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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칼럼...김해 서상동 변화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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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칼럼...김해 서상동 변화가 흥미롭다
  • 영남방송
  • 승인 2009.04.03 14: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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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김해 서상동 변화가 흥미롭다

박경용
김해벨라에세이 연구회장



내가 태어난 곳은 지방도시 김해시 서상동으로 한반도 최남단 낙동강의 하구 질펀한 평야가 있고 남해 바다가 넘실대는 곳이다.

이 곳은 신석기시대 부터 원주민이 터를 잡았고 삼한시대에는 변한땅 12국중에서 구야국이 있었다.(위지 동이전)

기원전에는 해안선이 지금의 서상동 부근이었고 김해 도서관 앞에까지 배가 닿았다.그 시대 중국 배들이 이곳 해안에 정박하여 본결과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편두와 문신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인도의 유라시안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을 것이란 증거이기도 하다.

그 이후 북방계의 김수로왕 집단과 남방계 인도의 허황후 계열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결합하여 서기 42년 가야국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계의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적인 힘의 바탕으로 허황후는 10 아들 중에 2 아들을 허씨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때 부터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체구가 큰 인도 유라시아 계열의 사람들이 내왕하고 정착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세월이 흘러 고려시대는 일본 정벌을 위해 몽고군들이 동상동위 서재골의 금강사에 주둔했던 일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지금의 서상동에 동내를 이루어 살았고 나의 유년시절엔 그 일본 사람 동네에 나의 집이 있었으므로 해방되던 7살까지 일본 아이들과 늘 놀며 자랐다.

일본 친구를 따라 그들의 집에가서 안방에서도 함께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집안의 정원에 맥문동 등의 화초, 연못의 비단잉어, 분재, 일본 닛본도, 샤미생 음악, 큰 난로, 요즘의 고급과자인 롤케이크 등 이 생생하게 뇌리에 잡히고 있다.

일본동요 '유야케 고야케데 히카 쿠레데...모모 다로상 모모다로상'하며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6.25사변때는 바로 이웃에 미 군사고문단(kMAG)부대가 있었고 전쟁중이나 직후에서도 그들은 호화생활을 하였다.풀장을 만들어 여름은 수영장을 즐기고 밤에는 영화를 보았다.

당시 아이스 케키 공장을 하셨던 아버지 업체에 크림원료인 크림 파우더를 늘 가지고 와서 크림을 만들어 갔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요즘은 서상동이 외국근로자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어 있다. 아시아 중동지역 러시아 지역 근로자들이 매우 많다.

이 부근에 국고의 지원을 받아 외국인 회관이 들어섰다.

근로자인 러시아 육사출신 세르게이씨를 알게되어 분산성 등반 벨라 행사때 회원님들에게 여러번 소개도 하고 러시아민요 카츄샤의 가사 '위하딜라 나블레카츄샤...' 도 들었다.

토요일 일요일은 거리에서약 50% 이상이 외국인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이처럼 내가 태어난 서상동 번화가는 역사적으로 외국과는 아주 인연이 깊은 동네이다.

꼭 지역 연고만은 아니지만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외국어 학원을 10년이상 경영했던 나였고, 외국친구과 꾸준한 교유를 가졌던 나다. 그러면서도 고향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나자신을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나의 고향에 어떤 나라사람들이 많이 올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사는 이곳은 국제적인 도시로 변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다. 부산. 경남 경제자유지역이 들어선지 5년째,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코리아는 이곳이 상당한 비중으로 변해 갈 것이다.

선진국으로 갈 수록 해양도시가 나라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내고향 가야고도 김해 서상동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지 흥미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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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陽人 2009-04-07 06:15:54
본인이야 녹산 촌구석에서 유년을 보내다 보니 읍내의 일을 잘 모르지만, 우리 또레의 못 사는 집 아이들이 그기서 아이수 깨끼 받아다가 팔았지요. 추억을 불러 오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옛날 이바구 좀 마이 해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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