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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2>“50만 김해 - 근대50년” 100여년 만에 부활한 김해 활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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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2>“50만 김해 - 근대50년” 100여년 만에 부활한 김해 활천동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2.01.17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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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역사 깊은 삼정동, 유물 많은 어방동 구심체 역할 톡톡
분산성,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 박위 축성 사적비가 있으며
별 보는 천문대, 마을 보는 만장대, 멀리 가는 봉수대가 있다.


김해 활천동(동장 최선희)은 1914년 김해부 좌부 활천면을 좌부면으로 합병했다가 좌부면 남역리 일부를 병합하여 좌부면 어방리로 되었으며 1918년 김해부 좌부 활천면이 김해면으로 합병되었다.가 1931년 11월 1일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47년 6월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가 삼정동으로, 어방리가 어방동으로 개칭되어 34년간 통용되다가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면서 삼정동과 어방동이 합하여 활천동이 되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약 100여 년 전 잊어버린 활천면이 100여년 만에 활천동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1969년 활천고갯길 (동상동에서 활천고개로 올라가는 장면).  
 

활천동은 농경지로서 비닐하우스 재배가 가장 많이 발달했던 곳이기도 했고 덕성산업 도축장이 있는 관계인지 모르지만, 축산농가도 많이 있던 곳이다.

한일합섬이 잘 돌아가던 시절에는 활천 들판 논길에 파란 작업복을 입은 한일합섬 여공들이 줄지어 출.퇴근하는 모습은 장관이기도 했다.

뭇 총각들이 이 아가씨들 한 번 꾀어보겠다고 안동 한일합섬 부근과 어방천 들길을 찾아 카세트를 틀어 놓고 유혹하기도 했다.

추억의 활천 고갯길...

김해사람들과 김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활천동, 삼정동, 어방동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유명한 곳이 바로 활천 고개이다.

그 옛날 자동차도 없고 이동수단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 조상님들은 불편하더라도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길이라고 해서 관에서 별도로 공사하여 길을 다듬어 준 것도 아니고 그저 길이 필요했던 주민들이 작은 나무를 베어내고 풀을 뽑아 가며 밟고 다니다 보니 작은 능선이 반들반들하게 오솔길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길이 활천 고갯길이다.

오직 사람과 가축만 겨우 다닐 수 있었던 그 시절 그 고갯길은 발전과 발전을 거듭하여 자동차가 하루 수만 대 쌩쌩 달리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포장 흙먼지 마시고 덮어쓰며 맨살이 얼 정도로 차가운 칼바람과 비바람을 해치며 김해 읍내에 장을 보러 다니시던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훗날 그 자손들도 그 길을 따라 흙먼지 마시며 책가방 둘러매고 김해여고 김해중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오다가다 주인 몰래 길가의 산딸기도 따 먹고 포도 알도 슬쩍 따 입속에 넣고 죽으라고 내달리던 그 추억의 활천 고개를 모르는 사람은 김해 사람이 절대 아니다.

지금도 김해 읍내 사람들(동상,서상,봉황,대성동)은 동 김해 사람들을 보고 활천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전래를 잘 모르는 김해사람들이 이해가 안된다는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활천 초등학교가 활천동에 없고 저 멀리 지내동에 있다는 것이고 둘째 활천중학교도 활천동에 없고 지내동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고 옛날에는 동 김해 전체를 활천으로 통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남해고속도로를 잇는 동 김해나들목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종합대학인 인제대학교가 있다.
김해의 최초 인문계고등학교인 김해고등학교가 있는 등 초.중.고.대학까지 있는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비닐하우스 농가와 축산농가, 채소 농가들이 사라지고 그 땅에 기업들과 대규모 아파트단지, 다세대 주택(빌라)이 밀집해 있어 덩달아 상권도 잘 형성되어 있다.

2011년 12월 말 기준 총 가구 수 16,589세대에 인구 46,860명(남 23,866명/ 여 22,994명)으로 전년도 말 기준 인구유입이 계속되고 있다.
법정동인 삼정동, 어방동 2개 동에서 53통 296반이 운영되고 있다.

   
 
  복원된 김해 분산성 전경.  
 

활천동 문화재와 유적

문화재로는 1)조선시대 세워진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 높이 1.65m, 폭 0.45m, 두께 0.16m이다.

 

 

이 비는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고종 8년(1871)에 분산성(盆山城)을 수축하고 아울러 보수를 허가한 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높이 1.65m, 폭 0.45m, 두께 0.16m이며 기문(記文)은 정현석의 찬(撰)이다. 이 외에 박위 장군 사적비 1기와 정현석의 영세불망비 1기가 함께 있다.

2)사적 66호인 고려시대 축성된 분산성이 있다.
김해시 어방동 산 9번지 만장 대를 둘러싸고 있는 분산성은 길이 929m, 폭 8m로 고려 우왕 3년(1377년) 박 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년)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이다. 그러나 성의 기초 선정방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위 테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 축성연대는 가야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의 길이는 총 929m, 평균 폭은 약 8m이다. 현재 남북의 2개 문지와 서편의 암문, 우물지 등이 남아 있으며, 97년 복원된 봉수대가 있다.

3)조선시대 세워진 박위 축성 사적비(朴威築城事跡碑)가 있다.
이 사적비는 분산성 내 흥성대원군 만세불망비와 같은 곳에 있다. 조선 고종 8년(1871)에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세웠으며, 비문은『조선금석 (김해군편)』에 실려 있다.
사찰로는 성조암, 해은사, 성덕사 등이 있으며, 유적으로는 허씨 열부비와 주씨 열부비가 있다.

