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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6>“50만 김해 - 근대50년” 김해시.군 통합 상처뿐인 김해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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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6>“50만 김해 - 근대50년” 김해시.군 통합 상처뿐인 김해시 탄생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1.05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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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김해시. 군 통합 상처뿐인 김해시 탄생 (50년간 김해와 함께한 정치인 현황)
김해읍 김해시 승격이 남긴 것들.

1981년 7월 1일 김해군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었고 그 후 14년이 지난 1995년 5월 10일 김해시와 김해군이 도농복합형태의 김해시로 통합했다.
김해군으로 부터 독립하여 형님보다 더 큰 도시로 변모하던 김해시가 고향인 김해군과 한 식구가 되므로 해서 비로소 김해는 제대로 된 도농복합도시가 된 것이다.
하지만 17년 동안 당시 김해읍민과 군민 사이엔 김해시 승격문제로 이견을 보이면서 불편한 한 지붕 두 가족이었던 관계로 김해의 단합된 목소리와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 활천고갯길에서 동상동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직진 길이 막혀 있다.  
 

김해군과 김해읍이 시 승격문제로 다투다가 나중에 시로 승격된 김해시와 김해군이 사사건건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김해 군청이 서상동 김해읍에 있다가 보니 시로 승격된 김해시 안에 자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김해 군민들과 유지들이 자연스럽게 김해 군청을 오가며 시로 승격된 구 김해 읍민들과도 교류를 했지만 서로 경계하는 정도였지 상호 협력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불편하고 섭섭한 관계가 17년 동안 지속되는 동안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 가락면, 녹산면 등 알짜배기 김해 땅 김해평야를 몽땅 부산시에 빼앗겨 버렸다.
여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군민으로 재미있고 대접받는 자리를 누려온 지역인사들이 사회단체장 선임과 정치적인 문제로 상호 비방과 결투 직전까지 가는 사태들도 더러 있었다.
5월 청소년 위안 행사 한 가지만 보더라도 김해교육청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행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 김해경찰서, 세 번째 김해군청, 네 번째 김해시청에서 각각 개최하므로 해서 청소년의 달 위안 행사라기보다 청소년 골병의 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다 위에서 언급한 각종 행사시마다 인사와 축사 자리싸움도 꼴불견 그 자체였다.
시청 담당자는 시장이, 군청 담당자는 군수가, 교육청 관계자는 청소년이 모두 학생이기 때문에 교육장이 먼저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경찰서장은 청소년 탈선과 비행 예방차원에서 청소년 위안 행사를 하는 것인 만큼 서장이 먼저 인사말을 해야 한다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대로 이곳저곳으로 불려다니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고 인솔 교사들은 교사대로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당시 김해경찰서청소년선도위원회(위원장 조유식)가 조정안을 내어 합의안을 도출하기도 했다.
그 합의안이란 첫째 청소년 행사는 한 번만 한다. 둘째 청소년의 달 행사주최는 4개 기관(김해시 ,김해군, 김해교육청, 김해경찰서)에서 공동으로 하고 주관은 선도위원회에서 한다.
셋째 대회사(인사)는 기관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다섯째 행사장의 귀빈용 단상 의자를 배치하지 않고 청소년들과 함께 먼저 오는 순서대로
앞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장학금, 표창, 기념품 등에 구체적인 행사 준비와 협의는 4곳 기관 담당자와 청소년 선도위원회 관계자 등 5명의 협의체에서 한다. 등이었다.
당시 이 시스템 도입으로 적어도 김해군, 김해시 거주 청소년들에게는 갈라진 어른들과는 달리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들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고 4곳 기관장들과 사회단체로부터 좋은 호평을 받기도 했다

   
 
  ▲ 김해시로 승격된 후 만들어진 동ㆍ서도로 확장공사였는데 완전 갈지자로 엉망진창 도로가 되었다.  
 

