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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행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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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행기 (4)
  • 이규순 기자
  • 승인 2009.08.19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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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아래 첫동네 이도백하  (4)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를 원도 한도 없이 만나고 백두산 천지를 '천지삐까리'로 보고 하산하니 여한이 없다. 백번와야 두번 본다는 그 백두산을 경운산악회에서는 단 한번만에 친견을 한 것이다.

연길(延吉 : 이엔지)은 백두산으로 가는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적이 4만 3,547Km2,  인구가 219만 5천명 정도로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40%가 조선족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전에는 북간도라 불렸다. 이후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어 1955년에는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연길, 도문, 돈화, 화룡, 용정, 훈춘의 6개시와 왕칭, 안도 2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도문강, 송화강, 목단강, 소분강 등이 있고 도문강 유역에는 동북아금삭각주 라고 불리는 국제개발지, 훈춘경제개발지가 있다.

조선 말기 우리 민족이 이주 하면서부터 연변은 한반도와 역사를 같이 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독립 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 때문에 청산리 항일전승지, 봉오동 항일전승지, 일송정등 유적지가 많다.

백두산 천지를 하산한  우리 일행들은 '이도백하현'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식사를 하고 백산가일호텔에 짐을 풀었다.백산가일호텔이 있는 이도백하는 하늘아래 첫 동네인 백두산 부근이어서 중국에서도 아직 많이 낙후된 도시이다.

호텔시설도 엉망이고 특히 아직도 온수를 나무를 떼고 석탄을  연료로 하여 물을 뎁히니 하루에 온수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이도백하의 풍경은 우리들의 눈에 그리 낯설지 않다

1960년대의 우리가 살던 시골 풍경 그대로가 아직도 남아있는 곳.  그러나 여기도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져서 인지 개발이 되고 있어서 몇년후에 들르면 지금 시골스런 이 풍경들은 오늘 촬영한 이 사진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시골에서 그나마 이런 호텔이 있음은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필자가 지난 10여년 전에 백두산을 찾았을 때, 여기 이도백하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시골이었다.

미용실의 간판 이름도 '백두산 처녀 머리감는 곳'이다.  그리고 묵은 호텔은 지금은 호텔 이름도 가물거리지만 호텔의 침대는 예전 우리 군용침대와 같은 것으로써 양옆에 스프링이 서로 당겨 주는 것인데 몸만 조금 뒤척여도 찌걱찌걱 소리가 나서 밤새 잠을 뒤척인 기억이 새롭다.

이런 시골이었는데 정말 놀랍게 발전하며 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중국의 발전이 곧 세계를 제페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사정도 모르는 산악회 모 동생은 "형님 호텔시설이 뭐 이렇습니까?  음식도 형편없네요"  등 은근히 부아를 지른다.

그래서 그동안 추진해 온 과정과 여기는 하늘아래 첫 동네 백두산에 인접한 아주 시골 마을이고 그래도 이만하면 이 동네에서는 고급이라고 설명하니 대충 알아들었는지 "알겠습니다"가 연발이다.

여행이란 고로, 그곳의 현지사정에 잘 적응하며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내몽고에 가면  호텔이 아닌 초원에 지어진 천막에서 그들과 같이 즐기고, 인도에 가면 더러운 겐지즈 강물에 몸도 담그어 보고,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여행이라는 것을 깨달줄 알아야 한 다.

이번 여행에서 고마운 것은 김해에서 같이 경운산악회 울타리 속에서 정(情)을 나누던 천경거사(최병수)님이 지금은 중국 연태(엔타이)에서 현지공장사장으로 나간지가 벌써 4년이나 되었는데, 우리 일행들과 만나 조우하려고 그 먼 연태에서 부부와 공장장 부부 등이 비행기편과 차량을 이용하여 이곳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까지 찾아 온 것이다.

지난 2년전 중국 장가계에 갔을 때에도 그곳까지 찾아오려고 북경에서 항공편을 놓쳐서 그 다음날  항공편으로 들어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가는데 경비가 우리가 여행하는 전체경비 보다 더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얼굴 한번 볼 요랑으로 중국 '뻬깔' 50병을 준비하여 이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정말 사람의 정(情)이 이렇게도 모질고 대단한 것이다.

천경거사님 정말 반가웠고 "정말 감사합니다" 내년 중국 계림과 서안에 갈때에는 일정을 좀 넉넉하게 잡아서 우리와 같이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필자는 여행을 가면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부근을 산책하며 현지의 풍경을 담은 것이습관 처럼 되어버렸다. 백산가일호텔 앞에 쓰레기통이 몇 군데 있는데 쓰레기통 모두가 도둑고양이가 풀어헤친 것 같이 헤쳐져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노인네들이 조그마한 쇠꼬쟁이을 들고 봉지 하나 하나를 모두 풀어 헤치면서 지난밤에 버린 음식쓰레기 및 등등에서 먹을 것과 쓸만한 것을 골라내어 다시 검은 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 ....아 ! 아직도 이렇게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아침에 목소리 높여 두부 파는 아저씨 목소리가 어찌 들으니 '조포' '조포' 하는 것 같았다. 중국에는 원래 아침을 집에서 거의 해 먹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 가족이 아침을 사 먹으러 오는 것이다.

