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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바로알기--수로왕 탄강설화와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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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바로알기--수로왕 탄강설화와 지명과 유래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07.07.1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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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시조 수로왕 탄강설화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 설화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九干)이 있어 이들이 백성을 다스렸으니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때마침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유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어라.” 라는 말이 들려왔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추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紫色)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幅)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화는 전승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이루어지는데, 당대인의 역사 인식에 따라 가공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합니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이 건국되었다거나 또는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그 시대의 역사 사실로 볼 수는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는 연구 분야에 따라서 천손강림 설화, 농경 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고대인들의 사상과 역사적 배경 등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 수로설화의 성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붉은 폭(幅)에 둘러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왔다’ 라고 하는 천손강림과 난생설화의 요소입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단군 신화 이래 대부분 천손강림(天孫降臨)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수로왕 설화 역시 높은 산봉우리인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등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배자는 이러한 관념을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하고, 일반민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새(鳥)로 변신하는 능력이라든지 허왕후와의 결혼담은 지배자로서의 위용과 건국시조로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천강신화는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단순히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김해지역 또는 가야지역으로 이주한 선진집단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김해지역에는 토착집단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각각 대표하였습니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을 것입니다.

9간 세력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고, 새로 도래해온 수로왕 집단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42년이라는 가락국의 성립연대는 역사사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나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를 통해 볼 때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난생(卵生)설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수로왕이 천손이라는 관념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로서,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피지배층에게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 합법화, 신성화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왕 외에 5명의 왕이 난생하여 6가야를 이루었다고 하는 ‘6란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의하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는 12개의 국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가야지역에 선진철기문화를 소유한 집단이 나타날 무렵의 고고학적 현상 역시 『삼국유사』 '오가야 조' 에 보이는 가락국을 제외한 5개의 나라에 비정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6란설’은 후대의 ‘가야연맹체’ 관념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에서는 이외에도 해양문화적인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천강설화의 요소인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북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 바다동물인 거북(龜) 역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어산불영 (魚山佛影)' 에는 ‘만어사(萬魚寺)는 옛날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다. 산 옆에 가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해변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수로왕 이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서도 역시 가락국과 해양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가락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입지조건과 또 철을 매개로 한 해상교역세력으로서 성격을 볼 때, 거북으로 표현되는 해양문화 역시 수로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수로왕의 성인 김씨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큰 성씨(姓氏)가 김해 김씨(金海 金氏)입니다. 그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왕력(王曆)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거등왕(居登王)은 아버지가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이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란(金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임인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란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니 개황력에 실려있다.

이 두 글에서는 수로가 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보입니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고 하여 金으로 성을 삼았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직계라고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이다.

중국의 ‘소호금천씨설’을 채용하여 신성성과 유구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황력은 가야 멸망 이후 편찬된 것이고, 『김유신비문』 역시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원설 모두 가야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왕족과 마찬가지로 김씨성(金氏姓)이 칭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해지명과 유래=

불암

활천면 불암리로 선바위(仙岩)라고도 했다. 1931년 11월 1일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면서 김해면과 하동면 경계선을 접한 큰절바위에서 김해면 방향으로 부처바위가 있어 불암(佛岩)이라 하였다.

외동

우부면 외동리인데 내리의 바깥쪽이기 때문이다. 1914년 봉곡리를 병합했다. 옛날 거인리이며, 마을 앞의 정자나무인 은행은 도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내동

우부면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1914년 평전리를 합하여 내동리로 했다가 1947년 7월 6일 내동으로 고치고 2구로 나누었다가 1981년 7월 1일 시 승격시 행정상 내외동이 되었다.

대동면

김해부 동편의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하동면이라고 하여 11개리가 있었는데, 1914년 월당리와 평촌리를 합하여 월촌리로 하여 10개리가 되었다. 1944년 10월 1일 면 명이 하등(下等)과 발음이 같으므로 대동면으로 개정되었다.

삼계동

옛 이름이 북곡리(北谷里)였으며 좌부면(左部面)의 삼거리(三巨里)로서 세갈래 길이 있다하여 삼지원(三岐院)이라고도 했으며 뒤에 삼계동(三溪洞)으로 고침. 1914년 두곡리를 병합하였다. 1950년 12월 육군 공병학교가 옮겨온 뒤 마을의 모습이 점차 바뀌었다가 1996년 7월 이전해간 후 신도시로 개발되었다.

