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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대표하는 9경(볼거리)- 3경 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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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대표하는 9경(볼거리)- 3경 수로왕릉
  • 특별 취재팀
  • 승인 2015.02.05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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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해 문화와 역사

 `명품관광도시 김해`
 `김해를 대표하는 9경(볼거리), 9미(먹을거리),
 `9품(살거리), 9길(걷고 싶은 길)을 소개합니다.

세계적인 화폐 덩이쇠

철의 왕국 가야. 가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 빠짐없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이다.

가야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결코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이 철이고, 또한 가야와 관련된 유물 중에서 토기와 함께 주종을 이루는 게 또한 철기이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철기로 인하여 가야는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한때는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있었다.

 

 

   
 
  ▲ 세계적인 화폐 덩이쇠.  
 

이러한 가야의 철기문화를 반영해 주는 유물들은 무엇이 있을까? 여러 철제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철정, 즉 덩이쇠가 돋보인다.

덩이쇠란 요즘의 제철소에서 만드는 큰 철판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3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부산과 김해지방의 대형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 ․ 예 ․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郡)에도 공급하였다.

당시의 국가들은 이런 덩이쇠를 교역품으로 높은 의의를 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6년 봄 3월의 기록에서도 나오며,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마노스쿠네[斯摩宿禰]는 종자인 니하야[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오색의 채견(綵絹) 각 한 필, 각궁전(角弓箭)과 아울러 철정(鐵鋌) 40매를 니하야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나온 철정을 우리가 아는 덩이쇠와 동일한 것이라 본다면, 당시 백제에서도 널리 만들고 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묻혀있는 대성동고분군에서도 덩이쇠들이 많이 보이는데, 3세기 후반의 고분인 29호분의 경우 피장자가 눕는 공간에 이런 덩이쇠를 깔아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9호분의 피장자는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돈방석과 같은 돈침대에서 저승생활을 보내길 염원했던 걸까?

아람배움터

 

   
 
  ▲ 아람배움터.  
 

아람배움터는 미술, 서예, 교양 등 6개의 전문강의실을 갖추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교육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먼저 아람배움터의 실시되고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키다리아저씨의 상상공작소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키다리아저씨의 상상공작소는 레지오애밀리에를 바탕으로 자율적 사고와 창의적인 소양 함양을 키워주는 미술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현직 작가로 구성된 선생님들과 함께 보다 다양한 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하여 단순한 미술 교육으로써의

기능뿐만 아니라 창의적 사고와 표현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창작 작업실입니다.

키다리아저씨의 상상공작소 말고도 마스터클래스, 예술교육기획프로그램, 예술이론 감상 프로그램, 미술아카데미, 음악 아카데미,

전통 무용 아카데미, 어린이 미술 감상 통합 프로그램, 어린이 음악 무용아카데미, 어린이 방학 특강, 예술로 만나는 토요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봉황대에 얽힌 비극적인 결혼 전설

 

   
 
  ▲ 봉황대에 얽힌 비극적인 결혼 전설.  
 

봉황대는 김해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구릉으로, 동남쪽으로는 회현리 패총이 있는 구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가라대, 망해대, 여의현, 독현, 회현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봉황대라는 이름은 조선 고종 초의 부사 정현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봉황대는 인근에 패총과 주거지 등 가락국 당시의 다양한 유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1975년에는 출여의낭자(出如意娘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여의각(如意閣)이 세워졌는데 매년 여의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 때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현 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습니다.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에서 멱을 감게 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습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오게 되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습니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당한 여의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편 유민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이라고 불리는 돌문이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인 여의좌, 그리고 망견대, 여의목, 황세목, 소변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

 

   
 
  ▲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놀이를 하여 수로왕을 사모하는 일이 있었다. 매년 7월 29일에 백성·서리·군졸들이 승점 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 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 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놀이를 하는 날짜가 매년 7월29일이고 하였는데, 설화 자체에서는 그 날짜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수로왕이 유천간)과 신귀간에게 망을 보며 기다리게 한 것이 7월27일이고, 수로왕이 허왕후와 함께 환궁한 것이 8월 1일인데,

그 이전에 두 사람이 동침할 때 맑게 갠 밤을 두 번 보내고 대낮이 한 번 지나갔다고 하였으니, 허왕후가 도착한 날이 7월29일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해 김해평야가 생긴 것은 600여 년 전부터의 일이며, 이전에는 김해시 중심가 바로 남쪽이 바다였음이 밝혀졌다.

이에 이전의 바다 안에 있었다는 섬인 전산도가 망산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망산도, 즉 전산도는 조선후기(1861)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로 보아 칠점산과 명지도에 둘러싸인 내해의 작은 섬들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김해시 풍유동과 명법동, 이동에 걸쳐 여러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칠산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수로왕릉

 

   
 
  ▲ 수로왕릉.  
 

이 능은 오래 전부터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능으로 전해져 왔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능묘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였지만 조선 시대 초기에는 능묘가 크게 황폐되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세종 21 년(1439)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이선(李宣)의 건의에 따라 능묘 30 보 주변을 정황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 28년(1446)에는 다시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에 대해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수호구역으로 확대하였다.

왕릉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영남관찰사 허수(許粹)가 상석, 석단, 능표 등의 석물을 시설하여 수축하면서 부터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굴을 당하기도 하였다. 인조 25년(1647)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린 침묘를 개축하였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규모는 길이 22m, 폭 21m, 높이 약 5m이며 봉분의 주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봉분 앞에는 능비, 상석, 장명등(長明燈), 망주(望柱)가 있고 숭선전을 비롯하여 가락루(駕洛樓), 홍전문(紅箭門), 숭화 문(崇化門) 등의 여러 건물과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보이는 수로왕의 장례기사에는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능묘)을 지었다.

높이 일장이고 주위 삼백보로 그곳에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묘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봉분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이 능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능이 실제로 가락국의 수로왕릉이라고 한다면 그 시기는 1세기부터 3세기 사이가 되며 토광묘일 가능성도 있고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이는 왕릉의 도굴기사로 보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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