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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國의 佛敎 傳來 문제와 성격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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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國의 佛敎 傳來 문제와 성격에 대한 검토
  • 석길암(금강대)
  • 승인 2016.02.19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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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의 숨결 가야문화 학술대회가 `가야문화 원형의 탐색과 콘텐츠화`를 주제로 지난 16일 가야대학교 대강당 국제 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김해 여여정사가 주최하고 동명대학교 문화 융ㆍ복합 콘텐츠 연구소가 주관했으며 가야대학교가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는 제1발표: 가야불교 전래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황정일 박사ㆍ보조사상 연구원, 기획실장) 제2발표: 불교의 가야 전래에 대한 일연의 인식과 가야불교의 성격(석길암 교수ㆍ금강대학교) 제3발표: 기원 1~3세기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한지연 교수ㆍ금강대학교) 제4발표: 가야시대 부산지역 불교에 대한 예비적 검토(이근우 교수ㆍ부경대학교, 부산경남 사학회 회장)가 발표를 했다. <편집자 주>


가락국 혹은 금관국의 불교 전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불교의 전래 여부부터 불교의 전래시기 그리고 확산과 그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학계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는 우선 가락국 불교 전래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또한 불교의 전파가 실크로드를 거치는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만 바라보는 관점상의 통념 때문에 남방 해상 루트를 통한 가락국의 불교 전래 관련 기사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가락국의 불교 전래와 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가락국의 불교 전래와 그 성격을 검토함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첫째, 당연한 수순이긴 하지만 가락국 불교 전래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이자 원천이 되는 기록이라고 생각되는 '삼국유사' 소재 관련 기사들을 먼저 검토하고자 한다.

그런 연후에 그 기사들의 서술을 통해서 가락국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 일연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할 예정이다.

이것은 가락국 불교 전래 관련 원천 자료를 독해하는데 있어서 서술자의 관점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그 기사를 다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련기사를 채록한 일연의 관점을 파악함으로써 그 안에서 원천적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가락국의 불교 전래에 관한 선행 연구들의 견해를 검토한다.

이것은 원천 기사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관점과 일연의 인식 사이에 나타나는 동이를 통해서 새로운 시사점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원천 기사에서 우리가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곧 '삼국유사' 소재 관련 기사들은 正史의 기록이 아니고 게다가 후대에 덧붙여진 전승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기 때문에 애초의 가락불교 전래 사실을 전하는 원천적인 요소는 어떠한 것인지를 확정하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째의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는데, 일연의 관점을 연구자들이 어떻게 독해했는가와 일연의 관점 사이에 나타나는 동이점을 통해서 일련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들 선행 연구들에서 보이는 시각들, 특히 허왕후 도래와 불교전래를 연관시키는 문제에 대한 선행 연구의 몇몇 부분이 보이는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락국의 불교 전래 사실과 그 성격의 문제를 일반적인 북전불교의 경우와 비교하여 검토하는 과정을 밟아가고자 한다.


▲ '가락국기' 조에 나타난 가락국 불교전래 관련 기사와 일연의 인식

'삼국유사' '기이(紀異)'편 '가락국기(駕洛國記)'조와 '흥법(興法)'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서는 가락국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관련 기사들을 제시한다.

a)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b)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c)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했다.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짓고,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하였다.

d)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이것은 阿道와 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본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a)~c)의 기사는 「가락국기」조의 기사이고, d)는 「금관성파사석탑」조의 기사이다.

a)의 기사는 수로왕이 도읍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의 발언인데, 그 가운데 불교적 표현이 나타난다. 곧 16나한이나 칠성(七聖) 등이 그것이다. 이들 불교 관련 어휘에 대해서는 후대에 기록하는 시점의 불교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선행 연구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7성(聖)의 문제이다. 뒤에서 다시 업급하겠지만, 이 칠성(七聖)은 후대의 관련 사찰들의 연기설화에서 끊임없이 칠불(七佛)이라는 형태로 반복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b)와 c)의 기사는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에 의해 왕후사가 원가 29년(452)에 창건되었다는 기사이다. 이 두 기사는 '가락국기'의 본문과 덧붙인 세계의 기사이지만 거의 동일하다.

