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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4>“50만 김해 - 근대50년” 김해군 김해읍, 김해시로 승격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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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4>“50만 김해 - 근대50년” 김해군 김해읍, 김해시로 승격 되다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0.25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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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市 승격 당시 주민의 32%가 상업, 서비스업 등 3차 산업에 종사하고 43개 업체 종사자가 8천 명에 이르고 있었다.

5개의 고등학교와 23개 초중학교, 30개의 의료시설이 있었고, 김해시가 허가한 접객업소는 81년까지 200여 개 였다.

김해시 승격 이후 21만 평의(부원동, 봉황동) 구획정리사업 등에 1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 김해시의 세입은 12억 원인데 반해 세출은 30억 원, 재정자립도는 46%여서 참으로 빈약하고 초라한 김해시가 되었다.

영남 제일의 평야에 위치해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농업학교가 발달했지만 시민들은 상급학교 진학률이 높고 시설이 좋은 부산으로 자녀를 보내기 시작하여 오늘날 김해의 학교들은 발전을 제대로 못 한다는 평이다.

이처럼 문제투성이 김해시가 불안한 첫 걸음을 시작한지 이제 꼭 30년이 되었다.

30년 동안의 김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김해시의 행정동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 1993년도 김해 남산 주변 전경.  
 

 

   
 
  ▲ 2011년 10월 25일 김해 남산 주변 전경.  
 

 

김해시 승격, 유지들의 잔치

기자는 지난1981

 1981년 7월 1일  김해시내 서상동의 중심상가 이웃계의 총무로서  도로 양쪽상가 건물에 만국기를 달고 축하아치를 세워 김해시의 승격을 축하하기도 했다.

  초라하게 승격된 김해시로서 앞날이 캄캄했지만  김해읍이 시로 승격 되면서 김해의 토호세력들만은 기세등등하고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고 김해를 자기들 마음대로 도화지 위에다 땅따먹기식의 구획정리 사업과 공공기관 이전을 그려나갔다.

미나리 논인 물구덩이 부원동, 봉황동 일대 논들을 지역유지들이 합심하여 지주들에게 쥐꼬리만 한 보상을 주고 매입한 후  구획정리사업권을 따내고는 여기를 매립할 흙과 돌이 없자 궁리한 것이 김해시 청사를 남산을 깎아내고 그곳에 신축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관장들을 설득 유착하기 시작했다.

김해가 망하던 말든 후손들의 출새길이 막히든 말든 오직 어수선한 이때 공짜로 줍다 시피한 20여만 평의 개발지역 논구덩이 바로 옆 남산을 절개하여 나오는 흙과 돌로 공짜로 매립하면 떼돈을 벌수 있다는데 혈안이 되어 그 좋은 남산을 지금처럼 망가뜨려놓고 힘없는 시민은 걸어서 올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저 높은 곳에 덩그러니 시 청사를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구획정리가 완공된 부원, 봉황동 지역에 서상동에 있던 김해군청(세무서 자리 일부 엿 못)과 김해시청, 김해경찰서, 김해등기소 들을 줄줄이 이전 하여 땅값을 치솟게 한 후 조성된 택지를 분양하여 그야말로 손 안 되고 코푸는 떼돈을 벌어 들였다.

그리고 그 택지 요지(노란 자위)들은 시장인척과 시청, 군청, 경찰공무원, 기자, 기관원 등 힘께나 쓰는 사람들이 다 차지했었다.

 

 

   
 
  ▲ 20년전 당시 김해 시내 전경.  
 

 김해남산의 분노

당시 김해시민들은 구획정리와 시 청사 공사를 한 모 건설 회사가 당시 시장에게 가마니로 돈을 실어 날랐다는 설이 나돌 정도로 그들은 그렇게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동묘지를 들어내면서 연고자가 없는 유골들을 임호산 뒤쪽 함박산 능선에 큰 구덩이를 파 합장 해 버렸다.

