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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0>“50만 김해 - 근대50년” 서상동, 봉황동이 탄생시킨 회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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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0>“50만 김해 - 근대50년” 서상동, 봉황동이 탄생시킨 회현동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2.01.03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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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김해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는 문화재 동

김해시 회현동(동장 노순덕)은 면적 1.14㎢, 세대수 4021, 인구 9327명(남 4,730명-여 4,597명/2011년 12월 3일)이다. 김해시의 중심지에 속하며, 서쪽은 해반천을 경계로 내동·외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대성동(북부동)과 맞닿아 있고, 동쪽은 동상동·부원동과 행정동 경계를 이루고 있다.

김해면이 1931년에 김해읍(邑)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 김해읍 일원이 김해시로 승격함에 따라 회현리(里)가 회현동(洞)이 되었으며 1995년 김해시와 김해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김해시가 탄생되었다. 이때 행정동인 회현동은 법정동인 서상동·봉황동으로 이루어져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 분성산 만장대에서 바라본 임호산, 봉황대, 서상동, 봉황동 전경.  
 

회현동은 김해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수로왕릉과 조개무지. 금관가야 지역 최대의 종합생활유적지인 사적 제2호 봉황동유적지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회현동 전체의 지하는 매장문화재가 쌓여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김해 최대 공구상가들이 집중 돼 있고 가락로 및 분성로를 중심으로 수많은 상가와 5일 시장이 서는 상권 중심 동이기도 하다.

현재 가야왕궁 터를 중심으로 왕궁복원 사업과 역사문화, 환경정비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으며, 이 사업은 가야사 관련 유적의 발굴 및 정비를 통해 가야사의 위상을 제고함은 물론 수준 높은 관광자원을 개발함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해시 17개 읍면동 중에서 문화재와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보니 주택과 상가, 아파트 등의 건축제한으로 타 동에 비해 개발과 발전이 뒤처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가락국 시조대왕을 모시고 있는 지역으로서 매년 춘.추향제례를 올리는 곳으로 이때 전국에서 김해 김씨 허씨 등 후손 수 천 명이 회현동을 찾고 있어 주민들의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때 봉황동 우시장은 경남 최대 소 매매시장으로 유명했고 돼지국밥과 소고기국밥의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일화도 있다.

지금도 그 우시장 주변에 오일장이 서며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장터에 나와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손꼼장어 집을 찾아 소고기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드시면서 그 옛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혹 용돈이라도 푸짐하게 생기는 날에는 어김없이 친구들을 대동하고 연탄불에 살짝 구워 주는 꼼장어 한 접시 시켜놓고 세상사를 논하기도 하는 소통의 장이되기도 한다.

회현동은 상권과 전통장날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도 아름답다. 봄이 되면 봉황대를 둘러 싼 벚꽃나무, 도토리나무, 단풍나무, 대나무, 소나무, 철쭉, 진달래나무, 감나무 등 20여 종의 나무가 각각의 새로운 색동옷으로 갈아 입고 시민과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봉황대는 당시 가야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고상가옥이나 적들의 침투를 대비하고자 세운 망루, 방책 등을 재현해 놓았다. 또한, 이곳에는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실제 이곳에는 그 전설에 얽힌 황세바위와 여의낭자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 회현동 `가야유적지 탐방 건강걷기대회`가 김해시 봉황동 유적지 잔디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자생단체 활동

 

 

 

 

 

 

 

   
 
  ▲ 합성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장학금을 주고 있다.  
 

회현동에 있는 합성초등학교 졸업식에는 주민자체센터와 자생단체 임원을 비롯한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장학금 1천여만 원을 모범 졸업생과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년 전달하고 있어 칭송을 받고 있다.

회현동 청년회와 청년특우회가 매년 자생단체들의 협조를 받아 펴고 있는 어르신 위안행사 겸 경로잔치가 열리는 날은 인근 동 어르신들까지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바람에 늘 문화체육관이 만원이 된다.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만한데도 청년회는 선물과 음식을 그분들을 위해 푸짐하게 준비하여 차별 없이 대접하고 있는 동으로 어르신들로부터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동민체육행사를 자제하고 관내 유적지를 탐방하고 거니는 체험 걷기대회를 열어 주민 6백여 명이 참가하여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회현동의 발전과 자생단체들의 활성화를 위해 아낌없는 후원과 지원을 하고 있는 회현새마을금고(이사장 주종규)가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전언이다.

   
 
  ▲ 회현동 경로위안잔치 한마당 행사가 김해문화체육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면.  
 