다만 허왕후에 대하여 b)는 황후라고 칭하고 c)는 왕후라고 칭하고 있어서 두 기록의 원전이 다름을 보여준다. 세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개황력(開皇曆)' 혹은 '개황록(開皇錄)'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금관주지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었다는 '가락국기'를 채록한 앞 부분과 달리 덧붙인 세계 부분은 '개황력(開皇曆)' 혹은 '개황록(開皇錄)'을 참고하여 채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 역시 이미 선행 연구에서 지적되어 있다.

어쨌든 이 두 부분에 대한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의 채록은 서로 다른 두 시기의 기록을 참고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개황력’ 혹은 ‘개황록’이라는 명칭의 ‘개황(開皇)’은 수나라 문제의 연호이다.

따라서 수 개황연간에 해당하는 진평왕대에 편찬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점에 대해 김태식은 왕후라는 명칭이 고려시대에 와서 보편화되는 것이고 신라에서 왕후라는 명칭이 중대 이후에야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부인(夫人)’의 칭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개황록' 역시 신라 중대 이후에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왕후사’라는 고유 명칭의 특성상 왕후사의 창건 연대 역시 7세기 중반 이후인 신라 중대로 내려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서명인 '개황록(開皇錄)' 혹은 '개황력(開皇曆)'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서명이 보여주는 성격상 개황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정 짓는 것은 곤란하지만, 필자가 볼 때는 서명의 성격상 오히려 개황 연간 곧 진평왕대에 '개황력'이 서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더구나 ‘왕후’라는 명칭이 신라에서 중대 이후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가야에서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신라 위주의 인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최근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던 미륵사지 사리봉영기에서는 ‘百濟王后’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가락에서 ‘왕후’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며, 그것이 사찰 이름으로 반영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d)의 기사는 '금관성파사석탑'조의 기사인데, '가락국기'의 김질왕 대의 왕후사 창건 관련 내용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다음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d-1)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d-2)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阿道와 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본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첫 번째 부분은 파사석탑은 허왕후 때 전해졌는데, 왜 절이 세워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일연의 해석이다. 그때까지 해동에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절을 세우는 일도 없었다는 해명이다. 다시 말하면 탑은 전해졌지만, 불교가 전해져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절을 세울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전래는 되었지만 수용은 되지 않았다는 이해로 볼 수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일연의 설명은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질지왕 2년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를 세워 '이것은 阿道와 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고 한 부분이 핵심이 된다.

내용상 절이 하나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두 곳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왕후사만 창건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곳의 사찰이 더 세워진 것이 일연의 채록 기록에 나타나는 것이다. 중간의 세주 부분은 절의 창건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보다 더 빠른 시기임을 부기한 것이다. 이 세주에 의해서 일연이 가락국의 불교 수용이 신라보다 더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가락국의 불교 전래 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의 양상과 간과된 문제들