그리고 남산을 밤낮으로 폭약으로 폭파하여 파헤쳐진 김해의 명산 남산은 오늘처럼 비참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그 후 여기에 관련됐던 수많은 지역 유지들이 하나 둘씩 불명예스럽게 사라졌고 그 많은 재산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들이 없다.

그리고 초대시장부터 역대 시장 중 1/2은 불명예스럽게 인사 조치되었고 일부는 단명했다.

최근 시장들은 국회의원 선거에 낙마하고 구속되기도 했고 김종간 시장은 현직 시장이었지만 재선에 실패 했다.

김해시장 출신으로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없고 도지사가 된 사람도 없다.

이학봉, 김영일 국회의원은 구속으로, 김맹곤, 최철국 국회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법원판결에 의한 국회의원직을 상실 했다.

현 김맹곤 김해시장도 회계책임자선거법위반 재판으로 시장 직 유지가 불투명하다.

김해시.군 통합 김해시 의회 초대 박 모 의장이 불명예스럽게 퇴진 했고 배 모의장과 유모 부의장은 구속 되는 등 날아간 청룡의 자리 김해남산 주변 공공청사의 고위간부나 기관장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의문의 불행들은 계속 되고 있다.

김해사람들은 이 같은 불행들을 보면서 “남산의 분노” 라며 입을 모으고 있다.

김해시 승격이 축복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제들을 망가 뜨러 놓았고 오늘날 김해를 늘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김해 남산(좌천룡)과 김해 임호산(우백호)가 서로 마주보고 텃 하니 김해중신부를 감싸 안고 지켜 줄때는 동네 안에 인재도 부자도 지혜로운 사람도 효부.효자도 많았다고 하는데 청룡의 목이 날아간 이후부터 김해가 이상하게 변해 간다는 것이 시민들의 주장이다.

김해시 승격 후 시장들의 면 면목을 보면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서민들을 배려하는 시정을 많이 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2년이 지나면서 이상 하리만큼 시장들이 급변하기 시작하여 도도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고 독선과 독단의 주인공이 되 간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 바침 해주고 있는 것이 최근 10여 년 간 세사람의 김해시장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남산의 분노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1982년 시승격1주년기념으로열린 가락문화제  
 

지역 행사

 가야문화 유산을 발굴 보존 재현 함으로써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1962년 제1회 가야문화제를 개최한 이후 5회까지 매년 열리다가 여러 가지 여건 미비로 중단되었던 가락문화제(현 가야문화축제)가 김해시 승격 1주년을 기념해서 1982년 7월 1일  부활하여 개최되기도 했다.(당시 행사사진)

1982년 음력 3월 15일을 김해수로왕릉에서 개최된 김수로왕 춘향대제 모습 (사진 있음)

김해읍 유물·유적

 불교문화재로는 삼방동의 김해 은하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구산동마애불(龜山洞磨崖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구산동요지에서는 4기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으로는 자연암벽에 폭 3cm 정도의 굵은 선으로 음각된 초선대 마애석불이 있으며, 유교문화재로는 동상동에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이 있고, 대성동에는 김해향교(金海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가 있는데 1408년(태종 8)에 창건해 1770년 현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대성전·동무·서무·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풍화루 등이 있으며, 칠산서부동(흥동)에는 선조국문교서(宣祖國文敎書, 보물 제951호)가 있다.

   
 
  ▲ 1982년 김수로왕릉에서 개최된 춘향대제.  
 

일반 유적지로는 봉황동의 김해회현리패총(金海會賢里貝塚, 사적 제2호), 부원동패총, 봉황동의 봉황대(鳳凰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는 가락국의 궁지였다고 전해 온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宋公殉節巖(송공순절암)’이라고 새겨진 서상동지석묘(西上洞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4호), 기원전 4∼3세기에 축조된 내동지석묘(內洞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97호), 명법동지석묘군, 광석지석묘, 용성지석묘 등이 있다.

