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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칼럼...잊히지 않는 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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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칼럼...잊히지 않는 선명
  • 영남방송
  • 승인 2009.02.23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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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목일.  
 
ㅡ잊히지 않는 선명

정목일
수필가 

비 온 뒤 산색은 산뜻하다. 해질녘 산 능선, 사라지려는 노을은 가슴이 저리도록 선명하다. 밟으면 꿈이 깰까봐 비켜가는 달빛 속에 길게 누운 나무의 그림자, 새벽 단잠을 깨우는 긴 여음의 종소리,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 발소리..., 순간적인 것들이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할 때가 있다.

세월이 가면 보든 것이 잊힌다. 기억 창고에 보관된 삶의 편린들도 차츰 퇴색되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시간이란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이나 일도 점점 흐릿하게 만들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인생에 무엇이 선연하게 남아 있을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감성이 무더져 가고 기억들도 퇴식되어 또렷한 게 없어진다. 밤이 깊을수록 더 가슴에 닿아 오던 귀뚜라미 소리, 상상의 공간으로 빠져 들게 하던 밤하늘의 별들에도 무덤덤해지고 만다.

내가 열일곱일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장례식은 시간이 흘려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2년 넘게 자리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남겨 놓고 뜬눈으로 숨을 거두셨다. 내 손을 잡은 아버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어머니는 손으로 아버지의 눈을 감겨 드렸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의 통곡이 터져 나왔을 적에, 나는 이들을 제지했다.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 드리고 싶었다. 경건함 곳에서 잠시라도 아버지를 추모하고, 그분의 일생을 생각하고 싶었다. 드디어 장례식 날이 오고야 말았다. 지척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 이었다. 머리에 수질(首桎)을 쓰고, 손에는 대지팡이를 짚고 상여 뒤를 따랐다.
곡소릴 내야 하건만, 목 안에서만 맴돌 뿐 나오질 않았다. 곁에서 함께 울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안개 속의 세상을 보았다. 사방으로 나부끼는 수많은 물방울의 미립자들은 머리카락과 세포마다 스며들어 속삭여 주고 있었다. "괜찮아!" 안개 미립자들은 내 영혼에 입 맞추며 위로의 말을 들려주었다. 안개 미립자들의 은밀하고 부드러운 말과 촉감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은혜로 남아 있다.

장지에 갈 때까지 안개 속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안개속의 길이 내가 걸어야 할 운명이라고 느꼈다. 어느 쪽으로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 미립자들이 나를 위로하며 배웅해 주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첫 경험이자 인생의 갈림길에 섰던 일이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삶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더욱 선명하다. 사라지는 것과 남아 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쩌면 어느 날의 해돋이나 해질녘의 장면일 수도 있으며, 어느 곳에서 본 한송이 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잊히지 않는 존재이길 바란다. 부모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 연인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잊지 말라'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인생은 만남과 이별로 이루어진다.
모든 생명체는 사라지는 존재이다. '영원'이란 추상명사를 쓰지만, 인간이 말하는 영원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잊지 않는 기억'을 '영원'으로 간주하며 위로를 삼는지도 모른다. 선물을 준비하는 것. 아름다운 곳에서 만나길 바라고, 못 잊을 만한 곳에서 작별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에 잊히지 않는 선명한 이미지가 되기 위함이 아닌가.

잊히지 않는 선명은 감동을 말한다. 그것은 말이 아닌 존재의 빛깔과 표정으로 전달되는 게 아닐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일치를 이루고, 시.공간과 인연이 합쳐지고, 대상과 나의 감성이 일체를 이룰 때 일어나는 일이리라. 생각해 보면 첫 경험과 마지막 경험이 선명하다.

일상에서 선명을 느끼려면 처음이나 마지막 처럼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선명한 것 중에는 끔찍한 사건이거나 악몽 같은 일들도 있지만, 부정적인 기억은 자신의 선업과 덕으로 덮고 지워야 한다. 시간의 강물은 쓰리고 황폐했던 마음 자리에도 망각의 퇴적물을 실어 와 어느새 씨앗을 싹트게 하고 안정을 되찾게 한다.

선명은 진실이 내는 빛이 아닐까. 맑은 영혼이 내는 향기가 아닐까. 내 기억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선명한 장면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한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긴 적이 있었을까. 스쳐 가는 삶 속에 보석 같은 반짝임이 있었을까.

사진첩을 보면서 바래지 않는 삶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도 영원을 수용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요 깨달음이 아닐까.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 퇴색하고 소멸과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지만 인간은 잊히지 않는 선명한 모습으 간직하고 싶어한다.

나도 일생을 반짝이게 할 기억의 보석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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