1) 기존 연구의 양상
가락국의 불교전래와 관련해서는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다. 특히 이들 견해는 많은 경우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와 '금관성파사석탑'조의 해석과 관련하여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광수는 “가락국기의 수로왕 신화는 수로왕이 활동하였던 당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상당한 부분이 가락국의 늦은 시기, 또는 멸망 후에 만들어진 설화나 지방 전승들이 불교나 인도에 의탁되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영식의 견해를 전제로 이 “확대 재생산된 허황후 설화가 1970년대 이후 일부 학자들의 무책임한 가설 남발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연구의 양산 그리고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인 띄우기 등의 영향으로 인해 보다 심화되”었으며, “이후 일부 학자들은 이종기나 김병모의 가설을 아무런 검증 없이 따르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를 그것이 달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오해하여 설화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경향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가락국기에 처음 나오는 허황후 설화는 고대의 다른 설화와는 달리 그 확대 재생산된 정도와 양상이 매우 크고 활발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설화 속의 ‘아유타국’ 모티프로 인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허황후는 원래 고대 신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물에서 올라오는’ 지모신이었으나 ‘아유타’ 모티프가 삽입됨으로써 설화가 크게 변화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광수의 정리를 따르자면 가야에 불교가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현전하는 설화 즉 허황후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데, 신라 중대에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의 약진을 배경으로 결혼 모티프가 만들어지면서 가락국 건국신화의 정당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러한 작업을 맥락으로 수로신화를 비롯한 가락국의 역사가 문자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아유타란 명칭의 삽입 역시 나말여초에 가까운 시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같은 이광수의 정리는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친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부정적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견해는 가락국 건국신화의 원형적 요소를 천손강림신화와 지모신의 결합으로 보고 인도 관련 요소와 불교 관련 요소를 모두 신라 중대 이후의 부연으로 간주한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견해는 같은 저자의 1993년 논문에서 “인도의 문화 개념이 동아시아에 일찍부터 전파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가야와 인도 본토와의 접촉 가능성도 동남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낮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견해로 생각된다.

어쨌든 허황후 관련 설화와 불교전래를 연관 짓는 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삼국유사' 소재 기사와 관련하여 조원영은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곧 첫째는 파사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으로서 허황옥이 올 당시에 이미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견해(허명철, 정수일).

둘째 이 석탑이 허황옥에 의해 전해지기는 했지만 가야불교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김영태, 三品彰英).

셋째 가야국 초기에 불교를 전하는 석탑으로서의 기능은 담당하지 못했더라도 후대에 가야의 불교 전래국이 인도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라는 입장(홍윤식)의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원영(2008)은 파사석탑의 문제와 관련하여 “5세기 중반의 왕후사 창건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질지왕대에 허왕후의 명복을 비는 절을 세우면서 본래 그녀가 불교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꾸민 연기설화로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김영태(1990)의 경우 허황옥의 도래시에 불교를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왕후사의 창건이 가야의 불교수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은 수긍하고 있다.

또 특히 눌지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는 묵호자(墨胡子)의 신라 활동 시기와 왕후사의 창건 시기가 겹치는 점 묵호자의 이름으로부터 인도 혹은 동남아 계통의 승려였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판카즈 모한(班固志, 2009)은 허황후 도래설과 가야불교 남방전래설을 7세기 곧 신라중대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가야왕실이 왕후사 창건을 기점으로 불교를 공식 후원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영섭은 김영태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더하여 왕후사 창건을 전후하여 전래된 불교가 아비달마불교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권주현(2009)의 경우는 왕후사가 원래는 왕후사(王后祠)였을 것이며, 그것이 사당에서 사찰로 바뀐 것이 신라 중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연구사 검토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가락국 건국 당시에 불교가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적어도 최근에는 거의 주장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후사 창건을 전후한 불교 수용과 가락국 건국신화가 인도문화 혹은 인도문화를 중개한 동남아시아 문화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접촉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간과된 문제들

앞에서 본 것처럼 선행 연구의 일부에서는 '가락국기'조와 '파사석탑'조의 불교 전래 관련 기사들을 적극 부정하는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쨌든 선행연구의 많은 부분들은 '가락국기'의 내용이 신라 중대에 김유신 등의 가락국 계통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심하게는 왕후사의 창건 역시 신라 중대에 이루어진 사실로 보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견해들은 '가락국기'조와 '파사석탑'조에 나타나는 아유타국 관련 기사 역시 신라 중대에서 고려 초 이전 사이에 부가된 내용으로 불교를 매개로 하여 아유타국을 인도를 상징하는 매개지명으로서 부가 삽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우선 신라 중대에 가락계통의 계보를 대표하는 세력에 의해 가락국건국신화의 정당화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고려 전기의 「가락국기」 서술로 계승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신화의 내용에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에 대해서는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가락국기'는 그 성격상 온전히 신화적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곧 년대를 명기하여 기록하고 있는 왕후사의 창건은 '가락국기' 내에서도 신화적 요소라기보다는 역사적 요소에 가까운 기술에 해당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시기까지는 신라보다도 훨씬 더 대외교역 활동이 활발했던 것이 가야였음을 고려한다면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의 불교 전파 상황상 5세기 중엽에 이를 때까지 활발한 대외교역 국가였던 가야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서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존재했던 왕망의 신(新)에서 주조한 화폐인 화천(貨泉)이 발견되는 두 지역이 바로 평양의 낙랑유적과 가락국이 위치했던 김해 회현동패총이다.

