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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불탑의 전설 `미얀마 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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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불탑의 전설 `미얀마 바간`
  • 박순호 기자
  • 승인 2014.10.13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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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과 사원

파호따마 사원 PAHHO THAMYA

파호따마(PAHHO THAMYA PHAYA)라고 부르는 이 사원은 탑빈뉴의 사진을 촬영하는 비슈뉴 사원에서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가면 있다. 비교적 소규모의 사원이지만 건축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바간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석불상이 모셔진 곳으로 10세기경에 지어진 이 사원은 입구의 정 중앙에 사암으로 조성된 석불을 모시고 뒷면은 사라바스티의 천불의 기적을 후불 탱화로 남기고 불상 양옆에는 사리불과 목련존자상을 모셨다.

 
 
이 사원은 내부가 무척 어두운데 오직 부처님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환할 뿐 다른 제자상은 무척 어둡게 되어 있다. 이를 두고 현지인들은 신앙심의 발로에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불상을 지나 좌측으로 돌아보면 다른 사원에서는 볼 수 없는 사암문 창살을 볼 수 있다.

갖가지 문양으로 조각된 이 문 창살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초기 건축기술의 문제로 프레임이 없이는 아치나 창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나무로 프레임을 한 다음 그 위에 힘을 지탱해줄 석 창문을 설치했다.

하지만 후대의 사원에는 석굴암의 팔뚝돌처럼 벽돌이 서로서로 미는 힘으로 곡선을 만드는 기법이 개발되면서 이러한 창틀과 나무 지지대는 사라지고 아치형 창문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두 번째는 사암 창문의 조성기술이 대부분 인도와 남부아시아에서 유래된 기술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슷한 시대의 인도는 사암건축의 전성기로 모든 건축에 사암 창살을 만들어 설치했다. 바간의 탑들도 처음에는 인도의 석건축 기술을 모방하며 시행하다 기술적으로 진보되어가며 나무 프레임이 사라지고 사원의 조명 효과와 바간의 더위를 감안하여 창살까지 아예 없애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 사원에 가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초기 형태의 사원과 비교적 후기에 지어진 사원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기 사원의 특징
1) 하나의 입구로 형성되어 있다. 2) 중앙에 불상이 한 분만 모셔져 있다. 3) 탑 내부에 불상을 중심으로 하나의 복도만 있다. 4) 단층 구조로 되어 있다. 5) 내부가 비교적 어둡게 되어 있어 벽화가 손상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후기 사원의 특징
1) 입구가 사방으로 형성되어 있다. 2) 사방에 부처님을 모신다. 석가모니 불과 과거 삼불 3) 탑 내부에 불상을 중심으로 두, 세 단계의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4) 복층 구조로 이층 삼층으로 조성되었다 5) 비교적 창문을 많이 만들어 밝은 분위기지만 광선의 영향으로 벽화가 많은 훼손을 입었다.

다마양지 사원 DHAMMAAYANGYI

 
 
다마양지는 바간에서 가장 거대한 사원 중의 하나로 바간왕조의 비극적 현장이기도 하다.

앙라웅시투의 아들인 나라투 왕에 의해서 건립되는 다마양지는 왕위 찬탈을 위해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아내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을 참회하기 위해 지은 사원인데 나라투 왕의 아버지였던 알라웅시투는 자신이 세운 슈웨구지 사원에서 아들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죽으면서도 전혀 반항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제 법은 인에 있다"는 비문이 인도나 미얀마의 탑에서 많이 발굴되는 것처럼 나라투 왕의 인과도 역연히 흘러 결국은 장인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나라투의 살육은 자신의 아버지와 아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왕위를 찬탈할 것이 염려되는 왕자들과 신하들의 목까지 베었고 아버지와 아내를 죽인 참회의 징표로 지어지는 사원에서까지도 벽돌 사이에 바늘을 집어넣어 틈새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건축 지휘자와 노예들의 팔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혹독하고 잔악한 성품으로 원성을 사던 나라투 왕은 결국 재위 3년 만에 지금은 인도 땅인 브데익 가야의 장인이 파견한 8명의 자객에 의해 시해 당한다. 모두 승려로 가장하여 왕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이들은 왕을 죽인 후 그 자리에서 모두 자결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얀마의 역사책에서는 나라투 왕을 "끌라쨘 민"이라 부르는데 이는 인도인에게 목숨을 빼앗긴 왕이란 뜻이다.