가게 옆에서 보니, 밀가루 반죽을 길에 늘어뜨려서 기름에 튀기는 빵 같은데,  푸른 바다님이 하나 사서 먹으며 나에게 조금 주는데, 먹어보니 우리나라 도넛 같기도 하고 하여튼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현대마크가 달린 승용차에서 한 가족 내려서 그 가게로 들어간다. 아마도 아침을 먹으로 왔나보다 이도백하백산가일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모든 짐을 버스에 싣고 걸출한 민족주의자를 배출한 용정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찾아들은 북간도(용정)에 있었던 중학교로써 이 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은 너무나 많으나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일제 항일 시인 윤동주 선생,  문익환 목사 등이 있다.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이다. 현재는 용정제1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단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구관 앞에는 그의 대표적인 詩  '서시'가 새겨져 있는 윤동주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건물 2층에는 기념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기념관에는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재야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모교이기도 하다.  지금 대성중학교 잘 지어진 건물에서 조선족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용정에 가면 항상 들리는 곳이 있다. 바로 곰 농장이다,  웅담을 채취하여 파는 곳이다. 지난해 베트남을 갔을 때에는 직접 곰을 가져와서 우리 일행들이 보는 앞에서 곰의 쓸개에 주사기를 꼽아서 모터를 돌려서 직접 채취하였는데 중국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련한 곰이란 놈은 잠을 잘 때에도 꼭 나무위에서 자는 버릇이 있어 여기에서도 이렇게 곡예 하듯이 올라가서 잠을 잔다. 미련한 곰도 연인이 있는가 싶다. 서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다. 점심식사는 용정에 있는 류경식당이다.

류경식당은 북한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평양 류경식당의 분점 이란다. 작년 캄보디아에 갔을 때 북한 식당 보다는 규모가 작고 서빙하고 공연하는 아가씨들도 조금 덜 예쁘고 하여튼 2%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나 북한 아가씨가 공연 도중 우리 일행들을 손을 잡고 무대로 올려놓고 아주 자연스럽게 같이 춤을 추고 마이크를 주며 같이 노래 부르는 매너는 마음에 들었다.

북한이 경영하는 류경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북한을 좀 더 접할 수 있는 두만강으로 자리를 옮겨 뗏목을 타기로 했다. 원래 작년에 기획 할 때에는 두만강 뗏목이 없었는데 내가 꼭 한번 두만강 뗏목을 타 보고 싶어서 중간에 넣었을 것이다. 인원이 많아서 여행사에서 몇번이나 이번 여행 코스에서 빼 줄 것을 요청했으나 강행한 것이다.

실제 두만강에 가 보니 뗏목은 4~5명만이 탈 수 있을 뿐,  96명의 단체가 가니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 여행을 위하여 노력하여준 메이플투어 김태영 실장님, 인차이나 정차장님, 마지막 편에 인사를 다시 드리겠지만 정말 수고 많았어요.

연길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도문은 길림성 동부의 중요한 철도교통 요충지로 길림시, 장춘, 하얼빈, 단동강, 신양, 북경 등지로 가는 여객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한다.1965년도에 시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중국, 북한의 국경으로 길림성 최대 변경도시이다.

중국과 북한은 도문대교로 연결되어 그 절반으로 국경을 나누고 있어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부분은 중국,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부분은 북한으로 정하고 있다. 중국쪽 다리 입구에서 약간의 돈을 내면 다리의 붉은색 끝까지 갈 수 있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격파한 봉오동 전투의 전적지가 주변에 있다.

두만강(豆滿江)은 북한을 바라 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에 우치한 강이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분단의 아픔을 지닌 곳이며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달리하는 가슴 아픈 장소가 되고 있다.

길이 547.8Km, 유역면적이 32.920Km2이며 주요 지류인 상류는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 및 화강암, 화강편마암으로 된 무산고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백두산과 무산 사이에서 흘러드는 소홍단수나 서두수에서 비롯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동계 혹한 기후에 속해 있어서 강우량이 적고 일대 산림의 대부분이 성숙림으로 이루어져 있다.또 연안에 넓은 초원이 발달하여 목축이 성하고 부령에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두만강 뗏목 타는 입구에서 (중국에서는 두만강을 '도문강' 이라고 부름) 수양버들 출렁거리는 두만강 강물위에 막대기 하나로 뗏목을 젓는 사공을 보니 김정구 선생님의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가 저절로 읊으려 진다

우리들이 도착한 날에는 며칠전 내린 비로 두만강은 수위가 많이 불어 있었고 뗏목타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그러나 뗏목 사공은 물살이 거세어서 막대기 하나로 움직이기에는 힘이 많이 들었으나 정말 뗏목 운전은 명품이었다.

두만강에서 뗏목을 타고 강의 반대편에 바짝 다가가면 바로 북한의 남양시이다. 뗏목을 타고 뗏목위에서 북한의 흙도 만져보고 풀도 뽑아보니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이 바로 여기구나! 하고 감회가 깊다. 

두만강은 미국 여기자가 북한으로 월경했다고 붙잡혀 갔던 곳이고(며칠전 클린턴이 데리고 나왔지만) 우리 민족이 일제의 폭정에 견디지 못하고 중국의 북간도(용정)로 떠날 때 고향산천을 뒤 돌아보면서 피 눈물을 흘리며 건너갔던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그당시 북간도 넘어갔던 우리민족 우리 동포들은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단절되어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고국을 오지 못하고 지금 중국 사람이 되어 조선족이라고 불리고 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북간도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조금 이라도 북한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사공은 북한 남양시쪽에 바싹 붙여준다.중국과 북한 오가는 기차 철도이다. 북한의 김정일이 중국을 갈때도 이 철도를 이용했다고 했다.

차량이 오가는 북한과 중국의 관문 다리에도 왼쪽 붉은색이 중국 측이다. 다리 위를 걸어서 관광하는 사람들도 저 붉은색까지만 가야한다. 더 가면 좀체 돌아오지 못하는 미국 여기자 처럼 된다.  

두만강 건너 북한 남양시 풍경이다. 군데군데 북한 주민들이 보이고 저 높은 산꼭대기까지 밭을 일구어 놓았다. 북한의 군인들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김해 경운산악회 기획이사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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