구산동

예종(睿宗)때 지리지(地理地)에 삼산리(三山里)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1941년 구산정(龜産町)으로 고쳤다. 1947년 6월 구산동(龜山洞)으로 고침. 수로왕비인 허 왕후의 능과 가야의 탄생설화가 깃든 구지봉이 있다.

대성동

향교(鄕校)가 옮겨온 뒤 교동(校洞)이 되었다가 1914년 우부면(右部面)의 북외리(北外里)와 삼산리(三山里)의 일부를 합하여 답곡리(沓谷里)로 되었다가 1941년 11월 1일 대성정(大成町)으로 고쳤다가 1947년 6월 현재의 대성동(大成洞)으로 개칭되고 2구로 나누었다.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성동(大成洞)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대사리로 나오는데 고려시대부터 금강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봉황동

처음 회현리인데 1914년 고서리와 강창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4년 11월 1일 일본인들이 봉황정(鳳凰町)으로 부르다가 1947년 6월 25일 봉황대가 있어 봉황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1981년 7월 1일 시 승격으로 회현동에 들어가 16통을 두었다. 옛날에는 城中里,安仁里였으며 1958년 10월 김해교육청이 이곳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회현동사무소가 되었다.

서상동

세종때 지리지(地理志)의 대기리(大岐里)이고 예종때 대기음리(大岐音里)였다가 도화동(桃花洞)으로 고쳤다. 좌부면(左部面)의 북내동(北內洞)이었다. 김해부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군청, 등기소, 금융조합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4년 좌부면의 고서리와 능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북내동이 되었다. 1941년 11월 1일 일본인들이 대화정(大和町)으로 부르다가 1947년 6월 서상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1981년 7월 1일 시 승격과 함께 회현동에 들어가 1~7통으로 나누었다.

회현동

가락국 시대의 정절(貞節)의 여인 여의(如意)의 이름을 따서 여우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여우고개로 바뀌어 호현(狐峴)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다시 한자로 회현리(會峴里)라 부르게 되었다.

우부면(右部面)의 회현리(會峴里)였는데 1914년 고서리(古西里)와 강창리(江倉里) 일부를 병합(倂合)하였다. 1981년 7월 1일 김해시 승격(昇格)과 함께 서상동(西上洞) 봉황동(鳳凰洞)을 합(合)하여 행정상(行政上)으로 회현동(會峴洞)이라 하고 17통을 두고 있다.

생림면

김해군 내부에서 가장 높은 무척산(無隻山)이 있어 숲이 울창하고, 오서의 동쪽에 무새가 숲을 바라보는 형국(군마망림형群馬望林形)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생철과 봉림을 합한 이름 이기도 하다.

처음 생림면 7리였는데(사촌.나전.봉림.금곡.생철.도요.마사) 1914년 구역폐합으로 안양리, 생림리가 생겨 9리가 되었으며 현재는 금곡리가 한림면에 통합되어 8리가 되었음.

한림면

김해부의 북쪽에 있는 상북면과 하북면이 1914년 병합하여 이북면이 되었다. 이북면 4리(가동, 가산, 장방, 시산)와 하북면 6리(신천,용덕,명동,안하,퇴래,병동)를 하나로 합한 것이다.

1983. 2. 15 생림면으로부터 금곡리 및 생림리 일부(장재)를 편입시켜 모두 12리 43개 마을이 되었다. 1987. 1. 1 한림면으로 명칭개정

진례면

예종(睿宗)때의 경상도지리지(1469)에 의하면 부서 진례촌(府西 進禮村)으로 나와 있었다. 가락국때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進禮城主)로 봉했다고 하고(三子許明) 통일신라말에는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諸軍事)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청천면(菁川面)으로서 청내(晴內)라 속칭하였다.

진례면 열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두 청천(晴川)에 모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열두청내' 라고 불렸다. 청천소모진(晴川召募鎭)은 7진관(鎭管)의 병마도호(兵馬都護)가 습열(習閱)하던 곳으로 지금의 예비군 훈련장 같은 곳이 창원으로부터 이곳에 이설되어 뒤에 웅천현(지금 웅동면 청천)으로 옮겨 갔다. (광해군 8년(1616)부터 효종 7년(1656)까지 이곳에 있었음) 1894년 갑오경장때 진례면 5리(청천.시례.송정.초전.신안)와 율리면(栗里) 9리(산본.신월.송현.담안. 고모.고령.관동.성법.개동)로 나누었다가 1914년에 중북(中北)면의 의전리 일부와 죽곡리 일부를 합병하여 진례면이 되었다.

