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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멈춰 서고 물이 돌아나가는 그곳 변산 월명암(月明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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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멈춰 서고 물이 돌아나가는 그곳 변산 월명암(月明庵)
  • 최금연 기자
  • 승인 2013.04.23 0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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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부안 땅으로 간다.

김해 보은사의 거사림회·관음회에서 변산반도 월명암으로 1박2일의 여정으로 사찰순례를 간다기에 친한이 몇과 함께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전북으로 들어서자 빗방울이 결국 하얀 눈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과 함께 내리니, 어느 것이 눈이고 어느 것이 꽃잎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아름답운 광경이 전북입성을 환영했다.

   
 
  ▲ 월명의 안개바다․……월명무애(月明霧靄) 변산팔경 중 하나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에 있는 월명암(月明庵)은 신라 신문왕 12년(692년)때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예로부터 백암산 운무남, 대둔산 태고사와 함께 호남3대 명지(名地)에 속한 유서 깊은 수행도량이다.

월명암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기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네 성인(聖人), 여덟 현인(賢人), 열두 법사(法師)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양택지(陽宅地)이다.

그리고 낙산 일출과 쌍벽을 이루는 월명 낙조(落照), 운해(雲海)로 어우러진 해돋이야말로 변산반도의 일대절경이자 월명암의 자랑이다.

   
 
  관세음보살상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대웅전 전경.  
 

변산의 제 2봉인 쌍선봉(498m)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월명암은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 14)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인 1908년에 다시 불타버리자 중고선사(中故禪師)가 어렵게 다시 절을 세웠다. 그러다가 8.15 광복 후 여순반란군이 이곳에 들어와서 6.25직전, 그들 반란군에 의해 또다시 불에 타는 수난을 겪게되었다. 1954년 원경(圓鏡)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지금과 같은 규모의 암자로 다시 보게 되었다.

월명암이 산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올랐다.

남여치 초입에 들어서자 월명암 2.2km, 한 시간이면 될 거라 생각 했다.

그러나 초입부터 가파른 산길과 바위가 나타나고 거기다 자욱한 안개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젠 다 왔겠지 생각하면 또 가파른 바윗길이 나오고 이젠 정말 다 왔겠지 생각하면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길이 시작되었다.

설악산 봉정암, 여수 향일암, 도봉산 천축사, 거제 보리암 등 명산기암에 자리한 사암에 오를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옛날 이토록 깊고 높은 산 정상에 목재나 기왓장을 어찌 운반하여 지었을까, 월명암도 변산에서 남여치를 오르는 최단거리가 1.7㎞로 1시간 30분이 걸리고, 내변산 능선(2.5㎞) 2시간, 내소사에서 넘어 오는 길(6㎞)은 3시간30분이나 걸린다.

그렇게 한 시간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고서야 월명암에 도착했다.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를 제일먼저 반겨준 이는 월명암 견(犬)공 보살 만수와 천둥이, 우리일행의 거친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를 듣고 절 앞까지 마중나와 반겨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내려오는 아침까지 경내를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집주인이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주듯이 법당,화장실,공양간, 요사채를 오가며 한사람 한사람을 안내했으며 늦은 밤엔 우리가 묵은 요사채 댓돌에 앉아 화장실 가는 보살을 보면 화장실까지 데려다주고 기도하려는 보살은 법당까지 안내해주는 사람보다 더 친절함을 보여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오솔길을 따라 수없는 수행자들이 오르고 내려을 것이다. 8월만되면 월명암 오르는 오솔길에 상사화가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행 중에 예불을 보지 않고 게을을 부리자 그 보살의 신발 한쪽을 물어다가 법당 앞에 두고는 찾으러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을 보고 모두가 놀랐다. 신발 주인공 말에 의하면 이번 순례에서는 기도를 열심히 할거라는 다짐을 하고 왔단다. 그런데 예불을 모시러 법당으로 갔다가 깜빡 잊고 왔던 것이 있어 가지러갔는데 너무 춥고 해서 나오기가 싫더라고 했다. 그런데 저 삽살개가 어찌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신발 찾으러 갔다가 새벽까지 기도하고 왔다며 개가 아니라 부처님인 것 같다며 합장을 했다.

그렇게 짖어대며 반겨주던 만수와 천둥인 우리가 내려오던 날은 짖지도 않았다.

 봉래선원(鳳萊禪院)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며 일출과 안개 바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 밝은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은 날씨가 궂은 관계로 밝은 달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예불을 마치고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변산은 안개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만학천봉을 뚫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월명암의 일출과 운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해는 어린아이가 이불속에서 머리를 조금씩 내밀 듯 그렇게 천천히 월명암 대웅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활짝 열린 대웅전 안에 수줍게 앉아 계신 관세음보살 얼굴을 금새 붉은 빛으로 물을 들였다.

