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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행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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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행기 (5)
  • 이규순 기자
  • 승인 2009.09.04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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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만리장성, 자금성, 천안문광장 (5)
 

 
   

중국의 연길에서 일정을 마치고 연길공항에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북경에서의 관광 일정이 남아있다. 어렵게 시간을 만들고 경비를 들여서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왔는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북경의 대표적인 명승지론 자금성과 천안문광장, 만리장성, 천단공원을 간다.북경에 도착하여 우선 우리들이 힘든 여정을 풀어놓을 북경중심지에 있는 중여대하호텔(4성급)이다. 북경의 아침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스모그와 함께한다.

중여대하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만리장성과 자금성, 천안문광장이다. 이른 아침에 버스로 만리장성으로 향하는데 지난번 북경 올림픽경기를 치루기 위하여 만리장성 가는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였는가 보는데 고속도로 통행료가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 이란다. 중국의 물가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싶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不到長城非好漢"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은 진(秦)의 강력한 통일젝구 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八達嶺) 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015m이며, 산세가 험준한 편이다.

장성위에서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중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만리장성은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만리장성을 가장 잘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천만 m에 이른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쪽으로는 진출 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장성은 명나라에 지어진 것으로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요령성 압록 강변에 이르는 635만m길이의 성벽이다. 그리고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7대 건축물에 꼽힐 정도로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만리장성을 오르기 위하여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 케이블카에서 먼저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한국인들이 적어놓은 낙서들이다. 이렇게 추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전 세계인들이 보는 이 곳 북경 만리장성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에 꼭 적어 놓아야 할까?

장구한 세월의 흐름이 한 순간으로 와 멎는 것 같은 감동이 왔다. 축성은 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하였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한 후(B.C. 221년) 명(明)조까지 약 2,0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장성은 보수건설 되었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중국의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아프간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둔황(敦煌)의 동편 자위관(嘉욕關)까지 굽이굽이 만리(5,660Km, 1Km=2공리)나 되는 세계 최장의 산성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현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장성에 나가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를 외치는 현장에는 전쟁에 패한 약소국의 군인과 백성들이 노예처럼 돌을 나르고 성을 쌓으면서 백골이 되었다가 먼 훗날 찾아오는 길손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바람소리 요란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 쌓기" 이야기는 옛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안부 정도야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다.

요즈음 같으면 재혼을 하든지 다른 방도를 찾아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국가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어서 딴 마음은 전혀 꿈꿀 수가 없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외딴집에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남편의 나이쯤 되는 사내가 싸리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지라 여인네는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 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여인은 남편이 부역 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 질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집에서 여인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 하겠다고 말한 뒤 한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다.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부역장에 가서 언제 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장만 받아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 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내는 평생 같이 살자는 여인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다.

사내는 아침이 되어 이 여인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깼다. 젊고 예쁜 여자가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잠결에 보아도 양귀비와 같다.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한다.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봇짐을 챙긴다.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했다. 감독하는 관리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옷을 갈아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잠시 교대를 해 줘야만 했다.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키는 대로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며 "옷을 갈아입고 편지 한 장을 써서 빨리 돌아오시오" 하고는 별 생각 없이 대신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다시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세요"

자신을 공사장에서 빼내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그 일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 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다음 코스인 자금성을 향했다. 자금성은 중국 황제들의 영욕이 서린 곳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청(淸)나라 시대의 궁전이며 지금은 '고궁박물관'으로 불린다. 자금성의 자금이란 북두성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데서 유래 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 개축 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양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도랑을 파 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돈화문, 서쪽을 서화문, 북쪽은 신무문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 부터 북쪽으로 태화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 무영전, 등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 되어 왔다.

천안문은 명(明)나라 초기에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명명하였으나 1651년에 개축할 때 톈안먼이라고 개명하였다. 문 앞의 대광장 주위에는 중앙관청이 모여 있고 국가적 대행사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이 사용되었다.

1919년의 5 ·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1949년의 중국정권 수립식도 여기서 행하여졌다. 매년 메이데이를 비롯한 국경일의 식전을 여기서 행하며, 광장 중앙의 남쪽에는 높이 38m의 화강석으로 된 인민 영웅기념비가 있다.

마지막 일정인 천단공원은 하루만에 소화하기에는 무리한 코스였지만 그래도 이왕 북경 왔으니 볼것 다보고 가야 만 될 것 같아서이다.

천단(天壇)이란 영락 18년(1420년)에 완성된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명,청의 황제들이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가 된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중요 업무였다.

천단공원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기년전(幾年殿)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지금은 천단공원이라 하여 북경을 관광 오는 관광객들에는 필수코스가 되어 버렸다

이번 백두산 서파종주는 96명이 참여하는 대단위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행사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음지에서 묵묵히 말없이 챙겨주신 메이플투어 김효정 사장님, 김태영 실장님, 인차이나 박창훈 부장님, 정차장님의 수고가 정말 많았음에 다시한번 더 감사 드림니다.

특히 울산에 이번 행사에 참가한 울 조카(막내처제 아들)는 만 7살로써 백두산 가이드가 인정하는 백두산 서파 9시간 종주는 첫 기록 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살아갈 때 큰 자긍심으로 어려운 세파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1년전부터 노심초사 걱정하시고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신 김해경운산악회 이태호(산스타)회장님, 김자영(경운산) 직전회장님이자 현재 김해시산악연맹 회장님,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번 행사에 불평 한마디 없이 촌장셈을 따라주신 김해 경운산악회 회원님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내년 여름에는 중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야기 한 '천지가 개벽한' 상해, 중국 당나라의 수도인 역사의 도시 서안, 해발 2,119m인 중국 5악에 하나인 화산, 천하제일의 산수화를 자랑하는 계림과 양삭에서 다시 즐거운 추억을 만들 것을 약속하면서 이만 인사를 올립니다. -끝-

 
   


-김해 경운산악회 기획이사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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