장유면

장유는 오랜 역사의 향기가 깃들여 있는 고장이다. 멀리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의 처남 허보옥이 허왕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이곳 장유산에 절을 세우고 오랫동안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가 입적하시니 장유불, 후세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 대청리 장유사의 경내에 사리탑이 있고 그 연유로 장유촌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고, 유하촌을 유지앵소(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꾀꼬리 집)의 명당 자리가 있기 때문에 버등으로 불렀고, 능동마을은 가락국 어느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능동의 일부는 신라 말기부터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부락의 하나로 절미향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보다 앞서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친 유적인 수가리 가동마을과 유하리 하손마을은 우리고장 서인들의 주거지(집터)이며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무계리의 지석묘(고인돌)는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순조 10년(1810년)에는 유하면(柳下面)이 되었다가 고종 16년(1879년)다시 유등야면으로 돌아갔으며, 고종22년(1885년) 지금의 이름인 장유면(長有面)으로 개칭 되었다. 고종 25년(1888년)에는 장유면 8개 리(부곡, 유하, 내덕, 무계, 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 4개 리(율하, 장유, 응달, 수가)로 나누었다가 다시 1914년 합병되어 오늘의 장유면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김해서부의 중심지로서 버스노선과 우편국, 금융조합 등이 있었고 신문장터가 물자 집산지의 역할을 해 왔었다. 지금은 십여년 전부터 중앙을 관통하는 남해고속도로와 최근 창원터널이 개통되면서 부산, 김해, 창원, 마산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택지개발과 경상남도 복합유통단지 설치 등 여러 가지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장유의 활기찬 미래가 펼쳐질 날이 멀지 않았다 하겠다.

진영읍

면소인 설창리는 현종 7년(1666년) 국가의 납세물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고, 인근 화포천까지 강물이 밀려왔던 곳임. 현재의 읍소재지인 여래리는 옛날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풍수설에 따라 진영(陣營)의 형국이며, 금병산을 상제봉조형(上帝奉詔形)으로 보고, 여래리 동쪽을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으로 생각하여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산마루에 선달바우가 있음.

진영 금병산(金屛山)

진영리의 뒷산이며, 금병산(錦屛山), 검병산(儉屛山)으로도 쓴다.

비단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중군봉의 남쪽에 상제가 조서를 받들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다.

석룡산

석룡이라는 효자가 이 산중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무척산

식산, 무축산, 무착산이라고도 하며, 산정의 천지는 수로왕의 국장때 판 것이라고 전한다. 중복에는 모은암, 동쪽에는 백운암이있다. 김해시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시산

낙동강가에 있는 작은 숟가락 모양의 구릉인데 무척산과 대치하고 있다

태종산

조선시대에 산하의 동민들이 모여서 칠석놀이를 하고 복을 빌었다는 산이다.

자암산

가락때부터 고찰인 자암이 있었고, 분산봉에서 전달을 받은 자암봉수대가 있었다

장유 금병산

태정산의 지맥으로 병품처럼 길게 둘러쳐져 있어 김해시와 강서구 녹산동의 경계가 되고 있다

태정산

장유화상이 처음 이곳에 장유사를 지었기 때문에 장유산이라 불렀다. 가락왕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이 있고 그 곁에 태장사, 뒤에 임강사라는 절이 있었다

굴암산

옛날 이 산의 웅천쪽에 굴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산중턱의 성흥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팔판산

웅천의 천자봉으로부터 동으로 달려온 곳에 팔판골이 있다. 여기서 3상과 8판서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 내려온다.

불모산

수로와의 7왕자가 모후 허씨를 불모로 모셨기 때문이며, 장유화상이 창건한 장유사가 있다.

용지붕

용제봉이라고도 하며 비룡상천형의 명당이 있기 때문이다. 시와 창원시의 경계가 되어, 한말까지 기우단이 있었다.

노현산

옛날 김해왕 서부 경남을 연결하는 국도에있는 고개로 노티재라고 불렀다

칠점산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에 있으며 가락국 거등황때 탐시선인이 살았다고 하는 바닷속의 일곱 무더기 산이었다가 일제시대말부터 비행장 공사를 하느라 차츰 깍아버려 하나만 간신히 남아 있으며, 김해공항이 있다.

조차산

대동면 주동리에 있으며, 조식의 아들 차산을 묻은곳이라고 한다

백두산

대동면 초청리 뒷산이며, 일명 방산이다

덕산

대동면 덕산리에 있으며 산아래 백룡암과 덕산역이 있었다

전산

난산이라고도 하며 활천동의 북쪽에 있다. [대동지지]에는 이곳을 옛날의 망산도라고 적혀 있다.