서상동의 수로왕릉(首露王陵, 사적 제73호)과 구산동의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사적 제74호)은 각각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의 능이 있다.

한편, 김해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에서는 토기류와 공구·무기·마구 등의 철기류, 벽옥제옥장 등의 옥류가 출토되었고, 4∼6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김해칠산동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98호)에서는 토광묘·목관묘·횡구식석실분·옹관묘 등의 다양한 묘제가 조사되었으며,가락국 왕릉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능동마을의 뒷산에 있는 고분 앞에 있는 문인석상과 상석으로, 능묘를 옹위하는 당시의 조각양식과 능묘제도의 변천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문헌으로 홍동의 선조어서각(宣祖御書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백성들에게 한글로 내린 교서가 보관되어 있다.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화를 받드는 전각으로 1878년(고종 15)에 건립된 숭선전에서 이루어지는 숭선전 제례는 춘추향 2회로 춘향은 음력 3월 15일, 추향은 음력 9월 15일이며 시간은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동안 거행된다.

산성으로 어방동의 분산성(盆山城, 사적 제66호)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고려시대에 수축하고 임진왜란 때 개축했으며, 산성의 둘레 약 900m, 면적은 5만 721㎡이다. 천곡성도 가락국시대에 축조한 성으로 전한다. 김해부사 박위가 수축한 김해읍성은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또한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산동의 구지봉(龜旨峰, 경상남도 기념물 제58호)도 이 고장의 주요 유적이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보통학교령에 의해 1908년에 지금의 동광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점차 각 면으로 파급되었고, 1909년에는 김해농업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가 설립되었다. 1982년부터 어방동에 인제대학교 김해캠퍼스가 있어 1989년 종합대학교로 개편하였고 현재 가야대학교 김해캠퍼스와 함께 이 지역 고등교육의 산길로 자리 잡고 있다. 2개 종합대학교(인제대학교·가야대학교)와 2개의 전문대학(부산장신대학교·김해대학)이 있다.

문화시설로 시립 김해도서관, 장유도서관, 그리고 칠암도서관이 있다. 1964년에 개원한 김해문화원은 가락문화제 등의 향토행사를 주관하며 향토문화의 계승·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외동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행사로는 가락문화제와 10월경에 진영읍에서 진영단감제가 열린다.

이 지역에 살아온 조상들에 의해 형성된 생활신앙으로서 마을제의인 동제(洞祭)와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신제(家神祭)가 있다. 가신제에는 안택·고사(安宅·告祀), 그리고 성조(成造)·터줏대감(土主)·제석(帝釋)·조왕(조왕)·산신(産神)과 같은 다양한 가신(家神)을 모시는 의식과 칠성제(七星祭)가 포함된다. 마을공동제의로서는 성황제·산신제·용왕제·풍어제·수신제·기우제, 당산제 등이 있으며 기존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당산제는 행해진다.

흥동에서는 마을 뒤편 임호산 중턱의 산신당과 마을 중간에 있는 당산에서 연 1회 정월 14일 자정을 전후해서 동제를 지낸다. 동리에서 가장 연로한 사람을 제주로 삼고 도수 1명, 제관 2명을 선정해 제당(祭堂)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 다음, 거리잡신을 위해 마을 동·남·서 세거리 입구에 제물을 진설해 제를 마친다. 다른 마을에서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동제를 지낸다.

김해지방의 유명한 놀이로는 가락오광대와 소싸움 외에 널뛰기·윷놀이·연날리기·지신밟기·씨름 등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민속놀이가 있다.

가락오광대는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된 탈놀음으로 상원날 밤에 연희되었다. 내용은 6과장으로 오방신장무과장, 상좌·노장중과장, 양반과장, 문둥이과장, 할미·영감과장, 사자무과장으로 되어 있는데, 영노과장이 따로 없고 할미과장에 나와서 영감(양반)을 욕하고 조롱하는 것은 가락오광대만의 특성이다.