왕이 죽은 후 다마양지는 미완성 사원으로 바간에 남게 되는데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바간 최대의 사원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파고다의 입구에 들어서면 서늘하고 음침한 기분이 먼저 드는데 천장에 사는 박쥐들의 분뇨냄새가 마치 피비린내처럼 코끝에 와 닿는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 과 그 아들 아사세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다. 부처님의 사촌이였던 데바달타라는 사람은 극단주의적 수행을 주장하며 평생 부처님을 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빔비사라 왕이 변함 없는 신심으로 부처님을 모시자 이를 시기하여 왕자에게 접근 "왕자여 아버지를 폐위하고 당신이 왕이 되시오"라고 이간질을 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반군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어 폐위시키고 목숨까지 앗아가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 뒤에는 그 연유가 있었는데 젊은 시절 빔비사라 왕은 늦게까지 자식이 없어 무척 초조해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선인의 예언을 들어보니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인 한 선인이 목숨을 다하면 당신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오"라고 했다. 왕은 빨리 자식을 갖고 싶은 마음에 자객을 보내어 그 선인을 살해하고 만다.

얼마 후 한 선인이 다시 예언하기를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과거의 인과로 꼭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왕비는 두려운 마음에 배를 쓸어 내리며 아이를 떼어내려 애쓰지만 결국은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가 장성하여 아세사 왕자가 되어 결국은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왕위를 찬탈한 후 어느 날 아사세는 가족들과 식사를 하다가 아사세의 아들이 강아지를 식탁에 올리고 밥을 먹자 왕은 "자식 때문에 일국의 왕이 개와 식사를 같이 하는구나"라고 하자 아사세의 어머니는 "아들아 너의 아버지는 네가 어렸을 때 손가락에 고름이 고여 잠을 이루지 못하자 밤을 세워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셨다. 어찌 하여 너는 아비에게 그렇듯 가혹한가"

이 말은 들은 아사세는 깊이 뉘우치며 군사를 보내어 아버지를 풀어주려고 하지만 이미 빔비사라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있었다. 그 후 마음에 큰 병을 얻은 아사세는 온 몸에서 고름이 돋는 병에 걸려 신음을 하며 지냈다. 이때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주선으로 부처님께 자신의 죄를 참회하여 마침내 아사세는 병을 고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다마양지 사원은 바간의 길거리 상점에서 많이 파는 경쇠(쇠판으로 만든 종) 모양으로 설계된 탑이다. 이 사원은 들어가기 전이나 나올 때 미리 사진을 찍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건물이 너무 커서 다마양지의 전체적 모습을 사원 안에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부분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게 되어있는데 우선 거대한 아치형 천장과 벽면 구조의 웅장함에 감탄하게 된다.

사원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지어지기 힘든 벽돌건축의 불가사의를 느낄 수 있는데 탑 전체를 벽돌로 한치의 틈도 없이 맞대어 쌓았으며 간혹 굽어진 벽돌은 그 위의 벽돌마저 같은 모양으로 맞추어 나갔다.

또한 외부의 벽면과 측면을 자세히 관찰하면 모서리 부분과 취약 부분은 모두 사암으로 쌓아 전탑의 약점을 보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외벽의 두터운 회칠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기나긴 미얀마의 우기 때 벽돌 사이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수 시설이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 구성이 치밀하고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다마양지의 건축기술 이면에는 목숨을 담보로 일해야 했던 노예들과 노역자들의 고난이 서려있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입구 반대쪽으로 가면 당시에 나라투 왕이 바늘을 들고 다니며 벽돌과 벽돌 사이를 찔러 틈이 발견되면 공사 책임자의 팔을 자를 때 사용된 작두 틀이 있다.

