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1,000만 흥행이 던진 화두… ‘제4의 제국’ 가야의 서사도 세계를 울릴 수 있다

3,000여 년 전 지중해를 무대로 한 고대 서사가 세계인을 사로잡다… “고대사는 낡은 이야기가 아니다” 철과 바다, 연맹과 전쟁, 수로왕과 허왕후… 가야에는 한국판 글로벌 대서사의 원형이 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율적 정치체들의 연맹’… 중앙집권 국가와 다른 가야의 독특한 문명 가치

2026-09-26     최문복 지역기자
gemini 생성.

■ ‘오디세이’ 천만 관객… 3,000년 전 이야기가 왜 지금도 통하는가

3,000여 년 전 지중해 세계를 배경으로 한 고대 서사가 2026년 한국 관객 1,000만 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지난 9월 6일 국내 개봉 33일 만에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놀란 감독 작품으로는 《인터스텔라》에 이어 두 번째 ‘천만 영화’이며, 외화로는 4년 만에 천만 관객을 기록한 작품이다.

9월 11일 기준 국내 누적 관객은 1,039만 명을 넘어섰고, 세계적으로도 약 16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리며 2026년 글로벌 극장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목할 점은 이야기의 ‘새로움’에만 있지 않다.

영화가 다루는 핵심 소재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고대 그리스의 서사다.

트로이 전쟁과 오디세우스의 귀환이라는 오래된 이야기가 첨단 영상기술과 거대한 스크린, 현대적인 연출을 만나 다시 세계인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결국 《오디세이》의 흥행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오래된 역사는 낡은 콘텐츠인가?”

답은 NO다. 잘 만들어진 고대사는 시대를 초월해 가장 강력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 ‘제4의 제국’ 가야…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정치체가 만든 독특한 문명

오늘날 흔히 ‘가야연맹’이라고 부르는 가야는 처음부터 하나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다.

유네스코가 2023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가야고분군(Gaya Tumuli)’ 역시 가야를 여러 정치체가 공통의 문화적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각각의 자율성을 유지했던 독특한 고대 동아시아 문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들이 서로 정치적으로 동등한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공통된 문화를 공유했고, 주변의 중앙집권적 국가들과 공존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역학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했다고 설명한다.

이 점은 가야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가야는 신라·백제·고구려와 같은 중앙집권 국가의 역사 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명이다.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등은 각자의 세력권과 자율성을 지킨 채 때로는 철기 무역을 위해 손을 잡고, 때로는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각자의 외교적 선택을 내렸다.

중앙집권적 제국만이 정답으로 여겨지던 고대사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율적 소국들의 연대와 공존’이라는 가야만의 정체성은 서로 다른 정치체들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문화권을 형성한 독특한 정치·사회 시스템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3,000년 전 그리스 폴리스 연합의 서사만큼이나 글로벌 관객들에게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될 수 있다.

■ 철을 지배하고 바다를 건넌 사람들… ‘철의 왕국’ 가야

가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철과 바다였다.

철은 단순한 산업자원이 아니었다.

농기구, 무기, 갑옷과 마구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철 자체가 국제교역의 핵심 상품이었다.

가야는 철을 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으며, 다시 그 철을 바닷길을 통해 외부 세계와 교역했다.

실제 가야 유적에서는 일정한 크기와 형태로 만들어진 덩이쇠가 다량으로 출토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지역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처럼 사용됐으며, 가야가 철을 중심으로 낙랑·중국·일본은 물론 한반도 여러 지역과 교역하며 남해와 서해, 동해를 비롯해 쓰시마·규슈·긴키를 연결하는 해상 교류망을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가야가 가진 또 하나의 영화적 매력이다.

불타는 대장간에서 쇳물이 흐르고, 완성된 철제품을 실은 배가 낙동강 하구를 빠져나가 남해를 건너 한반도를 넘어 일본열도와 중국을 향하는 장면만으로도 한 편의 대서사가 시작될 수 있다.

■ 수로왕과 허왕후… ‘국경을 넘어선 만남’이라는 글로벌 서사

가야 콘텐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바로 수로왕과 허왕후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김해를 대표하는 역사적 서사로 이어지고 있다.

세부적인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강력한 문화콘텐츠 자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와 설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한 여성이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 가야에 도착하고, 새로운 나라의 왕과 만나 왕비가 된다는 이야기는 국경과 문화를 넘어선 인간의 만남과 러브 스토리라는 보편적 주제를 갖는다.

