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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유적지 한산도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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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유적지 한산도 제승당...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3.01.23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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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김해에서 승용차로 거가대교를 따라 1시간 20분 정도 달려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65-1번지 어구 항에 도착했다.

한산도 제승당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 어구에서 카페리호를 이용하여 승용차와 함께 이동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여 우리 일행도 그렇게 했다.

   
 
  어구항을 출발, 배 위에서 바라본 물보라 속의 굴 양식장 풍경.  
 

한산도는 통영시 남동쪽에 있으며, 행정구역상 통영에 속해 있지만 거제와도 가깝다.

이곳 어구 항에서 한산도 소고포 항까지는 약 12분 정도 소요되었다.

어구 항을 출발한 카페리호 을지 2호의 2층 선실에서 내려다본 어구 항 주변은 온통 생굴 양식 시설들이 가득했다.

너울거리는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하얀 스티로폼들이 작열하는 태양의 빛을 받은 바다를 깔고 앉아 멋을 부리는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소형 어선에 이끌려가며 양식 굴 수확을 하고 있는 모선 자루에 굴들이 담겨지고 있다.  
 

한산도 소고포항에 도착하여 차량으로 약 5분 정도 이동하니 제승당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바다를 끼고 조금 가면 가장 먼저 매표소와 한산 문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 제승당까지 가는 둘레길 우측에는 맑고 맑은 바다가 좌측에는 수백 년도 더 돼 보이는 적송이 하늘 높이 솟아 관광객을 맞이해 주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적송의 향기를 만끽하며 약 10분 정도 걸으니 제승당 입구가 나오고 제승당을 오르는 대첩 문이 조선 수군의 경계 속에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대첩 문 입구 좌측에는 1593년 장군이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바로 옆에 파여 있었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첩 문을 지나 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니 충무 문이 나왔으며 이 충무 문을 지나자 제승당의 유적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적 제113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입구 한산문 전경.  
 

일행은 먼저 홍살문을 지나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를 참배하고 돌아서 나오면서 제승당을 찾아 충무공의 영정 앞에 묵례했다.

제승당은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 받아 이곳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하고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적지 곳곳에 한산정(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하며 군사 교육하던 곳)을 비롯하여 행적비, 한글비, 유허비, 공덕비 등이 있기도 했다.

제승당 우측 약간 높은 곳에는 이순신 장군이 혼자 외로운 처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며 우국충정의 ‘시’를 읊으셨던 수루가 있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제승당 유적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관광객들.  
 

아... 이 몸은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이 수루에 오르니 저 멀리 한산만 위에 한산대첩 기념비와 거북이 등대가 보이고 관광객을 태운 관광유람선이 고동산, 미륵산, 망산에 둘러싸인 충무공의 대첩지 남해를 돌아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 판매소와 매점에 들려 이 바다생산품인 해물을 먹으면서 김해에 있는 부경양돈조합 박 모 조합장을 존경한다는 중년신사도 만났으며 김해상동우체국 김 모 국장의 안부를 묻는 한산도 우체국장님도 만나 유익하고 재미나는 섬 이야기부터 관광명소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 뒤편에 있는 휴식공원에 둘러 서 있는 튤립나무숲이 교훈을 주기도 했다.

사람은 벼슬이 올라갈수록 머리를 치켜드는 데 반해 저 나무들은 커갈수록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대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최고라는 아만에 젖어있는 2% 부족한 인간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1340년 동안 군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  
 

충무공유적지가 있는 한산면은 본도와 주변에 산재한 도서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총 29개의 유.무인도를 포함하고, 청사에 길이 빛날 한산대첩지로서 이름 높은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고장이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역으로,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태백산맥의 산줄기들이 바다에 잠겼다가 크고 작은 멧부리들이 바다 위에 봉긋 솟아올라 아름다운 다도해를 이룬 섬들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제승당은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있는 사적 제113호이다.

 

 

경내의 면적은 600,871㎡이며, 건물은 28동, 건평 1,602㎡이며, 통영시에서 직선으로 6.7km 떨어진 한산 섬에 위치한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이순신은 한산대첩을 통해 바다의 제해권을 구축했다.

그 후 제승당을 짓고, 1593년 선조 26년부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참패로 소실된 선조 30년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제승당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선조 30년 1597년에 폐진이 되었다가 142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1959년 정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해 왔다.

1975년 정부는 영역을 확장. 보수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했다.

=한산대첩=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제승당의 홍살문 이곳을 지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충무사가 나온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했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했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했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전경.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했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제승당 유허비 1739년에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것이다.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 받아 이곳에서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곳으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유서 깊은 사적이다.  
 
   
 
  충무공 후손 통제사 공덕비다. 이 공덕비는 통영 충렬사에도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 한산만을 바라보며 시름하시며 시(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읊으셨던 수루이다.  
 
   
 
  제승당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만 및 한산대첩 기념비, 거북 등대 중앙으로 고동산, 미륵산, 망산이 보인다.  
 

 

   
 
  고개숙인 튤립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성장할 수록 가지가 고개를 숙이지만 내공 태성은 강함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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