곧 기원 직후부터 1세기 사이에 가락국이라는 뚜렷한 실체를 가진 왕국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에 중국-한반도 북부 평양지역-김해-일본 내의 화천 발견지역으로 이어지는 교역망의 중간에 김해가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의 가락국 지배세력의 양상을 보여주는 대성동 고분군은 풍부한 철을 매개로 중국, 한반도 북방,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고 같은 시기 신라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으로 앞선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미 지적되어 있다.

곧 적어도 전기가야연맹이 몰락하는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직전까지 가락국이 동북아시아 내에서의 해상을 통한 활발한 교역활동에 참여한 것을 감안할 때, 고구려와 백제가 이미 공인했던 불교를 접하지 못했다고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추정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연이 '파사석탑'조에서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4세기 후반 무렵의 가야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곧 '가락국기'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허왕후의 도래년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4세기 초에서 4세기 후반 사이에 가락국에 불교가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 가락국의 교역양상으로 보면 오히려 더 적절할 것이다. 곧 일연이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불교가 전해졌는데 수용은 되지 않았다고 기록할 만한 개연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왕후사’의 창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있다. 그 핵심은 왕후사의 명칭이다. 신라 중대 이전에는 신라에서는 왕비를 왕후라고 부르지 않고 ‘부인(夫人)’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왕후사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 중대 이전에는 나타날 수 없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은 지나치게 신라와 김유신 가계를 의식한 데서 나온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신라 중대에 가까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미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는 ‘百濟王后’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곧 신라에서는 중대 이후에 사용되지만, 백제는 그 이전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곧 가락국의 왕후사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의 기준에 의해서 년대 획정의 표준으로 적용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곧 설화의 확대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유타국’, 곧 건국신화에서 제시된 허황옥의 인도 출자지명이다. 대부분의 분석에서는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모티프가 불교를 매개로 하여 덧대어진 요소이고 이것이 다시 불교적 요소를 확대재생산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간주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그런데 신라시대는 물론 불교사나 역사 기록 어디에서도 아유타라는 지명이 인도 혹은 천축을 대표하는 매개 개념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은 간과된다.

적어도 동아시아 혹은 한국에서 그리고 이 지역의 불교에서 아유타가 인도를 매개하는 상징적 지명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은 아유타라는 지명 자체가 불교 혹은 인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도입된 요소는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그 지명으로서의 아유타는 아주 구체적인 지명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도 역시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통일신라 이후의 사람들이 인도의 지리적 개념에 대해 무지하다는 인식이 선행연구에는 강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쉽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간의 항로가 열려있는 상황에서 신라인들의 천축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겨우 불교만을 매개로 한 것이라는 추정은 오히려 지나치게 소극적인 견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출자지가 신라 중대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라면 훨씬 더 세련되고 당시의 사람들이 불교국 인도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만한 지명을 사용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유타라는 지명 모티프의 등장이 불교를 매개로 불교국 천축을 상징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것이 허왕후의 도래에 의한 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아유타라는 지명을 매개시킬 구체적인 사실이 신화의 이면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가락국기'를 분석한 많은 선행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가락국기의 허황후 도래 신화는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이 많고 이례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중국물산이 등장하거나,그것을 정리하여 창고에 넣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곧 여타의 신화들과는 달리 가락국의 교역 양상을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신화의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사항들은 곧 중국물산의 경우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등장하는 허황옥이 중국의 물산을 가지고 오는 오히려 모순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모순된 요소들이 신화화된 사례의 구체적인 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가락국기'의 원형이 된 신화의 정당화 작업, 곧 신라 중대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는 이 정당화 작업은 치밀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신화 내에서 이것에 대해 구체적인 해명을 가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덧붙여지는 과정에서 잉태된 모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사실적 요소가 신화적 형태로 결합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영된 모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어쨌든 기원 전후 시기부터 4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의 김해 지역 유물들이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한번 신화가 사실을 반영할 가능성을 적극 고려해볼 필요성이 발생한다.