큰 길에서 다마양지로 들어가는 길 왼쪽의 첫 번째 사원은 이름도 없는 조그만 사원이지만 아주 흥미 있는 볼거리를 가진 사원이다. 탑 건축 초기에는 입구나 천장의 아치를 벽돌로 짜 맞추는 기술이 없어 모두 나무를 대고 창문이나 천장을 만들었는데 이곳에 가면 그러한 초기 파고다 건축 기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사원 안의 입구를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사원을 나와 뒤로 돌아가면 뾰족하고 자그마한 탑이 하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탑의 중간이 움푹 파여 있고 그 속에 다른 탑이 또 들어가 있는 기묘한 형태의 탑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도굴꾼들의 소행으로 이렇게 파헤쳐진 탑의 내부를 통해 당시의 탑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미얀마는 오래된 탑을 새로 정비하거나 새롭게 불사를 진행할 때 아무도 기존의 탑을 부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있던 탑을 부수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탑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슐라마니 사원 SULAMANI

1184년 나라파티시투 왕에 의해 건립되는 사원이다. 탑빈뉴와 비슷한 설계로 지어진 이 사원은 전체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에는 많은 벽화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슐라마니의 벽화는 바간에서 빠뜨릴 수 없는 벽화로 마치 민화처럼 정감이 가는 색채와 곡선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사원의 벽화는 거의가 사원의 건립 후에 그려진 것으로 입구 왼쪽의 벽화는 18세기에 그려진 것이고 중앙의 천장 벽화는 13세기에 그려진 것이다.

북쪽의 입구로 가면 구류손불 부처님 오른쪽에 무칠린다 용왕의 상이 있다. 미얀마에서의 용왕(나가)신앙은 정령신앙과 함께 불교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얀마의 어느 사원을 가도 발견할 수 있는 이 나가상은 부처님이 부다가야에서 47일 동안 명상을 하실 때 폭풍이 불어와 명상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때 자신의 몸을 덮어 부처님을 보호했다는 무칠린다 용왕 이야기가 불교와 함께 미얀마로 들어와 하나의 신앙형태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나가신앙은 불교적인 영향보다는 힌두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인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뱀을 숭배하였다. 공포의 대상을 숭배함으로서 그로부터 해방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한 예로 인도의 나란다 박물관에는 좁은 입구가 여러 개가 있는 희한한 형태의 항아리가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뱀에게 우유를 공양하기 위한 항아리였다고 한다.

한때 미얀마에 힌두교가 들어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들어온 뱀 숭배 신앙이 불교가 들어오며 정령 신앙처럼 부처님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슐라마니 사원의 동쪽에 이르면 아주 독특한 모습으로 조성된 부처님이 있다. 남방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불상으로 관을 쓰고 있으며 현란한 색으로 치장되어있다. 이 동쪽 불상은 티벳의 불상과 아주 흡사한데 이러한 머리의 관이나 화려한 색채는 밀교나 대승불교의 보살상에도 많이 쓰인다.

바간에는 아노라타 이전에 이미 인도의 밀교가 유행하였고 슐라마니의 건립 시기인 1184년경에는 바간에 상좌부 불교의 틈새로 밀교가 다시금 싹을 틔우는 시기였다.

그래서 1170년에서 바간 왕조가 멸망 할 때가지 건립된 사원들은 대부분 밀교적 성향이 농후한 사원들이다. 대불을 끼고 남쪽으로 돌아서 나오다보면 입구 쪽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묘사한 것이다. 좀 더 앞으로 가보면 흥미로운 벽화가 있는데 바다를 배경으로 왕인 듯 보이는 사람의 환송과 바다에는 일련의 승려들이 배를 타고 가는 모습이다.

현지인들도 잘 모른다고 말하는데 미얀마의 불교 역사는 불사리를 얻기위한 역사라고 할 정도로 불사리에 집착을 하였다.