서상동

김해군 좌부면(左部面)에 속한 지역으로, 북문안 또는 북내동(北內洞)이라 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 대지리(大支里), 예종 때 대지음리였다가 도화동(桃花洞)으로 고쳤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우부면의 고서리(古西里)와 능동(陵洞)일부를 합하여 북내동(北內洞)이 되었고, 1918년 김해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읍 북내동이 되었으며, 1941년 11월 대화정(大和町)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대화정을 서상동으로 고쳤다.

능동·도화동 등의 옛 마을과 제방인 옥골방천이 있으며, 금강천(金剛川)이 있었는데 현재는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해군청, 김해경찰서, 김해소방서, 김해읍사무소, 김해등기소등이 있었고 김해유일 금보극장과 김해극장이 있던 곳으로 행정 중심동이기도 했다.

유적으로는 송공순절암, 숭선전(崇善殿), 숭선전 신도비, 영모대(永慕臺) 터, 김해부 동헌 터, 영정각 등이 있다. 영정각은 수로왕 허왕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1993년에 완공하였으며, 숭선전 신도비는 1884(고종 21)년에 건립되었다. 문화재로는 서상동 지석묘(경남기념물 4호), 수로왕릉(사적 73호), 숭선전 제례(경남무형문화재 11호) 등이 있다.

봉황동

김해군 우부면(右部面)에 속한 지역으로, 여의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본식 지명인 봉황정이 되었다. 1918년 김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읍 봉황정이 되었다. 1947년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봉황정을 봉황동으로 고쳤고 1981년 7월 김해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시 봉황동이 되었다.

봉황동은 봉황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칠산 서부동으로 이전했으며 지금은 제일고등학교 임시 교사로 사용하고 있다.

김해교육청이 있었지만 이전했고, 김해유일 관광호텔은 휴업중이다. 지금은 김해중부경찰서와 김해노인복지회관, 여성복지회관, 농어촌공사 등이 있다.

망해정은 허경윤(許景胤)이 세운 정자이며, 영모재는 허경윤의 위패를 모신 재실이고, 여의각은 가야시대 출여의 낭자의 정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전각이다.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07년 일본 사람 이마니시가 처음 발견, 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적이 발견된 이후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있었고, 1933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 위에 쌓여 있는 조개더미(패총) 유적으로 규모는 동서 길이가 130m, 남북 너비는 약 30m쯤 되고 쌓임층의 높이는 6-7m 정도가 된다.

토기는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김해토기' 또는 '김해식 토기'라고 부른다. 한강 이남지역에서 서기 1-3세기를 대표하는 토기로 토기 빛깔이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띄는 때린무늬(타날문<打捺文>) 기법으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토기의 중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토기들이 뒤에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 동쪽 정상부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조개더미와는 다른 시기의 것이다. 고인돌무덤 1기, 돌관무덤 5기, 독무덤 3기와 무덤 근처에서 집터도 1기 나왔다. 독무덤 밑에서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유물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김해 회현리 패총 유적은 조개더미와 무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고 조개더미 층 안에서도 두 개 이상의 층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2001년 2월 5일 금관가야의 집단 취락지인 봉황대(경남문화재자료 제87호)와 합쳐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지정 되었다.

조선 고종군 김해분성 서쪽에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작은 산에 대하여 당시 부사 정현석이 대를 쌓고 봉황대라고 명명한 것에서 부터 유래가 되었다.

문화재

문화재로는 김해 봉황동유적(金海鳳凰洞遺蹟: 사적 2호)인 조개무지[貝塚]와 수로왕릉(首露王陵: 사적 73호)지석묘(西上洞支石墓: 경남기념물 4호)등이 있다.



수로왕릉(首露王陵)

- 분 류 : 사적 제73호

- 소재지 : 김해시 회현동(서상동) 312

- 시 대 : 삼국

- 규 격 : 면적61.75㎢

- 설 명 :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 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써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년)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①통장단 단장 이종수
②자생단체협의회 회장 김긍수
③새마을협의회 회장 진수태
④새마을부녀회 회장 박순연
⑤바르게살기위원회 회장 이주연
⑥자원봉사회 회장 이영옥
⑦자연보호지도위원회 회장 박유곤
⑧청소년지도위원회 회장 김종환
⑨청년특우회 회장 박두환
⑩체육회 회장 김성수
⑪청년회 회장 정연도
⑫주민자치센터봉사회 회장
⑬회현동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송재줄

 

 

1통장 최순남

2통장 김시식

3통장 이종민

4통장 김휘대

5통장 이종수

6통장 임명준

7통장 구미자

8통장 노주일

9통장 기성애

10통장 김인숙

11통장 송정도

12통장 현순연

13통장 염경줄

14통장 이승혁

16통장 임호상

17통장 이정희

18통장 이영순

19통장 허정옥

20통장 이영순

21통장 박용수

22통장 임순자

23통장 문옥순

24통장 황순덕

25통장 정선희

26통장 정경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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