▲ 전래된 불교의 성격

더 정확하게는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아니라 수용된 불교의 성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검토를 고려하였을 때 왕후사 창건 이전에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왕후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가락국 나아가 가야연맹체 내에 불교가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특이한 것은 공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인데, 왕후사의 창건이 왕실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이것 자체를 곧 공인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삼국의 경우 불교의 수용과 공인이 일반적으로 율령의 반포로 이어졌는데, 가야불교에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인지 그런 과정을 확인하기 힘들다. 아마도 5세기 중반의 가야연맹체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힘든 양상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현재로서는 확정하기 곤란하다.

어쨌든 왕후사의 창건은 늦어도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가야에 불교가 전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수용된 가락불교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료가 많지 않은 지금으로써 역시 추정에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몇 가지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 불교의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국가불교의 성격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공인 이후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 확연한 모습은 보기 힘들다.

어쨌든 왕실의 조상 추선을 위한 사찰 건립에서 미약하지만 국가불교적 성격의 한 측면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파사석탑'조에서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본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는 기록 역시 그런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만 이 대목이 신라 때의 일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락불교의 성격을 유추하는 일단편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확정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는 힘들다.

두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파사석탑」조에 보이는 불연국토(佛緣國土) 의식이다. 파사석탑 자체가 인도에서부터 왔다는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불교의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불연국토(佛緣國土) 의식을 반영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두 가지 특징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강약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단히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왕후사의 창건을 전하는 기사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상숭배와 삼보에 대한 숭신 정도가 정보의 전부이다.

따라서 다른 정보를 추가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현재로서는 왕후사 창건을 전후하여 가락국에 전래된 불교가 동아시아 불교의 일반적인 전파 사례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단언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로 언급할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김영태(1990)의 지적, 곧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신라 일선군에 와서 전법했다는 묵호자의 사례이다.

김영태는 묵호자의 출자 및 신라 일선군으로 들어온 경로를 가락국과 낙동강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묵호자의 출자로 인도 혹은 사자국 곧 스리랑카를 포함한 동남아였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왕후사 창건과 시기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묵호자가 왕후사 창건 전후에 가락국에서도 할동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만약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등의 사례를 비롯하여, 한국불교 전래 초기에 인도 혹은 동남아 불교와의 이른 접촉 역시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경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북방대승불교의 일반적인 성격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추정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 지금까지 '가락국기'조와 '파사석탑'조를 중심으로 가락국의 불교 전래와 성격을 둘러싼 논의를 검토해 보았다.

이 기록들을 채록하고 있는 일연 자신은 허왕후의 도래와 함께 불교가 전해졌지만, 수용되지는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가락 불교의 수용은 왕후사의 창건을 기점으로 한다고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학계에서의 최근 논의는 허왕후 도래시에는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으며 왕후사 창건을 전후하여 불교가 가락국에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성립에 신라 중대 의 정치세력 및 이후의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가락국의 불교 수용에 대해 대단히 보수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입장의 둘로 나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논자는 가락국의 불교 전파와 수용은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전파의 사실 자체는 왕후사 창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것은 4세기 말 무렵까지 가락국이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도 공인 연도만 372년과 384년일 뿐이며 공인을 위한 인지과정을 포함한다면 불교의 전파 자체는 그보다 반 세기 정도는 올려 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사천성을 기점으로 하여 양자강을 따라서 불교 유물이 새롭게 보고되면서 중국의 여러 연구들에서는 육로인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의 전파 못지않게 인도-미얀마-사천성/인도-교지-중국남부로 전해진 동남아시아를 통한 불교의 전파시기를 올려잡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따라서 이른 시기에 불교가 사천성에서 양자강을 타고 동점해나가는 상황과 동남아시아 해상 교역로를 따라 중국 남방으로 전해지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왕후사 창건을 기점으로 하는 수용 시기와는 무관하게 가락국의 불교 전래시기 자체는 어느 정도 상향해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허왕후로 상징되는 도래세력과 아유타의 연결을 굳이 불교를 매개로 한 상징의 부가적인 삽입으로 보는 시각을 지양한다면 다양한 문화교류의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1세기 전중반에 이미 중국, 한반도 북방 및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망에 김해 지역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가락국기'의 적극적 해석에 굳이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駕洛國의 佛敎 傳來 문제와 성격에 대한 검토'에 대한 논평