남해고속도로 개통 그 이후 30년
김해의 토종 부자들은 사라졌고 신도시 개발 등으로 인해 보상비 등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도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김해의 대표기업 한일합섬의 침몰과 함께 한국정치계의 거목으로 불리던 김해지역구 김택수 의원이 정치계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이후 김해시장, 군수들의 중도 하차와 사망, 시ㆍ군 의원과 의장 출신들의 비리와 큰 정치 진입 실패, 김해의 대표기업인과 전 현직 시장, 국회의원들이 연달아 사회 지탄의 대상이 되어 연일 언론을 장식하기도 했다.
1981년 남해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김해의 앞들을 가로막았고 그 이후부터 김해가 시끄럽고 김해출신 정치인들이 줄줄이 중도 하차했다. 천운(天氣, 넓고 넓은 우주공간을 바탕으로 그 안에 있는 별과 달, 구름, 바람의 움직임을 말함)과 지운(地氣,땅의 움푹 패인 곳, 평평한 곳, 바람이 몰아치는 곳, 물이 많이 흐르는 곳, 높은 산을 이루는 곳 등을 말함)이 오늘의 김해와 분명히 관련이 있다고 본다.
남해고속도로 공사 후 30년 동안 김해시의원을 했거나 도의원을 했던 사람 중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분들의 삶이 초라하기 그지없고 어떤 분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우리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대단하고 훌륭했던 분들로 김해가 낳은 인물들이었지만 그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원인이 개인들에게 있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氣`의 흐름이 저들의 비상을 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44년전인 1967년 서상동 김해극장 앞. 많은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이다.  
 
   
 
  ▲ 44년후 그때 그 자리 김해극장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2011년 11월 7일 촬영)  
 

