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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9>“50만 김해 - 근대50년” 옛 김해 읍의 관문 부원동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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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9>“50만 김해 - 근대50년” 옛 김해 읍의 관문 부원동의 자랑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2.28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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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고조산, 세심지, 남밖다리
옛 김해 읍의 관문 부원동의 자랑
김해경제중심지 부원동 다시 뜨고 있다.

   
 
  임호산에서 본 부원동 남산 주변.  
 

김해 부원동(동장 조정희)은 옛 김해군 시절 김해 읍으로 들어오는 첫 동네였다.

한때 김해 읍하면 제법 날리던 시절이 있었고 김해의 모든 술꾼, 미모의 여인들과 건달들이 붐비던 곳이기도 했다.

읍면 사람들이 이 김해 읍내로 와서 묘령의 여인들과 방석집에 앉아 정종깨나 마셨다면 그 사람은 좀 나가는 사람이었다.

한때 이러한 방석집들이 가장 많았던 곳이 부원동이기도 했다.

가락 녹산 사람들이 이곳 부원동 홍등가에서 거나하게 한잔하고 남밖다리 매표소 매점 앞 평상에 앉아 마종여객 또는 동신버스를 기다리던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다. 는 것이 어른들의 전언이다.

6~70년 전만 해도 이곳에 연탄공장도 있었고 남밖다리 옆에 자동차 정비공장과 바로 앞 지서도 유명했었다.

남산진 모퉁이에 쌓여 있던 조개 무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지만, 나중에 구획정리를 하면서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 공원의 체육시설들이 어느 날 주민들도 모르게 활천고개 위 만장대 아래 능선 시민체육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공원자리는 당시 김해시장의 동생 문 모씨가 불하받아 건물을 지었다.

   
 
  김해 세무서 한 컨에 있는 세심지 표지석.  
 

부원동 ‘고조산’(顧祖山)과 남산

 

 

고조산, 부원동은 분산(盆山)줄기의 끝인데 개가 엎드린 모양(복구형伏狗形)이라고 개 혈(穴)이라고도 부른다. 부원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이 산의 남단에 있었던 공동묘지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시청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산은 원 뫼 뿌리라고 하며, 분성산(盆城山)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좌룡맥(左龍脈)이 이곳에서 반전(返轉)하여 읍내를 되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므로 고조산(顧祖山)이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 산에 성황당(城隍堂), 기우단(祈雨壇) 등이 있었다.

고조산을 남산 또는 남산 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금관가야 시절 김해평야가 바다였기 때문에 당시의 놀이터이던 이곳을 "남산"이라 하였다.

남지(南池) 와 세심지

남지는 김해 남산(南山:좌청룡)과 임호산(林虎山:우백호)의 모습이 물 위에 비치면 김해의 융성을 약속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부원동뿐만 아니라 김해의 상징적인 연못이었지만 돈에 눈이 뒤집힌 지역유지들에 의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못은 정조 13년(1789) 부사 김우현(金禹鉉)이 읍기(邑基)에 도움이 되고, 부민(府民)에 좋다고 하여 축조한 약 3만 평방미터의 남지(南池)가 1975년까지 있었다.

김해의 역사와 전설을 함께한 남지 매립을 못내 아쉬워한 시민들이 1978년 남지를 축소한 작은 못을 만들어 세심지로 이름 지었다.(김해세무서에 비석만 남아 있다.)

1956년 4월 못의 북부 일부에 김해중학교가 들어서고, 1977년 2월 남부에 김해 군청(현 김해세무서)을 착공하여 1978년 4월 준공되면서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원동 중화요리 전문점 수정루에서 매년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호계천과 호계교

동상동 상류에서 시작되어 현재 부원 8통과 부원 9통을 관통해 지나며 북쪽으로는 부원 3통과 부원 12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보통 남문 밖 다리라고 부른다. 1933년 국도 개통과 함께 호계교가 가설되어 오랫동안 김해 읍의 관문(입구)이 되어 왔다. 남쪽은 강창포(江倉浦)에 이르고, 세월이 오래되어 모래가 쌓이므로 정조 14년(1790년)에는 내를 곧게 만들었다. 순조(純祖) 31년(1831년) 직천(直川)은 읍기(邑基)에 해롭다고 부사 권복(權馥)이 또 다시 곡천(曲川)으로 고쳤다고 한다.

호계천이 복개되기 전인 80년대만 해도 부원동 거주 주민들의 모임인 ‘상죽회’ 회원들이 호계천으로 내려가 쓰레기와 오물을 줍는 등 환경정화활동을 정기적으로 펼쳐 이 하천이 매우 깨끗했었다.

상죽회 회원들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때에도 부원동 중심도로 양쪽에 4각 화분에 다양한 꽃을 심어 꽃길을 조성하는 등으로 관공서와 시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기도 했다.

   
 
  한때 김해 주객들의 단골 골목이었던 부원동 유흥가 모습.  
 

행정중심지 부원동

한때 김해군청, 김해시청, 김해시 법원, 김해등기소, 김해우체국, 김해전화국, 한국전력,
KBS김해송신소, 김해상공회의소 등이 있다가 김해군청은 사라졌고 법원과 등기소는 내외동으로 이전해 가고 대타로 김해세무서와 노동부 김해고용지원센터, 기상관측소 등 행정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등 정부투자기관이 집중 돼 있다.