소싸움놀이는 소를 먹이는 아이들이 즐겨 해 추석 무렵 본격적으로 쇠전(소시장) 근처에서 열린다. 상머슴이 고삐를 잡고 소싸움터로 끌고 가서 굴레를 벗기고 코뚜레도 빼 버리고 나오면 소끼리 뿔을 마주치고 싸움을 한다. 소가 밀리거나 달아나면 지게 되는데, 이긴 소에게는 목과 뿔에 비단과 종이꽃으로 장식을 하고 머슴이 타고 풍물을 울리며 돌아오면 주인집에서 술을 한턱 낸다. 원래 소싸움은 여름 동안 어느 집 머슴이 소를 잘 먹여 소가 힘이 세어졌는지 치하하려고 했던 것인데, 부농들의 세도자랑으로 번지고 근래에는 돈내기 등의 도박성향도 보이고 있다.

마을의 태평과 풍년을 비는 줄다리기는 상원경에 하는데, 마을사람들이 짚·돈·음식 등을 염출해 서부(수줄)와 동부(암줄)로 나누어 암줄의 고를 수줄의 고에 넣고 비녀목에 걸어 대개 3일쯤 당겨 승부를 겨룬다. ‘메구’라고 하는 농악놀이는 상원경에 즐기는데, 집안에서 치는 것을 ‘집돌금’, 샘에서 치는 것을 ‘샘굿’이라 해 정월 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가내 태평을 빌어 준다. 이 밖에도 아이들의 놀이인 풀쌈과 삘기 따먹기 등이 있다.

산업·교통

지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6,000여 개의 중소기업체가 이 지역경제발전의 주축이며 저렴한 물류비 등 우수한 입지 여건으로 매년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 동남권의 기계 테크노벨트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21C 다품종 생산 시대에 유리한 입지조건으로 인하여 선진농업지역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편, 1995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범위한 배후지 촌락지역의 편입으로 넓은 농경지면적이 시역에 포함되었다. 총경지면적은 110.2㎢이며 이 중 논이 86.2㎢, 밭이 24㎢로 각각의 점유비는 논이 78.2%, 밭이 21.8%이다. 즉, 논이 밭에 비해 약 4.5배 이상으로 낙동강 삼각주 평야지대의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관내의 논농사는 주로 대동면·장유면·주촌면·생림면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난대성 기후의 특성상 벼농사 외에도 채소 등을 재배하는 계절별 이모작 영농이 이루어진다.

김해국제공항, 부산항 등 국제적인 교통망과 남해고속도로, 김해·양산간 고속도로, 부마고속도로, 김해대구 간 등 4개의 고속도로를 갖추고 전국을 연결하는 최고의 교통요건을 갖추고 있다.

 

 

   
 
  ▲ 복원된 분산성 전경 (만장대).  
 

관광

시의 중앙에 솟은 기암괴석의 신어산은 소금강으로 불릴 정도로 절경이며, 이 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변과 삼각주평야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서낙동강 일대는 전형적인 수향으로, 도요새·백조·청둥오리·가마우지 등 100여 종의 철새들이 찾아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매년 개최되는 가야문화축제는 김해시 가야유적지 일원에서 이루어지는 가야문화를 계승하고 이 고장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려는 수준 높은 예술축제이다. 가야문화제는 김수로왕의 창국정신을 기리고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의 얼을 되새기며 지역민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행사로서 민속행사, 축제행사, 부대행사로 이루어진다.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김해분청도자기축제 등이 있다.

1998년에 개관한 국립김해박물관은 구지봉(龜旨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야(加耶)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개관되었으며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의 문화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2006년 개관한 봉항동유적패총전시관은 회현리패총으로 유명한 봉황동유적의 패총 발굴면을 실물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2005년 개관한 김해문화의 전당은 내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첨단 무대시설의 대·소공연장과 전시관, 영상미디어센터, 빙상장을 갖춘 스포츠센터 등 다양한 문화·레저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예술공간이다.