동.서간 도로가 기형이 된 사연 1990년 초 김해시는 김해 안동에서 주촌 고개까지 동.서간 동맥을 연결하는 김해 동․서도로 직선 확장 공사계획을 발표하고 설계와 보상에 들어갔다.
이 공사는 김해 안동공단 사거리(공단파출소 앞)에서 활천고개 까지 1차 왕복 6차로 공사를 하고 2차 활천 고개에서 지금의 김해 도서관 앞 까지 3차 도서관에서 내동고개(주촌 넘어가는 고개)까지 직선으로 도로를 개통하여 교통체증과 시민불편사항해소는 물론 효과적인 물동량 수송에 기여 한다는 계획으로 야심차게 착공되었다.
이 공사는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시행하는 김해 내외 신도시개발(58만 평)에 맞추어 계획된 사업으로 활천사거리(삼성초등학교 뒤편)에서 동상동 경계지점까지 즉 활천고개까지의 공사는 김해 토종기업 D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보상이 끝나고 좌우 인도와 배수관 공사가 상당히 진전된 어느 날, 갑자기 인도와 배수관 공사가 중지되고 이미 해놓는 시설도 무시하고 설계가 변경되었다.
변경된 설계는 당초 계획보다 북쪽으로(만장대 쪽 지금의 도로) 약 40미터 이동하여 도로를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 구간 도로공사가 완공된 모습을 본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욕질이다. 이유인즉 활천동 쪽에서 속도를 내어 오르막길을 열심히 달려와 고개를 넘으며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도로 확장공사 시 처음 계획대로 남쪽(김해시청방향)으로 40미터 정도 이전된 설계대로 공사를 했더라면 활천고개 아래 동상동 접목도로와 직선으로 연결되어 이런 마(魔)의 도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당초 목적과는 달리 기형 도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완공된 김해 동서도로 활천고개 구간은 실패한 도로였고 이 때문에 애꿎은 시민 1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차량이 추락 또는 충돌로 파손되는 사고다발지역이 되자 김해시가 실태 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 새로운 방안을 내놓았다.
그 방안이란 활천고개에서 연결되는 도로에 맞추어 제일교회 앞까지 북쪽으로 약 20미터의 건물과 토지를 수용하여 보상하고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초 계획에는 다소 못 미치지만 동․서도로의 기능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김해시는 이 도로확장 계획에 편입되는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보상협의를 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건물주와 토지 소유주들은 공익적인 목적이고 시민을 위한다는 설득에 동의를 해주었다.
문제는 이 편입지에 사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와 사람들(전 국회의원. 시의원. 자생단체회장. 제일교회 등등)의 동의를 받아 내는 일이었다.
당시 김해시 관계자는 이들을 설득하느라 노력한 시간이 이 계획에 동의한 일반 시민들보다 수십 배 그 이상이었다고 했다.
일반 시민들 보다는 돈 많고 권력 있으며 지역 유지로서 존경받는 사람들과 지역사회 발전에 앞장서야 할 종교단체가 더 반대하고 과다한 보상금을 요구하며 시장에게 압력행사를 하는데 담당자로서 그 고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는 것이 후일담이다.
결국, 이 계획도 앞에서 언급한 위대한 실력자들로 인해 포기됐고 하는 수 없이 저들의 건물은 편입하지 않고 꿩 대신 닭이라고 다시 남쪽(시청 쪽)주변을 편입하여 도로확장공사를 했다.
북쪽 도로를 넓혀 사고를 막겠다고 계획된 도로가 오히려 북쪽이 아니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힘 있는 집을 피해 가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활천고개에서 동상동 제일교회 앞 까지 내리막 도로는 지그재그로 된 확실한 기형 도로가 된 것이다.
김해 동․서간도로가 이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길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되자 그다음 공사 진행도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동상동 제일교회 앞에서 봉황동 봉황교(김해도서관 앞)까지인 이 도로를 최소한 왕복 6차선으로 확장한다는 당초 계획에 따라 기존도로 양쪽주택소유주를 대상으로 수용과 보상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구간이 확장되어야 김해의 중심상권이 살고 협소한 중앙로와 가락로의 교통체증도 상당히 해소될 수 있었다. 때문에 동․서도로 중 가장 중요한 구간인 이 지역 보상협상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도로 양쪽 수용예상(동상동,서상동,봉황동)지역의 양쪽 상가건물과 주택 상당수가 지역유지들의 소유였기에 확장공사에 따른 보상은 수월하게 이루어 질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계산착오였다.
오히려 이들 힘깨나 쓰는 양반들이 더 반대했다.
전․현직 고위 공무원, 행정동우회 회장, 예식장 대표, 주물공장 대표, 경찰서장 관사, 목욕탕대표, 경찰 간부, 김해도시개발 위원, 통일주체 대의원, 체육회 간부 그 외 자칭 지역유지그룹에 속한다고 어깨에 힘주던 졸부들이 너무나 많아 다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유달리 이 구간에만 이들이 집중적으로 터전을 잡고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곳이 소위 김해의 종로 1번지(김해읍 중심지)로 번화가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구간의 도로확장을 위한 편입보상협상은 40여 차례의 개별협상에도 불구하고 유지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제일교회 앞에서 서상동 경계지점(백모양복점 앞)까지는 손도 대보지 못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대로이다.
이 지역의 비협조로 서상동에서 봉황교까지의 도로확장마저 이런저런 반대에 부딪혀 축소되어 오늘처럼 되었다.
즉 활천고개는 왕복 6차선 제일교회까지는 왕복 4차선, 서상동 경계까지는 왕복 2차선, 그 다음은 왕복 2차선도 4차선도 아닌 어중간한 도로 그리고 왕릉 앞에서 봉황교까지는 다시 왕복 2차선이 되었고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의 김해시 서상동, 동상동, 봉황동은 김해에서 유일하게 불균형적이고 낙후된 도로를 가진 우스운 꼴의 중심지가 되었다.
만약 그때 김해시의 계획대로 동․서도로가 왕복 6차선으로 시원하게 확 트였더라면 지금의 김해 발전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동김해와 서김해간(삼안동→삼정동→동상동→서상동→봉황동→내외동→주촌면→장유면)김해 중앙 중심도로를 기점으로 좌우로 도시개발과 상권형성이 활성화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균형 잡힌 김해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김해 읍내 중심지(동상․부원․서상․봉황)를 낙후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던 김해 토호집단세력들의 아집과 고집, 이기주의적 욕심들이 오늘처럼 도시가 망가지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서상동ㆍ동상동 종로상가거리.  
 

