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일부 언론에 우리나라 과학자가 근거도 없이 노벨상 후보로 등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노벨상을 둘러싼 우리 언론의 이런 ‘호들갑’과 정치권에서 가끔 제기되는 ‘노벨상 프로젝트’ 등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노벨상 콤플렉스’라는 지적을 내놓는다.
과학 부문 노벨상이 한 국가의 기초과학 수준을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초과학의 역사가 짧고 이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부족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노벨상 수상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세계 과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원로 과학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 한국 과학을 이끌어가는 후학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여러 분야에서 독창적인 연구성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신진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있어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국내 과학계는 우리나라에 근대과학이 도입된 이래 세계 과학사에 남을 가장 큰 업적을 이룬 과학자로 1977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故) 이휘소 박사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세계 과학사에 남을 가장 큰 업적을 이룬 우리나라 과학자인 고 이휘소 박사. 이 박사는 베스트셀러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돕다가 미국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보이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지는 핵물리학자로 묘사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지만 그가 현대물리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이 박사의 최대 업적은 ‘약한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 틀을 마련함으로써 현대물리학을 대표하는 이론 중 하나인 표준모형 이론 확립에 기여한 것이다. ‘약한 상호작용’은 원자핵의 방사성 붕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엔리코 페르미가 방사성 붕괴의 원인을 약한 상호작용으로 처음 설명했고, 이것을 중국계 미국인 리정다오와 양전닝이 개선했지만 약력이론 체계는 여전히 많은 모순을 포함한 엉성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박사가 1972년 '미국물리학회지'에 발표한 ‘자발적으로 깨어진 게이지 대칭성’이라는 논문은 스티븐 와인버그 등이 리정다오의 이론을 발전시켜 내놓은 약한 상호작용에 대한 이론이 현재 ‘표준 모형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물리학의 흐름을 바꾼 표준모형 연구에서 이 박사와 함께 주역으로 활동한 많은 동료 과학자들이 그가 숨진 후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업적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이 때문에 국내는 물론 해외 물리학계에서도 이 박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을 것이라 보고 있다.
1979년 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파키스탄 출신의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99년 마르티뉘스 벨트만과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헤라르뒤스 토프트도 시상식장에서 “양자역학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며 그를 기렸다.
아직까지 연구현장을 지키면서 또는 학계의 어른으로 우리 과학계를 이끌고 있는 원로 과학자 중에서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위치에 오른 과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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