내동에 위치한 김해시민스포츠센터는 약 만평에 이르는 종합스포츠시설로서 수영과 빙상을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를 관람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봉황동에는 김해공설운동장이 위치하고 있다.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 될 당시의 김해시 관할 행정 동의 연혁과 변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동상동연혁

 본래 김해군 좌부면 동쪽의 위에 있던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성리와 부원동의 각 1부를 병합하여 동상리가 되었으며, 1941년 11월 1일 동명을 조일정으로 바꾸었다가 1947년 6월 다시 동상동을 동명이 복구되면서 2개구로 나누었으며, 1976년 4월 20일 김해군조례 제340호에 의하여 중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에 의거 시 승격과 함께 법정도 관할구역이 현재의 행정동인 동상동으로 되었다.

위치

 동상동은 김해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분성산을 경계로 활천동과 서쪽으로는 종로를 경계로 회현동과 남쪽으로는 김해중학교 후문 이면도로를 경계로 부원동과 북쪽으로 금강천을 경계로 북부동과 접하고 있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김해시 동상동 856번지 1.88 ㎢ 21개통 102개반

 

2-회현동연혁

 본래 김해군 우부면 회현리(현 봉황동)와 좌부면 북내동(현 서상동)의 중심지역인데, 회현리는 1914년 고서리와 강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1941년 11월 1일 일제시 봉황정으로 고쳤으나 1947년 6월 25일 다시 봉황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북내동은 김해부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군청, 등기소, 금융조합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서상동은 1914년 좌부면 고서리와 능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북내동이 되었다. 1941년 11월 1일 일제시 대화정으로 부르다가 1947년 6월 서상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1981년 7월 1일 김해시 승격과 함께 김해시조례 제98호에 의거 서상동, 봉황동을 법정동으로하여 회현동이 되었다.

위치

 회현동은 김해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적 73호 수로왕릉 담벽을 경계로 북부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 부분에서 칠산서부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해반천을 경계로 내외동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왕릉지구대를 지나는 시내 상가지역 가로인 종로를 경계로 동상동과 부원동을 접하고 있다.

동사무소의 소재지와 동의 면적은 다음과 같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봉황동 301-3 1.12㎢ 26개통 146개반

 

 

3-부원동연혁

 고려 때 김해부의 원우가 있었던 곳으로 1914년 다전리, 강창리, 고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부원리가 되었다.

1941년 11월 1일 영정으로 고친 것을 1947년 6월 부원동으로 개칭하고 3구를 두었으며, 1981년 7월 1일 법률 제 3425호에 의거 시 승격과 더불어 김해읍 부원동이 김해시 부원동으로 행정구역 변경 부원동 819-2번지 청사를 개설 관할구역 3개구에서 11개 통으로 나누어졌으며, 1986년 11월 8일 619-3번지 현재의 위치로 동사무소 신축 이전하게 되었다.

위치

 부원동은 김해시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옛날에는 남산리, 남문밖으로도 부르게 되었으며 동으로는 분산줄기의 끝인 고조산(일명 남산)을 경계로 삼정동과 접하여 서쪽으로는 국도 14호선 봉황동과 북쪽으로는 김해중학교 후문 진입로 동상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호계천 하류 금천(쇠네)이 부산시 강서구 가락동과 경계를 이뤄 4개 동으로 둘러 쌓였다.

동사무소의 소재지와 동의 면적은 다음과 같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김해시 부원동 619-3번지 2.06 ㎢ 15개통 81개 반

 

4-내외동연혁

 내외동은 김해시 주촌면과 경계한 지역으로서 경운산 기슭을 중심으로 북쪽 마을을 내리, 바깥쪽 마을을 외리로 불러오다가 1914년 내리를 내동리, 외리를 봉곡리와 병합하여 외동리로 불러왔으며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면서부터 법정동으로 관리되어 1947년 미군정하의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내동과 외동으로 개칭하여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면서 김해시 조례 제98조에 의거 내동과 외동을 법정동으로 하여 내외동이 되었다.