김해를 기형으로 만든 사람들
김해 동․서간도로 마지막 구간인 봉황교(도서관앞)에서 주촌 고개까지의 도로는 순조롭게 설계되었다.
이 구간은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시행하는 김해 내외지구 신도시 조성(58만 평)공사 지역을 관통하게 되어 있고 수용지역이 대부분 농지여서 걸림돌이 될 만한 장애가 없었다.
그리고 토지공사에서 설계와 시공까지 다해주니까 김해시의 재정적 부담도 없는 공사 구간 이었다.
그동안 동서도로를 계획하여 시공해 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설계변경 등 억지공사로 기형 도로를 만들어 원성을 들어온 김해시도 이곳만큼은 당초 계획대로 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토지공사와 협의를 거쳐 도서관 앞에서 주촌 고개까지 왕복 3차선 직선도로를 만들기로 했다.

   
 
  ▲ 벼수매하고 소 팔면 한 번씩 찾아 회포를 풀던 방석집 골목(부원동).  
 

신도시계획 설계와 도로개설 설계가 완성되고 계획승인이 나자 토지공사는 이곳 농지와 지장물 보상을 하면서 매립(복토)도 병행했다.
토지공사의 설계대로라면 도서관 앞 봉황교에서 주촌 고개까지 직선화 구간에 포함되어 있는 수용건물은 김해문화원 외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신도시가 개발되면 이 사업지구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지상물은 자동 수용되어 보상하고 철거하게 되어 있어 김해시와 토지공사도 이 부분에서는 마음을 놓고 안심하고 설계대로 추진했다.
이 구간만이라도 시원하게 그것도 공짜로(토지공사예산으로 시공) 도로가 만들어지면 이 중앙도로를 중심으로 남․북 간의 접목도로들이 연결되어 사통팔달의 내․외동 상징 도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 도로 구간에 포함된 단 하나뿐인 문화원(원장 류모 씨 작고)건물이 수용을 거부하고 나섰다.
거부 이유는 3억여 원을 들어 건축한 지 3~4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도시 개발 사업지구 수용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 한때 김해의 명동 사거리로 불렸던 장유 카도 추억의 상가건물들이 아직도 몇채 보인다.  
 