사랑과 모험, 항해와 정치, 문화교류와 운명이라는 요소가 한꺼번에 들어 있어 세계 영화시장이 좋아할 만한 서사적 요소가 이미 존재하는 셈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과 인도 사이의 문화·경제적 교류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로왕과 허왕후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 설화를 넘어 한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문화적 스토리텔링의 원형으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까지 갖췄다… 이제 남은 것은 ‘콘텐츠’다

가야는 이미 세계가 인정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고분군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해 고령 지산동, 함안 말이산, 합천 옥전, 고성 송학동, 창녕 교동·송현동, 남원 유곡리·두락리 등 7개 고분군으로 구성돼 있다.

유네스코는 가야고분군을 단순한 고분의 집합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들과 공존하면서 독특한 연맹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고대 동아시아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했다.

즉 가야라는 문명의 독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제 과제가 남았다.

세계유산을 보존하는 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세계인이 소비하고 공감하는 콘텐츠로 확장할 것인가?

■ ‘한국판 오디세이’는 없는가?

《오디세이》의 흥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고대사를 현대적인 이야기로 되살리는 힘이다.

그리스 신화에 오디세우스와 트로이 전쟁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수로왕의 건국, 허왕후의 바닷길, 철을 만들었던 대장장이, 낙동강과 남해를 오갔던 항해사,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왕과 장수들, 대가야의 우륵과 가야금, 그리고 마지막까지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가야인들의 이야기 등 결코 뒤지지 않는 자산이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하면 가야는 거대한 글로벌 서사 세계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 OTT 시리즈, 애니메이션, 게임, 웹툰, 메타버스, 공연, 뮤지컬, 역사체험 관광 등 다양한 콘텐츠로의 확장이 가능하다.

예컨대 ‘수로왕과 허왕후’의 국제적 러브스토리, ‘철의 왕국 가야’의 전쟁·산업·교역 서사, ‘가야의 항해’를 다룬 해양 모험극, ‘가야 마지막 왕들의 선택’을 다룬 정치 드라마 등 여러 갈래가 가능하다.

■ 김해가 먼저 나서야 한다… ‘가야 콘텐츠 산업’의 중심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이자 수로왕릉, 허왕후릉,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봉황동 유적 등 핵심 유산이 집중된 김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김해의 가야정책도 단순한 유적 보존과 축제 개최에서 나아가 ‘가야를 하나의 문화콘텐츠 산업으로 만든다’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언론인, 역사 전문가, 영화·드라마 제작자, 게임·웹툰 기획자, 종친회, 관광 및 국제문화교류 전문가가 참여하는 가칭 ‘가야 글로벌 콘텐츠 전략위원회’를 구성하고 장기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특히 수로왕·허왕후 이야기는 인도 아요디야 등 해외 문화교류와 연결하고, 철과 해상교역은 부산·경남·일본 규슈 등을 잇는 동아시아 해양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킨다면 한국과 동아시아, 나아가 인도와 세계를 연결하는 국제적 콘텐츠가 될 수 있다.

■ 고대사를 ‘박물관 안’에서 ‘세계인의 이야기’로

《오디세이》의 천만 관객은 사람이 여전히 수천 년 전의 이야기에도 열광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오늘의 언어로 다시 들려주느냐이다.

가야를 단순히 ‘삼국시대 이전 남부지역의 작은 나라’로 설명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안에는 왕과 왕비의 사랑, 항해와 교역, 전쟁과 외교, 기술과 장인, 음악과 예술, 그리고 생존을 위한 인간의 선택이 있었으며, 이는 충분히 세계인의 이야기다.

‘제4의 제국’이라는 문화적 표현처럼 필요한 것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사실과 설화를 구분하고, 그 위에 상상력과 기술을 더하는 일이다.

《오디세이》가 3,000여 년 전 지중해의 이야기를 2026년 세계인의 이야기로 되살렸듯이, 가야 역시 2,000년 전부터 500년간 펼쳐졌던 이야기를 오늘의 세계로 불러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존재했던 가야의 거대한 이야기를 세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들려주는 일이며, 그 출발점은 가야의 심장 김해가 되어야 한다.

“가야에도 세계를 울릴 오디세이가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세계에 들려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