 

위치

 내외동은 김해시 서쪽에 위치하면서 동쪽으로는 해반천을 경계로 북부동과 서쪽으로는 경운산을 경계로 주촌면, 임호산을 기준으로 칠산서부동과 경계를 하고 있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김해시 내동 1116-4번지 5.34 ㎢ 91개통 954개반

 

5-북부동연혁

 고대 가락국의 고도로서 가야문화의 중심지인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탄생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구지봉을 중심으로 김해시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9년 5월 1일 김해군 조례 제495호에 의하여 북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에 의거시 승격과 함께 대성동, 구산동, 삼계동 3개의 법정동을 합하여 북부동이라는 행정동을 만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동

1770년(영조 45년) 향교가 옮겨온 뒤로 교동으로 불려짐

1914년 우부면의 북외리와 삼산리 1부를 합하여 답곡리로 변경

1941년 11월 1일 대성정으로 명칭 변경

1947년 6월 대성동으로 명칭 변경

1981년 7월 1일 김해시 북부동

구산동

순종때 지리지에 삼산리로 나옴

1941년 11월 1일 구산정으로 명칭 변경

1947년 6월 구산동으로 명칭 변경

1981년 김해시 북부동

삼계동

옛날부터 북곡리로 불리워 짐

1941년 두곡리를 병합

1947년 6월 삼계동으로 명칭 변경

1950년 12월 육군 공병학교 이전 설치

1981년 시 승격과 함께 김해시 북부동

위치

 북부동은 김해시 북쪽에 위치하면서 동쪽으로는 금강천을 경계로 동상동과 서쪽으로는 해반천을 경계로 내외동과 남쪽으로는 금강천을 경계로 회현동과 북쪽으로는 한림면과 생림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김해시 삼계동 1469-7 13.93 ㎢ 75개통 571개반으로 이루어 져 있다.

 

6-칠산서부동연혁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어 6가야의 연맹체가 성립되었고, 이 시대에 칠산의 풍유동에 무기제조창을 세운 흔적이 있음으로 보아 이때부터 집단거주가 시작됐던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가락국 10대 구형왕 12년(서기 532)에 신라에 합병 금관군으로 호칭되었으며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서기 757)에는 김해소경으로 개칭하니, 김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생겨져 칠산서부동이 이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읍, 면제 시행에 따라 1931. 11. 1 부터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2개 법정동과 52개 행정동을 설치 운영하여 오다가 김해군 조례 제340호(76. 4. 16 공포)에 의거 1976. 4. 20 부터 동, 서, 중부에 각각 출장소를 두었으며, 칠산서부동은 서부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1979. 5. 1일에는 북부출장소도 설치되어 4개의 출장소를 운영하여 오던 중 1981. 7. 1 시로 승격되었다.

시 승격시에는 1실 9과 10개동 중 칠산동과 서부동으로 명명되었고, 풍유동, 명법동, 이동, 화목동의 4개의 법정동으로 칠산동이 만들어졌으며, 흥동, 전하동, 강동의 3개 법정동으로 서부동이 만들어졌으며 1989. 9. 12 김해시조례 제238호에 의거 행정동이 통합되어 칠산서부동이라는 행정동을 만들었다.

위치

 북부동은 김해시 북쪽에 위치하면서 동쪽으로는 금강천을 경계로 동상동과 서쪽으로는 해반천을 경계로 내외동과 남쪽으로는 금강천을 경계로 회현동과 북쪽으로는 한림면과 생림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소재지 면 적  통반

김해시 칠산서부동 20.02 ㎢ 21개통 77 개반

 

7-활천동동 연혁

 김해부 활천동이었다가 1914년 좌부면에 병합되었다. 1918년 김해면으로 병합되고, 1947년 현재의 법정동인 삼정동과 어방동으로 개칭되었고, 1976년 4월 20일 김해군 조례 제340호에 의거 동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에 의거 시 승격과 함께 삼정동, 어방동을 합하여 활천동으로 되었다.