유흥업소, 상가 등이 밀집했던 활발한 도심에서 상권이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옛 정취를 잊지 못하는 시민들의 발길과 고집스런 상인들의 노력으로 부원동은 이제 김해의 새로운 관심지역으로 활기를 찾고 있다.

인구 3천5백여 명(11월 기준)의 작은 동이지만 자생단체 임원 회원들과 통장들의 자기희생적인 봉사정신은 탄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부원동 새마을금고가 지역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 참여로 자생단체들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고 중화요리전문점 수정루는 매년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요리대접 경로잔치를 열고 있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떠오르는 부원동

   
 
  부원동 삼성병원 앞 농지, 미나리 재배단지 2004년 촬영.  
 
   
 
  미나리 재배단지가 사라지고 부원역세권 공사가 한창이다.  
 
   
 
  2년후 미나리 단지는 이처럼 변해 있을 것이다.  
 

부원동은 이제 14번국도 이남 쪽 남해고속도로 사이의 개발에 따른 고층아파트와 호텔 유통센타 등이 들어서면 새로운 김해의 랜드마크 지역이 될 것으로 보여 벌써부터 지역민들의 관심지역이 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울 사람들의 입에 김해의 향을 불어 넣어 주던 미나리 재배지역이 몽땅 사라진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매일 열리는 새벽시장이 부원동에 있고 여기에 싱싱하고 싸고 맛있는 만물이 다 있기 때문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는 것이 부원동 주부님들의 말이다.

부원동 주민들은 김해시청이 부원동에 눌려 있으면서도 부원동을 너무 박대하여 개발도 발전도 더디다며 히루라도 빨리  시청을 다른 곳으로 내 쫓아 버리고 싶다고 했다.

부원동은 김해의 관문으로서 중앙 동에 속하지만 남산을 허물고 난이후 부터 정치적인 큰 인물이 나오지 안고있다.

유일하게 김해시 의회 의원으로서 12년간 의정 활동을 하면서 초대  후반기 의장과 3대 전.후반기 의장. 4대 전.후반기 의장으로서 총 10년간 김해시 의장을 역임한 박용일 전 의장이후 이지역은 시의원. 도의원 한명없는 동이 되었다.


부원동의 연혁

김해부(金海府)의 청사가 있었던 곳이며 1914년 다전리(茶田里). 강창리(江倉里). 고서리(古西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부원리(府院里)가 되었고. 1941년 11월 1일 영정(榮町)으로 고친 것을 1947년 6월 부원동으로 개칭했다. 1980년대부터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신시가지를 형성하고 시청을 비롯 등기소, 시외버스 주차장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1981년 7월 1일 시 승격과 함께 부원 3개 구를 3개 통으로 변경되었고. 1986년 11월 8일 부원동 619-3에 동사무소를 완공했다. 1990년 4월 1일부로 15개 통으로 분할했으며 1996년 12월 19일 김해문화의 집을 개관했다.

우리 마을의 특징

- 시의 중심지로서 주요 관공서, 은행 등 정부투자기관이 집중되어 있고 가락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 교통의 중심지로 농산물 집하 등 상거래가 활발하여 토착민과 농업종사자가 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김해 부원동 유적

1980년 동아대학박물관에 의해 각각 3기의 집터[住居址]가 확인되었다.

덧띠토기[粘土帶土器]가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른 집터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집터는 남서쪽 벽면에 접해서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고 출토된 유물 또한 와질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손칼[鐵製刀子] ·철화살촉[鐵鏃] 등 철기관련 유물이 다량 검출된 점으로 보아 초기 철기시대 와질토기문화 단계의 주거 유형으로 판단된다. 시기는 방형이 BC 3세기 대, 타원형과 원형이 AD1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유적은 김해의 충적평야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기슭의 조개더미 및 집터 유적으로, 가락국 성립 초부터 시작해 그 중흥기에 이르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형성한 생활유적이다. 김해식 토기에서 신라·가야토기에로의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하며, 이 과도기적 시기를 ‘부원동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문헌『김해부원동유적(金海府院洞遺蹟)』(동아대학교박물관, 1981)

①부원동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김영묵)
②부원동 새마을협의회 (회장 이철범)
③부원동 바르게살기위원회 (회장 전병우)
④부원동 새마을부녀회 (회장 김영선)
⑤부원동 체육진흥회 (회장 박재헌)
⑥부원동 청소년지도위원 (회장 서종수)
⑦부원동 자원봉사회 (회장 신근희)
⑧부원동 자율방범대 (회장 김용봉)
⑨부원동 통장단(회장 김의상)
⑩부원동 자연보호협의회 (회장 김민숙)
⑪부원동 청년회 (회장 김병원)
⑫부원동 방위협의회 (회장 김구성)
⑬부원동 문화의집 자원봉사회 (회장 홍영숙)

부원1통 통장 김경자
부원2통 통장 장성대
부원3통 통장 주순애
부원4통 통장 안원호
부원5통 통장 지창수
부원6통 통장 송공부
부원7통 통장 김의상
부원8통 통장 김영세
부원9통 통장 박이곤
부원10통 통장 권대원
부원11통 통장 정현선
부원12통 통장 허외숙
부원13통 통장 허준철
부원14통 통장 김영의
부원15통 통장 이곡덕
영상으로 본 부원동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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