토지개발공사와 김해시 관계자는 충분한 보상과 신축건축에 필요한 예산이 확보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대체부지도 지금보다 넓은 면적을 제공해 주겠다. 그러니 공사에 협조해달라며 약 2년 가까이 사정도 해보고 설득도 해 보았지만 류 원장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강한 힘을 가진 이 양반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 공사 진행이 지연되기까지 했다.
평지를 이루고 있는 허허벌판 58만 평 신도시 조성지구에 문화원 건물 한 채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어 흉물스럽기까지 했으나 끝까지 수용을 거부했다.
설득을 포기한 토지공사가 문화원 강제수용절차를 밟기로 하고 수억 원을 들여 설계 변경을 하기 시작했고 내․외동 신도시 개발 사업도 당초 계획에서 후퇴하여 변경되었다.
이 계획에 맞추어 새로 시공되던 봉황교도 14번 국도(봉황동 유적거리 대성동 고분거리가 당초 14번 국도였음) 내․외동 쪽으로 형태로 놓여지게 되었으나 신도시 설계변경으로 봉황교가 삐닥하게 시공되어 우스운 꼴이 되었다.
한국토지공사는 결국 문화원 수용을 뒤로 미루고 동서도로를 기존의 지방도를 확장하는 쪽으로 설계를 변경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신도시를 개발할 때 모든 도로는 바둑판처럼 직선이거나 약간의 곡선으로 설계하여 시공한다.
그래야 도시가 반듯해진다. 김해시 내․외동 신도시를 끼고 형성된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의 도로는 모두가 시원한 직선화 도로이다.
그러나 남쪽의 도로는 꾸불꾸불한 한마디로 엉망진창 도로가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신도시와 연결되는 도로들이 막혀 주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로만 꾸불꾸불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신호등도 많아 운전자들이 겪는 불편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그나마 한신아파트 앞 빌라 주택단지는 2~3년 전에 접속도로를 만들어 주어 불편은 다소 해소되었으나 김해보건소 뒤편 동일아파트와 덕산 아파트를 가려고 하면 길이 없다.
당초 계획대로 도로를 개설했더라면 이 두 아파트가 교통사정이 가장 좋았을 것인데 지금은 그 반대이다.
김해터미널 앞에서 위의 두 아파트를 찾아갈라치면 한국 1차아파트를 끼고 한참을 돌고 돌아야 갈 수 있다. 바로 눈앞에 아파트를 두고 약 1킬로미터를 우회로 우회로 돌아가야 하니 이 얼마나 기가 찬 노릇인가. 신도시 개발지역 도시로써 이 같은 기형 도로는 아마 전국에서 처음일 것이다.
김해시는 지금이라도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하고 방문하는 외지인들을 위해 내․외동 파출소 옆 공원 사이에 접목 도로를 개통시켜 차량 통행을 원활히 하여 주민 불편 사항을 해소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구간의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고집불통 유지 한 사람 때문에 도시 전체가 엉망이 된 것은 그만큼 저들의 권력이 막강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잘못된 권력과 아집으로 김해를 기형으로 만든 이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엄청난 불편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균형을 잃고 기형화되어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한국토지공사가 기존도로확장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이 문화원은 감사원의 지적 등을 받으면서 결국 헐리고 말았다.
토지개발공사도 애당초에 제시했던 토지보다 후퇴하여 최소의 면적만 대토로 분양해주는 바람에 지금처럼 문화원이 협소하고 주차 공간도 부족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내․외동 신도시개발에 막대한 피해와 기형도시를 만들고 문화원 자체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버티기 아집은 모두에게 피해만 남긴 채 꺾여 헐리고 말았다.
사람은 영원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영원히 남고 흘러간다는 사실을 저들은 몰랐을까?