바간왕조를 일으킨 아노라타 왕도 중국으로부터 옥불상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스리랑카로도 사절을 보내지만 불치의 복제품을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 뒤 앙라웅시투와 나라티하파티 그리고 따웅구 왕조 공파웅 왕조도 마찬가지로 모조품을 얻는데 그친다.

이런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마도 스리랑카로 보물을 싣고 불치를 얻으러 가는 장면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추측도 가능한데 그 것은 스리랑카와 계를 주고받은 역사 때문이다.

미얀마는 11세기 후반 스리랑카의 비자야바후 왕의 요청으로 비구들이 대장경을 싣고 건너가 첫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후 미얀마는 담마제디 왕에 이르러 불교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22명의 장로를 스리랑카로 파견하여 겔라니아 강변의 선상에서 망가라 장로를 전계사로 계를 받고 귀국한다. 왕은 이들을 위해 새로운 청정도량과 새로 출가하는 승려들을 이곳으로부터 계를 받도록 하였다.

이렇게 확립된 것이 남방의 한 분파가 된 랴만냐 파이다. 그 후 이 랴만냐 파는 주변국에까지 그 작법을 전수하며 상좌부 불교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된다. 이러한 두 나라 승가의 교류와 불치교류 역사를 보면 이 벽화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팔리 사원 UPALI THEIN

우팔리테인으로 불리는 이 사원은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지계 제일이었던 우팔리의 이름을 따고 있다. 이곳은 바간에 마지막 남은 계단으로 남성이 20살이 넘으면 비구계를 받는데 바로 이곳에서 계를 받았다고 한다. 계는 엄격히 지켜야하는 수행자의 본분으로 첫 출가시에 우팔리 장로의 청정계행을 본받는 의미에서 지어진 듯 하다.

본래 우팔리는 석가족 왕자들의 머리를 깍아 주던 이발사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10대 제자가 된다. 계급사회였던 인도사회에서 우팔리의 출가는 진리 앞에 모두가 평등함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연유로 우팔리는 흔들림 없는 계사의 일생을 살아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칠엽굴에서 제1차 결집이 이루어질 때 비나야(율장)의 결집을 담당하게 된다.

현지에서 전하는 말로는 틸로민로 왕 통치시에 살았던 우팔리 테인이라는 장로의 이름을 딴 사원이라고 하는데 계단으로서 뿐만이 아니고 사순절이 지나고 계를 어긴 사람의 포살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우팔리테인의 내부에는 부처님의 전생담이 벽화로 남아 있는데 건립 당시가 아닌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바간의 벽화는 색채와 구성으로 그 벽화의 시대를 구분할 수가 있다. 먼저 13세기경에 그려진 벽화는 검정 흰색 노란색을 주로 사용하며 구획선을 정확히 구분하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검정 녹색 노랑 빨강 흰색 등을 주로 사용하고 4~5개의 내용을 묶어서 함께 그려진다.

잔시타 동굴 KYANSITTHA UMIN

쉐지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벽돌로 지어진 토굴 같은 사원이 있다. 반 지하 형태의 이 사원은 아마도 승려들의 선방으로 사용된 듯하다. 사원 안은 긴 복도 형태로 되어 있고 복도 안으로는 작은 방들이 있는데 수행하기 좋도록 만들어져 있다.

내부의 복도 면에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남아 있다. 대부분 불탑에 꽃이나 공양물을 기증하는 승려와 재가자의 모습이다. 그 중 바간 왕조가 몽고군에게 침략 당했을 때 몽고 인들이 그려놓은 자신들의 인물화가 아직 남아있어서 볼거리다.

고도팔린 사원 GAWDAWPALIN

슐라마니를 건립한 나라티하파티왕의 명으로 건립된 이 사원은 높이가 55m로 바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원이다.

이라와디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석양이 질 무렵 강변의 전망이 잘 보이는 사원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부는 특별한 특징 없이 지어져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데 충분치 않다. 

글ㆍ사진 박순호 기자(YN뉴스ㆍ영남매일 서울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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