 월명암은 뒤로는 쌍선봉 일대가 병풍처럼 둘러있어 아늑하고, 앞쪽 동편으로는 툭 터진 골짜기에 직소폭포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내변산을 가로지르는 형국이다. 이를 두고 천하 명당(山盡水廻-산이 멈춰서고, 물이 돌아 나간다)이라고들 한다하여 일출과 월출을 감상할 수 있으며, 뒤편 낙조대에서는 지는 해를 감상하기에 적당하다고 한다.

어찌 창건자 부설이나 진묵이 그 자리를 놓쳤겠는가?

 월명암의 창건주이며 부설전의 주인공인 부설거사의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며 부설거사의 행적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부설전」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관음전  
 

부설거사는 애초 출가한 스님이었다.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했던 그는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장흥 천관산 등 남해와 지리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도를 닦으러 가는 길에 백제 땅인 만경평야를 지나다가, 독실한 불자였던 구무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구무원에겐 묘화라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다.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해 태어난 묘화는 선녀 같은 용모에 착한 마음씨와 절조까지 지녔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런데 20년 동안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묘화가 부설스님을 보자 말문이 트였다. 그러면서 부설 스님과 자신은 3생에 걸친 인연이 있으니 천생의 배필이라고 했다. 그래도 도반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던지라 부설이 걸망을 메고 집을 나서려 하자, 묘화가 칼을 들고 서서 "만약 스님께서 문지방을 넘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을 하겠습니다. 上求菩利下華衆生(상구보리 하와중생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함)을 하기 전에 눈 앞의 나부터 구하십시오"라고 소리쳤다.

묘화와의 인연 또한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부설은 두 도반에게 부디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영조, 영희 스님이 오대산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왔을 때 마을 앞에서 놀고 있던 부설의 아들 등운을 만난다. 부설의 안부를 묻는 두 스님에게 등운은 "우리 아버지는 10년 넘게 앓고 있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두 도반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부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후세 사람들은 아마도 부설이 평소엔 병자 시늉을 내고, 모두 잠든 밤에 일어나 수행 정진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시 만난 세 도반은 도력을 겨루기 위해 도자기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걸어 놓고 각자의 도자기를 쳤다. 그러자 영희와 영조의 도자기는 깨어져 물이 흘러 버렸다. 그러나 부설의 도자기는 깨어졌지만 물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 때 부설거사가 읊은 게송이 이러했다.

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네)

부설은 많은 게송을 지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불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팔죽시(八竹詩)이다.

此竹彼竹化去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 가는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그런대로 보고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

부설이 열반한 뒤 자녀인 등운과 월명도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모든 분별을 넘고 생사를 뛰어넘어 해탈자재한 이는 부설만이 아니었다. 부설의 부인 묘화는 110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환한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비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면, 그 비와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고 전하며, 아들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려 '등운조사'로 알려졌고, 월명은 월명암에서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월명암은 바로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을 딴 곳이다.

딸 이름과도 일치하지만 달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서 월명암이라고도 한다.

일반인에게 개방한지 얼마되지 않는 월명암은 사성선원을 크게 넓혀 재가신도와 일반 참배객들의 수행정진도 계도할 예정이라고 한다.

겹겹이 초록으로 산봉우리에 묻힌 고요한 섬 하나, 그렇게 좌정한 월명암의 봄이 투명하게 깊어간다. '산이 멈춰 서고 물이 돌아나가는' 명당 중에 명당이라 했던가. 범인의 눈으로 봐도 월명암은 분명 그 지기가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변산 8경 중 으뜸인 월명무애(月明霧靄), 그곳에서 바라본 골짜기의 물안개와 구름이 춤추는 듯한 황홀한 비경을 이른다. 그리고 그 비경만큼이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부설가의 성불이야기가 오늘도 수행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월명암의 종각  
 
   
 
  ▲ 관음전  
 
   
 
  ▲ 봉래선원에서 바라본 전경  
 
   
 
  ▲ 부설거사의 전설로 유명한 부설전 관음전 앞에 있다.  
 
   
 
  ▲ 봉래선원(鳳萊禪院) 근대의 고승인 행암,용성,고암,해안,소공 등의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  
 
   
 
  ▲ 월명암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갔다.  
 
   
 
  ▲ 월명암의 명물이된 만수와 천둥이는 이 곳을 찾는 수행자들의 안전지킴이자 안내보살견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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