연지공원이 살아남기까지

김해를 좌지우지하던 토호세력들이 앞장서서 김해 내동의 연지 못을 메워야 한다고 야단들이었다. 그 이유인즉 첫째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 연못이 필요 없고 둘째 매년 사람이 빠져 죽어가고 있으며 셋째 연못의 물도 썩어 그 기능을 할 수 없으니 매립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연지 못 위에 있는 아파트와 일반 주택에서 나오는 가정용 생활하수가 여과 없이 그대로 연못으로 흘러들어 심각한 수질오염을 시키고 있었다.
김해자연환경보호회(회장 조유식) 회장 명의로 김해시에 개선을 촉구하는 건의를 하였더니 김해시는 그곳에는 생활하수가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단체가 그동안 생활하수 유입경로를 조사하여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으나 담당공무원은 계속 부인했다.
할 수 없이 담당 공무원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가서 아파트 생활 하수관 한곳에는 파란색 색소(식용)를 그리고 일반 주택 3~4곳의 가정집 하수관에는 흰색 색소를 물에 희석해 흘려보내고 그 물들이 연못으로 흘러드는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연못으로 흘러들어오는 하수의 색깔은 먼저 내려 보낸 파란색이었고 뒤이어 흘러들어온 하수는 흰색이었다.
이후 김해시는 생활하수 유입을 차단하는 공사를 하였고 연지 못의 물을 정화할 방법을 모색했다. 해반천 물을 끌어 오는 방법과 지하수를 파서 끌어 올리는 방법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던 차에 현명하신 지역 유지들이 아예 연지 못을 메워버리자고 제안을 하였고 김해시도 이에 동조, 소리 소문도 없이 연지 못 매립을 하기 시작하였다. 주민의견 없이 마구잡이로 연못 메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못주변 1/3이 메워졌다.
처음에는 연지 못 보수공사인 줄 알고 지켜봐 오던 환경단체와 주민들은 나중에 이 연못을 매립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반발했다.
환경단체 회원들이 단체로 김해시에 몰려가 즉각 연지 못 메우기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리고 연지 못을 메워야 하는 이유를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도시마다 없는 연못도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는데 우째 김해시는 있는 연못마다 다 메워(매립)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도시의 흉물을 만들고 있느냐, 행정이 몇몇 유지들의 입속 채워 주는 데 급급하여 도시 미관과 시민휴식공간을 없애도 되는 것이냐, 등등으로 김해시를 압박했다. 김해환경단체회원들은 오래전에 저들에 의해 부원동 남 밖 못이 매립되어 사라진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분명히 이번 매립도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 속에 매립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목숨 걸고 반대했던 것이다.
환경단체의 참여요구를 받은 당시 내․외동 출신 박민정 김해시의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공무원들을 질타하고 주민여론을 거쳐 연지 못 매립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넓은 연못은 1/3이 사라진 후였다.
김해의 자랑 오늘의 연지공원이 환경단체회원들에 의해 매립에서 보존으로 김해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해지역구 역대 국회의원들.
김해지역 역대 국회의원을 보면 제헌국회의원으로 김해(갑) 신상학(무소속), 김해(을) 조규갑(무소속) 의원이 당선되었다.
제2대에는 김해(갑) 최원호(민국당), 김해(을)이종수 (무소속)의원이, 제3대에는 김해(갑) 박재홍(국민당), 김해(을) 이종수(무소속)의원이, 제4대 김해(갑) 강완무(자유당), 김해(을) 이종수(자유당)의원이, 제5대 김해(갑) 최원호(민주당), 김해(을) 서정원(무소속) , 제6대 김택수(공화당), 제7대 김택수(공화당), 제8대 김영병(공화당) (6.7.8대는 단일선거구로 1명 선출), 제9대( 김해,양산(중선거구로 1선거구에 2인 선출), 신상우(신민당), 김영병(공화당/선거일 1973년 2월 27일), 제10대 김해.양산. 김택수(공화당), 신상우(신민당/선거일 1978년 12월 12일), 제11대 김해.양산 이재우(민정당), 신원식(민한당/선거일 1981년 3월 25일), 제12대 김해.양산 이재우(민정당), 김동주(신민당/선거일1985년 2월12일), 제13대 이학봉(민정당/선거일 1988년 4월 26일), 제14대 김영일(민자당/ 선거일1992년 3월 24일), 제15대 김영일(신한국당/선거일 1996년 4월 11일), 제16대 김영일(한나라당/선거일 2000년 4월 13일), 13.14.15.16대는 단일선거구로 1명 선출), 제17대 김해(갑) 김맹곤(우리당), 김해(을) 최철국(우리당/선거일 2004년 4월 15일/ 2005년 3월 25일 대법원 벌금 3백만원 선고 김맹곤 의원 의원직상실 보궐선거, 김정권 의원 당선(한나라당), 제18대 김해(갑) 김정권(한나라당), 김해(을) 최철국(민주당/ 선거일 2008년 4월 9일)의원이 각 당선되었다.
2010년 12월9일 대법원 판결로 최철국 국회의원 의원직 상실 보궐선거 2011년 4월 27일 한나라당 김태호 의원 당선되었다.
김해지역구 출신으로 가장 성공했다고 보이는 인물은 신상우 전 의원이다.
김해지역구에서 내리 2선을 하고 15대까지 7선을 하며 15대 국회부의장 97년 초대 해양수산부장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역임하였지만, 한때 전두환 정권하에서 재수 없게 걸려 더 큰 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 다음 기대주 김영일 의원도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낙선과 함께 그의 정치 인생도 구속이라는 아픔을 안고 끝이 났다.
통합 김해시가 탄생하였지만 낙후된 지역이 너무나 많고 특히 동․서간의 균형발전이 잘 안되고 있다는 지적들과 여야정치인들의 대립으로 늘 시끄러운 김해시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문 / 박영배 고문(전 제일시계 금은방 대표, 현 영남매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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