삼정동 [三政洞]

김해군 활천면(活川面)에 속하여 남역(南驛)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정리가 되어 좌부면(左部面)에 편입되었다. 1918년 김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김해면의 읍 승격에 따라 김해읍 삼정리가 되었다. 1941년 일본식 지명인 미산정(米山町)이 되었다가, 1946년 6월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미산정을 삼정동으로 고쳤다. 1981년 7월 김해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시 삼정동이 되었다.

1992년에 면적 27만 6557㎡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어 1995년에 완공되었으며, 마초·열고섬·남중(南中)·남역· 삼정곡 등의 마을, 야산인 알매 등이 있다.

   
 
  김수로왕이 바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만장대 해은사 전경.  
 

삼정걸립치기
삼정동의 유래는 신라 말 세 명의 정승이 살았다 하여 ‘삼정골’로 불리다가 지금의 삼정동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음력 정월 2월부터 보름까지 집집마다 돌아가며 마을의 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비는 걸립치기를 하였는데 이 때 모아진 쌀과 돈은 마을의 공동사업비로 사용하였다. 고 전해온다.

걸립치기는 이두현 채록복에 의하면 농기, 징, 북, 장고, 포수, 사대부 각 1명과 꽹과리 2명, 소고 5명 등 비교적 적은 인원이었다가 현재에 들어서는 30~40명의 규모로 놀고 있는데 1970년대에 들어 정치봉 상쇠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 해 오다 98년 삼정걸립치기 보존회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정걸립치기 보존회는 경남민속예술축제를 통해 삼정걸립치기의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경남 대표민속단체가 되기도 했고 전국대회에 출전 김해와 활천동의 선양에 기여하면서 장관상을 비롯해 주요 상들을 휩쓸고 있다.
삼정걸립치기는 원래 3시간 정도로 놀았으나 요즘은 약식으로 많이 놀고 있는데 당산제, 용왕굿, 마당놀이, 성주굿, 장독굿, 거리굿, 물림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해 분산성 만장대 봉수대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시민들.  
 


어방동 [漁防洞]

원래 김해군 활천면(活川面)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남역리(南驛里) 일부와 합하여 좌부면(左部面) 어방리가 되었다. 1918년 김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김해면의 읍 승격으로 김해읍 어방리가 되었다. 1947년 6월 리가 동으로 바뀌면서 김해읍 어방동이 되었고, 1981년 7월 김해읍의 시 승격에 따라 김해시 어방동이 되었다.

동부리골·마구들·서물들 등의 들판, 등들보·새도랑 등의 보(洑), 신당(新堂)·안골·청석(靑石)·사창(社倉)·초선대(招仙臺) 등의 마을이 있다. 1989~1995년과 1990~1995년에 어방1지구와 어방2지구에 각각 면적 20만 9069㎡, 25만 977㎡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었다.

분산성은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분산의 정상에 둘레 약 900m에 걸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산 위의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서남부는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현재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성 안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서쪽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뒤편에서 들어가는 길을 이용한 듯하다.

성 안의 해은사에는 김수로왕과 허 왕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허황옥 공주가 가져온 파사석탑을 복원 한 부처님진신 사리탑이 있다.

활천동은 아직까지 농촌인심이 묻어나는 풋풋한 마을이다 보니 인정이 넘치고 희생력이 강하다.

자생단체 회원들의 희생과 정성으로 매년마련하고 있는 경로잔치와 각종 주민위안사업을 비롯하여 주민자치센터가 운영하는 주민문화강좌도 주민참여와 반응이 매우 좋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활천동의 일꾼들.. .자생단체
1 활천동 체육회 활천동
2 주민자치위원회 활천동
3 새마을협의회 활천동
4 새마을부녀회 활천동
5 바르게살기위원회 활천동
6 자연보호협의회 활천동
7 방위협의회 활천동
8 대한적십자 분성봉사회 활천동
9 자원봉사자회 활천동
10 재향군인회 동부여성회 활천동
11 자율방범대 활천동
12 재향군인회 동부지회 활천동
13 청년회 활천동
14 민속보존회 활천동
15 통장단협의회 활천동


활천동의 심부름꾼 통장들...
활천동 1통장 배윤호
활천동 2통장 김상열
활천동 3통장 문은옥
활천동 4통장 류명식
활천동 5통장 김재환
활천동 6통장 임한순
활천동 7통장 허성열
활천동 8통장 배기용
활천동 9통장 조장수
활천동 10통장 서상열
활천동 21통장 신순옥
활천동 22통장 도정은
활천동 23통장 채수권
활천동 24통장 백현숙
활천동 25통장 박성숙
활천동 26통장 조숙자
활천동 27통장 오정자
활천동 28통장 정경옥
활천동 29통장 김숙정
활천동 30통장 전연희
활천동 31통장 곽영숙
활천동 32통장 이정윤
활천동 33통장 김미경
활천동 34통장 안혜영
활천동 35통장 박명숙
활천동 36통장 안봉원
활천동 37통장 김용광
활천동 38통장 박창숙
활천동 39통장 김종남
활천동 40통장 김은숙
활천동 41통장 노화옥
활천동 42통장 하숙녀
활천동 43통장 도애숙
활천동 44통장 최병미
활천동 45통장 이재동
활천동 46통장 김원자
활천동 47통장 성인희
활천동 48통장 박영숙
활천동 49통장 윤정숙
활천동 50통장 최도엽
활천동 51통장 김종한
활천동 52통장 강명숙
활천동 53통장 김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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