위치

 김해시청에서 약 1km 동쪽으로 위치하면서 북쪽으로는 분성산을 중심으로 동상동과 삼방동이 접하며, 부원동과 동쪽으로 신어천을 경계로 삼안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부산시 가락동과 마주하여 5개 동으로 둘러 쌓여 있다.

소재지 면 적  통 반

김해시 삼정동 660-6번지 5.49 ㎢ 53개통 296개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8-삼안동 연혁

 삼안동은 안동공단과 대학가, 신어산, 은하사, 가야골프장, 가야랜드, 김해하키경기장 등 특성이 다양한 시설이 산재해 있으며 삼안 및 신어지구 택지조성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신개발지역으로 대형아파트와 주택이 밀집한 비대동으로 성장하였다.

위치

 삼안동의 위치는 활천동의 북동쪽에 있으며, 가야골프장과 신어산을 경계로 김해시 상동면과 접 하고, 남쪽으로는 김해평야와 마주보며, 동쪽에는 불암동이 위치해 2개의 동과 2개의 면이 접하 고 있다.

소재지 법정동 면적 통 반

김해시 삼방동 178-2번지 삼방동, 안동 11.3㎢ 50개통 474개반

 

9-불암동 연혁

 활천면 불암리인데, 선암(선바위)이라고도 했다. 영조 때 부사 김영수의 필적을 새긴 선유대(仙遊臺)가 있었고 유계(儒契)에서 세운 선유정(仙遊停)도 있었다.

 

1914년 가락면 식만리와 하동면 수안리 각 1부를 병합(倂合)하고 좌부면 불암리가 되었다. 1981년 7월 1일 김해시 승격과 함께 지내동을 합하여 불암동이 되었다.

 

위치

 불암동은 동쪽으로는 신어산 농선을 경계로 하여 김해군 대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신어천을 경계로 활천동과 남쪽으로는 서낙동강을 경계로 부산시 강서구와 북쪽으로는 활천초등학교 진입도를 경계로 삼안동과 연접하고 있으며 김해시청과는 4.5km 떨어져있고, 국도 14호선(1.4km)과 남해고속도로(1.1km)가 동중심부를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소재지 법정동 면적 통 반

김해시 불암동 220-17번지 지내동, 불암동 2.59㎢ 17개통 109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대 김해시장 중 임명직 시장 및 시장 권한대행

초대   문 백 시장(재임기간 1981.07.01~1983.12.26)

2대   유병탁 시장(1983.12.27~1986.03.07)

3대   최재현 시장(1986.03.08~1987.09.02)

4대   여주환 시장(1987.09.03~1988.02.04)

5대   이원민 시장(1988.02.05~1988.06.10)

6대   안강식 시장(1988.06.11~1989.09.26)

7대   송은복 시장(1989.09.27~1992.05.19)

8대   백승두 시장(1992.05.20~1994.04.25)

9대   안두환 시장(1994.04.26~1995.03.31)

10대  박양기시장권한대행(1995.04.01~1995.05.09)

11대  김태웅 시장(1995.05.10~1995.06.30)

12대 송은복 시장(지방선거 기초단체장 선출직, 1995.07.01~1998.06.30)

13대 송은복 시장 재선(1998.07.01~2002.06.30)

14대 송은복 시장 삼선(2002.07.01~2006.02.26 사퇴)

15대 현길원 시장권한 대행(2006.02.27~2006.06.30)

16대 김종간 시장(2006.7.1~2010.06.30)

17대 김맹곤 시장(2010.7.1~2014.06.3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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