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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대표하는 9길(걷고 싶은 길)- 1길 해반천과 가야의 거리(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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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대표하는 9길(걷고 싶은 길)- 1길 해반천과 가야의 거리(2km)
  • 특별 취재팀
  • 승인 2015.08.05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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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관광도시 김해`
 `김해를 대표하는 9경(볼거리), 9미(먹을거리),
 `9품(살거리), 9길(걷고 싶은 길)을 소개합니다.

경상남도가 선정한 경남의 걷고 싶은 길

김해 해반천과 가야의 거리 금관가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활속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길! 김해시는 금관가야의 발상지로써 2000년부터 시가지 전역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가야문화의 주요 유적지들을 연결하는 가로공원의 성격으로 가야의 거리(봉황동~구산동, 2.1Km :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100선의 하나)를 조성, 찬란했던 가야해상무역의 영화를 간직한 해반천(구시가지의 중심하천)의 하나로 하천 정화와 함께 걸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수로왕릉 돌담길

요즘같이 좋은 날씨에 추천해 주고 싶은 데이트코스가 있다.

바로 수로왕릉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반기는 돌담장 한적하고 고즈넉한 돌담장이다. 돌담장을 따라 걸어가는 쭉 늘어선 이 돌달김은 서울 광화문의 돌담길을 연상시킨다.

연인들이 서울의 광화문 돌담길을 걸으면 이별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던데..수로왕와 허왕후가 잠들고 있는 이 왕릉돌담길은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을까.

듬직한 돌벽으로 금관가야 시대와 현대의 김해를 분리해놓은 돌담길, 같은 공간이만 시대에 따라 느껴지는 감흥은 무척 다를 듯 가야시대에는 이곳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데 그 시절에는 이 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는지..오늘은 왠지 더 궁금해진다.

가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길 '해반천과 가야의 거리'

김해의 가야의 거리는 해반천을 따라 인근 대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금관가야라는 독특한 역사를 소재로 특성화하여 2005년도에 연지공원~전하교까지 총 2.1km의 구간에 걸쳐 조성했다.

김해의 가야의 거리는 해반천을 따라 인근 대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금관가야라는 독특한 역사를 소재로 특성화하여 2005년도에 연지공원~전하교까지 총 2.1km의 구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김수로왕을 비롯 6가야의 시조왕이 태어났다는 구지봉을 시작으로 김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수릉원,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 고분박물관, 패총으로 널리 알려진 봉황대유적 등 가야 역사와 관련된 시설이 벨트화되어 있어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가야 역사에 대한 내용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옛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성동 고분박물관

대성동유적은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龜旨峰)과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접하여 김수로왕릉이 있다. 즉, 공설운동장의 바로 북쪽 뒤편에 표고 22.6m의 '왜(애)꼬지'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경성대학교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금관가야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명되었다.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는 왕 묘와 이에 상응하는 지배자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의 무덤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유적의 발굴은 경성대학박물관이 1990년 6~7월, 1990년 9월~1991년 4월 등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다.

1차에서는 4세기 말~5세기 초 본가야(금관가야)의 왕급 무덤 2기(基)를, 2차에서는 3세기 후반~5세기 전반에 이르는 다수의 왕후묘(王侯墓)가 포함된 37기의 각종 분묘를 발굴조사하여, 한국 고대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4세기 전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가야 문화를 만나는 곳, 국립김해박물관

1998년 7월 29일, 국립김해박물관은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加耶)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개관하였다.

가야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龜旨峰)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문화재를 집약 전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부산·경남지역의 선사시대의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건물 전체를 검은 벽돌로 외장하여 철광석과 숯의 이미지로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시Ⅰ실과 전시Ⅱ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시Ⅰ실에는 울산 검단리 마을유적과 창원 다호리 1호무덤의 모형이 있고 가야 문화의 기반이 되는 선사시대와 변한 및 전기 가야를 대표하는 금관가야 유물이 총망라되어 있다. 전시Ⅱ실에는 각 지역별로 형성된 가야 문화의 독창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길목엔 현재에서 과거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타임캡슐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있으며, 약 13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국립김해박물관의 의의 *

가야의 역사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으로 잘 남아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의 실체는 대부분 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적 방법으로 찾아진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복원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김해박물관은 고고학 중심의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어 있다.

김수로왕릉과 수릉원

 

 
   

* 김수로왕이 잠들어 있는 곳, 수로왕릉 *

수로왕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48년 인도의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으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능의 경내에는 수로왕, 수로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등 여러 건물과 신도비, 공적비 등 석조물이 있다.

