야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 지어진 이름이 금관가야이다.

   
 
  김수로왕릉에 모셔져 있는 김수로왕 영정.  
 

 

 

 

 

 

 

 

 

 

 

 

 

 

 

   
 
  김수로왕릉에 모셔져 있는 허왕후의 영정.  
 

 

 

 

 

 

 

 

 

 

 

 

 

 


■ 김수로왕의 탄생
서기 42년, 1세기 중엽. 그 때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부족사회를 거쳐 고대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이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영신군가(迎神君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라고도 한다. 가락국(駕洛國)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강림신화(降臨神話) 가운데 곁들여 전하는 신화 중의 삽입가요(揷入歌謠)인데, 4구체(四句體)의 한역가(漢譯歌) 형태로 전한다(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출전문헌인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에 아직 임금이 없어 9명의 추장(酋長)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42년(후한 건무 18) 3월, 김해(金海) 구지봉(龜旨峰)에서 신(神)의 소리가 들려 추장들은 모든 백성들을 구지봉에 모아 놓고 신의 계시대로 흙을 파헤치며,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머리를 내어라(首其現也)/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구워서 먹으리(燔灼而喫也)’ 라는 노래를 합창시켰다. 이 노래를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불렀다.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창원시 용원 입구에 있는 허왕비 최초 도착지 망산도 전경.  
 

이윽고 하늘에서 보라 빛 밧줄 끝에 매단 빨간 보자기가 무리들 머리 위로 내려왔다. 무리가 이 보자기를 풀자 금제상자가 나타나고 그 뚜껑을 열자 여섯 개의 태양같이 둥근 알이 나왔다. 그 날 9간 가운데 아도간이 이 금상자를 받들고 자기 집에 가서 긴 의자에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열이틀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무리들은 아도간의 금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여섯 개의 알은 여섯 동자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용모가 준수하고 품위가 있어 무리들은 그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공경하였다. 동자들이 금빛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했고 가장 먼저 태어난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불렀다. 9간들은 하늘이 보낸 이 사람들을 그들의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그 달 보름에 김수로를 왕으로 모셨다. 그리고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가락불교 유물로 알려지고 있는 초선대 마애불.  
 

이것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개국설화다.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 의하면, 수로왕이 가락 9촌에서 개국하여 가야라 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가야 가락국 차이 없이 같은 뜻으로 쓰여 지는 국명이다.
금관가야는 기원후 42년, 수로왕의 재위부터 532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모두 10대 490년간 존속하였다. 이 중에서 유독 수로왕만이 42년에서 199년까지 157년간이나 재위에 있었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평균 30-40년가량 재위했던 셈이다.
대가야는 기원후 대략 42년, 이진아시왕의 재위부터 562년, 도설지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모두 16대 52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황후릉 / 김해허씨의 시조인 허황옥(김수로왕의 비)의 능. 사적 제74호. 김수로왕과의 사이에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어머니의 성인 허씨성을 받았다고 전한다. 나머지 8명 중 7명은 스님이 되었는데, 지리산에 있는 칠불암을 7왕자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수로왕비와 수로왕의 결혼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며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이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인도 아요디아라고 알려진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연유는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두마리의 물고기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기 때문이다.

수로왕비와 김수로왕의 결혼과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구지봉에 있는 고인돌의 구지봉석(한석봉 친필로 알려지고 있음).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빠른 배와 말을 주어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게 했다. 그러나 배 안의 왕비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비도 별포(別浦) 나룻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비는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수로왕에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김해 왕릉에 있는 두마리 물고기가 탑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코끼리 두상 단층 조각은 인도
아유타국의 상징이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허 황후는 수로왕과 혼인이듬해 김수로왕과 사이에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장자인 거등(居登)은 왕통을 잇게 하였고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을 따라 불가에 귀의했다. 가야가 몰락하게 되자 허씨의 자손들은 흩어졌는데 김해에 남은 김해 허씨, 하양으로 이주한 하양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등이 있으며 태인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다. 김해시에 허 황후의릉이 있으며 그녀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

이후 수로왕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김수로왕 신도비각 상단에 있는 태양문양 허왕비가 인도에서 올때 가져온 상징물로 전해져 오고 있음.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 가락국의 유적
가락국의 왕도였던 이곳 김해시에는 가락국의 개국으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5백여 년 간에 이루어진 유적, 유물들이 숱하게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손꼽히는 곳은 구지봉이다. 이곳은 수로왕(首露王)의 탄강신화가 서려있는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에는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에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 크게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라고 전해 온다. 또 1908년에 세워진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란 비석이 있다.

이곳 약 4천 평은 지금 구지공원이 조성되었으며 9간이 수로왕을 맞이할 때 구지가를 불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 외에도 수로왕릉, 허왕비릉, 명월사지, 사왕석, 예안리.양동리 대성동 고분군, 수로왕 신도비, 봉황동 궁허지, 연화사 궁허지, 분산성 만장대, 초선대 마애불등 이 있다. (다음호에 게속)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사왕. 아유타국과 가락국 불교 교류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  
 

기사원고자문/ 박정수씨(현 김해시행정동우회 회장. 66년~94년 김해군청 건설과장 도시과장, 94년~ 2003년 김해시건설도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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