윤종갑(부산대)

이 글은 “「가락국기」조와 「파사석탑」조를 중심으로 가락국의 불교 전래와 성격을 둘러싼 논의를 검토”한 것으로, 발표자는 검토 결과 “일연 자신은 허왕후의 도래와 함께 불교가 전해졌지만, 수용되지는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가락 불교의 수용은 왕후사의 창건을 기점으로 한다고 파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 학계의 선행 연구, 즉 “허왕후 도래시에는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으며 왕후사 창건을 전후하여 불교가 가락국에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성립에 신라 중대의 정치세력 및 이후의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가락국의 불교 수용에 대해 대단히 보수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두 입장으로 정리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가락국의 불교 전파와 수용은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한다.” “전파의 사실 자체는 왕후사 창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것은 4세기 말 무렵까지 가락국이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허왕후로 상징되는 도래세력과 아유타의 연결을 굳이 불교를 매개로 한 상징의 부가적인 삽입으로 보는 시각을 지양한다면, 다양한 문화교류의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발표자는 일연의 「가락국기」에 나타난 불교 관련 내용에 대해 “굳이 부정적일 필요는 없”음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은 「가락국기」조와 「파사석탑」조를 중심으로 논의된 기존의 학설들을 발표자의 입장에서 잘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논평자가 특별히 의견을 달리 하는 부분은 없다. 그리고 기존의 학설에 바탕하여 발표자가 제시한 내용도 이미 학계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내용들이며 극히 절제된 조심스런 제언들이기 때문에 논평자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단지 논의를 보다 진척시킨다는 의미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발표자는 가락국의 불교 전파와 수용은 달리 보아야 하며 불교 전파는 ‘왕후사 창건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 근거로 “4세기 말 무렵까지 가락국이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가락국의 불교 전파는 해상 교역으로 인한 그 결과인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이 문제는 가야 불교의 전래 루트가 해상이냐 아니면 육상이냐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었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발표자의 견해를 알고 싶다.

둘째, 발표자는 “허왕후로 상징되는 도래세력과 아유타의 연결을 굳이 불교를 매개로 한 상징의 부가적인 삽입으로 보는 시각을 지양한다면, 다양한 문화교류의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허왕후의 도래가 문화교류의 한 측면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허왕후의 도래는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으로 파악하여 접근하고자 하는 시각도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허왕후 도래에 관한 역사적 팩트인데, 이에 관해 논증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논거로 제시하고 있는 발표자의 해상교역 역시 허황후의 도래에 관해 결정적인 근거로서 인정하기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객관적인 논거가 제시 되어야 할 것 같다.

셋째, 발표자는 이 글에서 가야불교에 관한 성격에 대해 검토하면서 기존의 선행 연구를 검토한 결과 가야불교는 “동아시아의 북방대승불교의 일반적인 성격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할 뿐,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하고 있다. 가야불교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서 사실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역사적 사실로서 가야불교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루트로 통해 전해진 것인지가 확증되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가야불교가 아비달마적 불교(고영섭 주장)인지, 남방 선불교(윤종갑 주장)인지, 발표자가 밝힌 북방대승불교가 아닌 것이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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