능 앞의 묘비는 조선 인조25년(1647)에 세운 것이며 숭선전은 고종 21년(1884)에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수릉원*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군 사이에 있는 숲으로 수로왕과 허왕후가 함께 거닐었던 정원과 같은 이미지로 수로왕릉과 가야왕들의 묘역인 대성동고분군을 이어주는 단아한 숲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수릉원은 구 공설운동장부지로 인해 가야시대의 중요 문화재인 수로왕릉과 가야왕들의 능역인 대성동 고분군, 봉황동유적의 환경을 단절시키고 있어 그 자리에 야트막한 능선으로 조성하여 재래수종과 소나무 등을 심고 유적 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면서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을 테마로 한 생태공원으로 39,600㎡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수릉원의 다양한 조경 이야기*

동쪽 마운딩에 설치한 산책로는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서 구실잣밥나무와 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등 곧게 뻗은 나무를 심어 남성의 느낌이 들도록 하였으며, 정상에는 신단수 (팽나무)를 식재하였고 서쪽 출입문은 대성동 고분군을 지나 허왕후를 위한 공간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에는 신이대를 심고 주변에는 야생감, 돌배, 살구, 개복숭아 등 열매를 맺는 유실수를 심어 여성의 느낌이 들도록 했다.

언덕에는 허왕후의 고국인 인도불교를 상징하는 피나무 군락을 조성했다.

과거 공설운동장을 역사로 간직하기 위해 중앙에 가야의 한마당을 조성해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의 장소로 다양한 축제행사와 공연, 시민놀이마당 등의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운동장 역사를 잘 증명해 줄 수 있는 상징적 건물인 본부석을 리모델링하여 전망대로 꾸몄다.

해상왕국인 가야를 표현하고 수로왕과 허왕후가 거닐었던 정원의 연못을 구상해서 조성하였으며, 옛 가야시대 습지에서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등을 식재했다.

가마인물형토기

 

 
   

받침대에는 약간의 돌대가 있는 2단의 띠가 둘러싸고 있고, 띠의 아래위에 수직으로 투공(透孔)을 배치되어 있으며, 투공 사이에는 거치문(鋸齒文)이 장식되어 있다. 네모진 받침의 네 모서리에 말의 네발이 놓여 있고 말은 마갑(馬甲)을 착장하고 있는데 마갑은 장방형의 판으로 엮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말의 목에는 삼각형 무늬가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고 두 귀 사이에는 영수(纓穗)가 묘사되어 있으나 앞부분은 파손되었다.

말 등에는 무장을 한 인물이 바퀴모양 등자(鐙子)에 두 발을 얹고 있다. 인물의 몸체는 갑옷으로 감싸져 있으나 갑옷의 형식은 판별하기 어렵다.

경갑(頸甲)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경갑과 비슷한 형식이다.

인물은 이마 앞으로 뻗어나온 챙이 둘러져 있고 정수리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다른 출토례를 볼 수 없어서 그것이 투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른손에는 길다란 둥근 막대기를 쥐고 있는데 앞쪽이 잘리고 왼손에는 큼직한 방패를 들고 앞을 가리고 있다.

방패의 앞면에는 한 가운데 평행으로 능형의 구획이 그어져 있고 그 주변에는 사선이 나란히 채워져 있다.

인물의 등뒤에는 파손된 막대기가 붙어 있는데 그 정확한 용도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시 그 뒤로는 각배(角杯)가 쌍으로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데, 이단의 테를 두르고 사이에 사격자문(斜格子文)을 새겼다.

이렇게 완벽하게 찰갑(札甲)과 마구(馬具)를 착장한 말과 인물이 빼어난 솜씨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토기의 인물의 복식이나 자세, 그리고 말이 착장하고 있는 마구를 통하여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들의 용도를 밝힐 수가 있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말모양토기는 인물이 없이 말 단독으로 방형의 받침 위에 서 있는데 등뒤는 원통형의 용기 모습이 표현되어 가운데가 빈 형태가 되고 호암미술관 소장품의 경우는 둥글고 투창이 있는 받침의 앞뒤로 네 발이 있고 등은 그냥 네모로 뚫려 있다.

신라의 유물 가운데 상형(象形)토기의 두드러진 예는 적지 않으나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야의 토기로서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특별한 예로서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기마인물형토기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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