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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명소였던 연자루는 누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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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명소였던 연자루는 누각이었다.
  • 조유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14.01.16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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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남도의 대표적인 누각이었다.
누각과 정자 그리고 누정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누정(樓亭)이다. 누각과 정자는 사람이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자연과 하나 될 수 있는 곳이 누각과 정자다. 흔히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하나로 묶어 누정이라 하지만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차이가 있다.
우선 누각은 개인이 설치하는 정자에 비해 국가나 정부 기관에서 설치하는 데서부터 정자와 다르다. 그러다 보니 누각은 공적인 일로 사용되고 정자는 사적인 일로 사용된다. 누각에서는 정치를 논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외국 손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으며 국가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누각은 지방의 수령이 조영(造營)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더구나 관망대처럼 우뚝 솟아서 외부인을 감시하듯 서 있는 건물이라서 일반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자는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 또는 문중에서 조상을 섬기기 위해 설치하기도 하여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사교장이면서 문중의 집합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당쟁에 밀려 잠시 조정을 떠난 사대부들이 과시적인 목적으로 조영하기도 했지만 뜻이 있는 사람은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조상의 뜻을 기리거나 그들의 학맥과 인맥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 묵객이 모여 음풍농월하기도 하고 시류(時流)를 한하기도 하여 일반 백성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결국 모정이 서들만의 휴식처였다면 정자는 권문세족들의 사교장이었으며 누각은 국가의 정책을 펴기 위한 공공 장소였다.
건물의 사용주체와 이용 방법이 그렇게 확연히 다른 만큼 건축의 방법과 건물의 구조 또한 큰 차이를 보인다. 정자는 건물이 대부분이 1층이거나 마루가 지면에 가까운 저상식(低床式)인 반면 누각은 2층 건물(그래서 누각을 다락이라고도 했음)이다. 마루 밑 1층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마루 밑의 기둥<누하주(樓下柱)>을 높게 세워 공간을 높였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기 때문에 고상식(高床式) 구조의 건물이다. 크기도 누각은 주로 정면 5칸 이상의 큰 규모인데 비해 정자는 보통 2칸이나 3칸으로 작고 누각은 사방이 확 트인 마루 그대로이지만 정자는 작은 방 한 칸을 내어 온돌까지 마련해 두어 때로는 잠을 잘 수도 있게 한 곳이 많다.
특히 주목해볼 것은 누각은 앞뒤가 확 트인 개활지에 설치하기 때문에 조망이 탁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자는 산 깊고 물 맑은 곳에 설치하기 때문에 전망보다는 경관에 치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누각에는 경치 좋은 곳을 일컫는 팔경이 없지만 정자에는 어김없이 팔경을 지정하여 시인묵객들의 시정(詩情)을 자극했다. 그래서 학문과 인품이 출중한 사람이나 권력층이 다녀간 정자에는 유명한 정치가와 시인 묵객들의 글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연자루(燕子樓) 는 김해시 동사동 옛 호계사(현 연화사)와 호계천 주변에 있던 연자루는 가락국 시대부터 유서 깊은 누각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형왕(仇衡王) 9년(531) 겨울에 이 누각이 명동(鳴動)하니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임자년에 국망(國亡)을 예언하는 것이라 하여, 왕명으로 훼철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언제 재건되었는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지마는 1677년(숙종3) 부사(府使) 변국한(邊國翰)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오다가 1932년에 철거되고 건물 일부는 매각 되었다고 한다.
연자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남도의 대표적인 누각이었다. 고려시대의 정몽주, 주열, 김득배, 왕강, 등과 조선초기의 이행, 맹사성, 김감, 맹석흠 등의 제영(題詠)이 걸려 있었다.<포은선생문집>에 다음시가 전한다.

헌납 이첨이 안행 할 때에 김해 연자루 앞에
손수 매화를 심었다고 전하기에
연자루의 앞에는 제비가 돌아오건만
낭군은 한번 가서 다시 오지 않네
그 당시 손수 심은 매화나무는
그동안 봄바람에 몇 번 피었을까

현제 연화사 한 컷에 보존되고 있는 연자루의 유일한 건축물인 팔각기둥 석주는 높이 122cm 이며 상단둘레가 227cm 이며 하단둘레는 227cm로 그 누각의 웅장함과 크기의 규모를 짐작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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