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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고구마 총각 부원동 석재공장에 취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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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고구마 총각 부원동 석재공장에 취직하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4.10.07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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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23>

필자가 살던 월세집은 대성동 논실이란 마을로 당시 농업고등학교 맞은 편 골목에  운동장으로 가는 골목길의 중간지점 우측에 가죽나무가 대문 옆에 서 있는 황씨 할매집으로 기억난다.

월세라고 해봤자 단돈 천원도 안 되는 그 돈을 받으면서도 그 할머니는 셋방살이 총각에게 친손자처럼 대해 주셨다. 소문을 듣고 이웃에 사시는 최씨 할머니도 직접 담았다는 조선간장을 소주 대병에 담아 주시며 반찬이 없으면 간장하고 비벼 먹어도 맛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아닐 수 없었다.

간장 한 되를 주셨던 그 최씨 할머니 덕분에 할머니의 남동생(최상식)과 친구가 되면서 간장할머니는 필자의 누나가 되었다. 상식이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다가 얼마 전 지병으로 이 세상과 이별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누나로부터 들었다.

간장 할매, 아니 필자가 좋아하는 그 간장 누나가 부원동 새벽시장 약국 앞 사거리에서 각종 잡곡 등을 팔고 계시는데 이제 너무 연로하여 장사를 못하겠다고 하신다.

가끔 맛있는 것 사자시라며 용돈을 쥐어 드리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시던 그 팔에 힘이 없어진다고 필자에게 넋두리를 하실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논실에서 고구마장사를 하면서 보고 겪은 것은 이곳 논실을 비롯하여 대성동 동상동 서상동 봉황동 지역에 사시는 분들 중 생활환경이 어려운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장애인들과 독거노인들 여기다 술주정뱅이까지 다른 곳 보다 어려운 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도 고구마 장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흙돌담을 기대고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면 이 아이들이 배를 곪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필자가 어린시절 너무나 많이 배를 곪아보았기에 이곳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만  보아도 밥을 굶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함께 그곳에서 생활을 했던 탓에 여유만 생기면 아이들과 놀아주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훗날 종교단체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회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동상동 서상동 대성동 부원동 지역의 어려운 세대와 독거노인들의 가정에 쌀과 연탄, 양말, 털신, 담요, 반찬거리, 아이들 우유 등을 사들고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100% 달라졌고 살기 좋은 동네로 탈바꿈되어 김해의 중심 지역이 되고 있다.

고구마는 다 팔고 날씨는 추워지고 먹을 것도 떨어져 가는데 누나와 누나의 양 아버지에게 신세만 질수 없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찾아 김해 읍내를 돌아 다녀 보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배도 고프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종여객 종점 해장국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사서 마시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일자리 구하는데 없는지 물어보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총각이 그 일 하겠냐 하시며 걱정의 눈초리로 필자를 아래위로 째리 보시고는 그래 일단 한번 가봐라 하시며 알려 주신 곳이 바로 부원동 남산 앞 국도 변의 석재공장이었다.

박씨 성을 가지신 사장님께서 일단 한 번 해 보라시며 일자리를 주셨다. 김해와서 세 번째 직업이 생긴 것이다.

차량이 지나갈 때 마다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석재공장으로 날려 오고 여기다 돌가루까지 날려 얼굴과 눈 주위는 늘 하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큰 바위를 가져와 주문받은 크기만큼 돌을 자르고 다듬어서 글씨까지 새긴다.

마을 입구 표지석부터 묘지의 비석까지 다양한 석물들이 이곳에서 장인의 손길을 거쳐 생산되고 있었다.

하늘을 가려 주는 천정도 없고 빙~둘러 쳐진 비닐 울타리가 전부인 석재공장의 겨울은 서울의 두 배 이상 추웠지만 3개월 동안 잘 견디다 결국 필자 스스로 그만두게 되었다. 억수로 좋은 일자리가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을 다닐 수가 없었다.

직업 없는 놈에게 일자리를 주고 잘 먹여준 사장님을 어쩔 수 없이 배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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