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글’ 써주는 김해 출신 추사 서예 대가 박호곤 선생
가정과 이웃에게 교훈·명언 써 주며 가정교육 기틀 기여 월남전 참전 유공자로 '나라가 부르면 지금도 나갈 수 있다'
김해 대동면에서 나고 자란 추사 서예 대가 박호곤 (전)한국추사서예가협회장은 화창한 가을 날씨, 지난달 19일 가야문화축제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가훈 써 주기를 하고 있었다.
제11회 한국추사서화예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많은 출품전에서 우수상과 대상을 휩쓸었던 박호곤 선생은 이 축제에서만 봉사활동을 십수 년째 하고 있다.
원래 가훈은 가정의 윤리적 지침으로써, 가족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덕목으로 가규(家規)·가헌(家憲)·가범(家範)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날 박호곤 선생이 써준 것은 가훈이라기보다는 서예가에서는 ‘명 글’이라고 한다.
추사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 김정희 선생의 고유 명필로 힘이 있고, 강약이 분명하며, 겹쳐 들어가는 예가 있어 다른 필체와는 단연 비교가 되다 보니 ‘명 글’써주기 봉사활동에서도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다
영남매일이 오랜 기간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 온 박호곤 선생의 봉황동 자택을 방문하여, 추사 서예 대가가 된 배경과 작품세계를 들어보기로 했다.
[박호곤 선생과의 일문일답]
-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춘추에 비해 건강하신 것 같다.
오늘 백내장 관련 안과 시술을 했는데, 그것 말고는 딱히 불편한 데가 없다. 1965년에 해병대 특수수색대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5발의 총상을 맞고 사망 처리돼, 필리핀 미 공군 크라그병원에 후송된 적이 있다. 지금도 당시 총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후유증으로 궂은 날씨에는 통증이 있긴 하다.
- 그 어렵다는 추사체의 명맥을 이어가고 이 분야의 대가가 되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예공부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 월남전 당시 사망자로 후송된 후, 5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생사에 초연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국가와 사회를 위한 봉사와 희생은 당연하다는 신념이 확고히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정 부분 회복을 하고 진해해군병원으로 이송돼 보니, 나는 환자도 아니었다. 머리가 터지고, 눈이 빠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거기서 청소도하고 환자 수발도 들어가며 열심히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면서 서예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 그래도 여건상 전문적인 교육을 받거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에는 제한이 많았을 것 같다.
어떤 공부나 마찬가지이지만 본인이 우선 좋아해야 하고 재능도 일정부분 타고나야 할 것 같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림과 글씨에는 조예와 재주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군 병원 입원 당시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시작했던 서예 공부는 김해 한일합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총상을 많이 당해 한때 스님이 되려고 금강경, 반야심경을 다 외웠는데, 결혼을 하면서 서예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추사체까지 공부했던 단계를 소개해 주실 수 있는가.
서예 공부를 하게 되면 맨 먼저 한석봉체를 공부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6도체, 중국의 8도체를 거쳐 추사체에 다다르게 된다. 추사체는 힘이 있고, 아주 뚜렷하면서 강하고, 순할때는 굉장히 부드럽고도 종합적이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경탄을 한다. 스승님은 박노학 선생으로 금·은서의 대가이시다. 그 분 한테서 금·은서를 많이 배웠다. 금·은서는 촛불로 온도를 적절히 맞추어야 해서 어렵다. 특히, 은서는 한꺼번에 써내려가야 해서 더욱 어렵지만, 작품이 매우 빛나고 높이 평가된다. 또, 호랑이 잘 그리는 스님에게서는 호랑이 그림을 배웠다. 다른 그림들은 거의 독학했다. 둘째 손녀가 재주도 많고 그림을 잘 그리는데, 유치원 다닐 때, 호랑이 그림을 그려왔는데 거의 내 그림 수준으로 그려 왔더라. 지금 고 3인데,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 소중한 문화 자산인 추사체의 명맥은 어떻게 이어가는가.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해야 하는데, 하지 않으려 한다. 추사체는 강약이 분명하고 겹쳐 들어가는 예가 있어야 하니 배우는데 어려워한다. 학교 선생님들도 한석봉체를 하려고 하지 추사체는 하지 않으려 한다.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하려면 쉽지가 않다. 어려우면 비닐을 놓고 베껴쓰면서 연습하라고 한다. 현재 제자중에 5명 정도가 잘 따라오고 있다. 그 중 3~4명은 끝까지 따라와 명맥을 이을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글씨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자기 글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된다. 머리카락 한 가닥 같은 세필로 쌀 한톨에 글씨를 쓴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치면 글씨를 좀 쓴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추사체를 하다 내 호를 딴 ‘고산체’를 정립해 왔다.
- 요즘 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
현재 한국추사서예가협회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심사위원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심사도 한다. 그러면서 각종 초대전과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다. 공모전 할 때는 부채같은 것도 내고, 보통 5점에서 10점까지 낼 때도 있다. 글씨를 써서 이웃과 주변에 많이 나눠줬는데, 특히, 장애인들에게 많이 써 줬다. 장애인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온다. 그러면 그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맞는 글씨를 써 준다. 내가 불자 집안이지만, 기독교 정신의 글씨도 많이 써 준다. 다들 감사해 하고 잘 소장하고 있더라. 내가 그린 그림은 거의 내가 가지고 있다.
- 국가유공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더라.
김해지회 감사를 맡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올라 온 것을 보면 국가유공자 일원으로 기분이 너무 좋다. 나라가 부르면 지금도 나갈수 있다. 나라 없으면 자신도 없는 것이다. 월남 해병특수수색대에서 미군들과 합동작전도 많이 했다. 월남전 이후 미군들이 사용하던 기계, 전차, 항공기 많이 들여왔고, 심지어 지금도 사용하는 것이 있다. 이때 모방한 것으로 현재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K-방산의 기틀이 마련됐다.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 한 분만 더 나오면 우리나라 세계 최고강국이 될 것이다. 정치만 잘하면 우리나라가 우뚝서게 될 것이다.
수많은 가정에 ‘명 글’을 써줌으로써 가정교육 기틀에도 기여한 박호곤 선생은 국가 걱정도 함께했다. 어렵고 힘든 경지를 피하지 않고 도전할 때 마다 기도를 하고 자신을 가다듬는다고 했다. 요즘도 수인사에 가서 참선도 하고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