칠봉산

칠산동의 뒷산으로 일곱 봉우리가 연달아 솟아 있어 칠산면의 유래가 되었고 산 아래에는 일곱 마을과 일곱 우물이 있다

신어산

삼방동에 있어 김해시와 상동면의 경계가 되며 선어산이라고도 한다. 지금 은하사·영구암 등의 고찰이 있으며 한말까지 기우단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산 속에 구암사,십선사, 청량사, 이세사가 있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가락국때부터 이 산이 불교의 성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어는 인도 아유타국의 상징으로서 수로왕릉의 정문에 새겨진 두 마리의 고기와 함께 밀양 만어산의 전설이 있는 바와 같이 가락국의 상징이 되었다

분산

동상·어방동의 경계이며 부성의 진산이다. 분산성(사적 제 66호)이 남아있고, 만장대, 타고봉, 해은사, 기우단, 봉수대 등이 있었다

전산

김해시 삼정동. 옛날 어떤 마귀할멈이 산을 짊어지고 오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보고 "산이 오네"하고 외치는 바람에 놀라서 그 자리에 놓아 버렸다고 그 자리를 전산이라 한다.

장 한사발 굼텅이

김해시 구산동 2구. 옛날 흉년에 어떤 부자가 이곳 논과 장 한사발과 바꾸었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전하

옛날에는 이 일대가 바다였고, 갈대가 무성했다고 한다. 한때는 큰배가 드나들었다.

활천

활천(活川)은 활처럼 휘어 흐르기 때문에 활천이라 한다. 지금은 신어천(神魚川) 이라 부른다.

삼정곡

남산(南山)밑에 있는 골짜기인데 3정승(政丞)이 나올 자리라고 한다.

애구지

대성동 2구 "논실" 윗편에 위치한 터로 새끼 구지봉이라고도 하며 대성동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대성동고분군이라 한다.

논실

대성동 2구 본마을. 김해시에서 최초로 생긴 마을으로 수로왕때 신답평(新沓坪)이라 불렀다.

초선대

안동의 조그마한 동산. 옛날 신선들이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장수가 무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자기가 있었던 표적이라도 남겨둔다면서 큰 발에 힘을 주었더니 발자국 하나가 크게 움푹 패여 들어갔다고 한다. 가락국 거등왕이 칠점산의 참시선인을 초대하여 놀았다고 전한다.

초선대는 초현대라고도 하며 거등왕이 선인을 초청해서 바둑을 두고 즐겼는데 왕이 앉은 자리인 연화석과 바둑을 둔 기국석(棋局石)이 남아 있다.

함박산

흥동 1구. 조선시대때 전국이 장마철에 접어들어 온 집과 산은 물에 잠겼으나 이 산 봉우리만은 함박꽃 크기만큼 잠기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구지봉

구산동 1구에 있는 조그만 독메산. "개라봉"이라고도 하며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탄생지라 전하며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9간 등이 불렀던 구지가가 전하며 탄강비가 서 있다.

김해의 수호산 남산

부원동 "남산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금관가야 시절 김해평야가 바다였기 때문에 당시의 놀이터로 "남산"이라 하였다.

영웅이, 영운이

신어천 상류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고 안개가 끼는 일이 많다. 일설에 산신령이 구름타고 내려와서 놀았다고 한다.

구내, 괴네

삼방동 3구, 옛날 내(川)가 흐르던 곳에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옛고(古)"자 "내천(川)"자를 써서 고천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물망골

안동마을, 안동 동쪽 골짜기, 옛날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어 여름철에 물이 많았으나 30여년전에 매몰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져 물망골(水亡谷)이라 했다.

마마

뒷산등이 말의 형국이므로 말이 삼대(麻)같이 번창하라고 마마(馬麻)라고 했다고 하며 1968년 5월 한일합섬과 1973년 7월 한영요업, 1974년 7월 한국스핀돌등 기업체가 입주하여 공업지대가 조성되었다.

화티바위

무점 뒤에 있는 바위로서 화투모양으로 생겼다.

지윽길

흥동과의 경계이며, 함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이다.

지계천

못개 도랑. 내동의 안뜰 복판에 있는 응수로이다.

줄띠

임호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로 줄띠라는 풀이 많이 자생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봉곡천이라고도 한다.

임호산

유민산. 가조산. 호구산. 안민산. 봉명산. 임어산. 약산 등 여러가지 별칭이 있다.

대부분 호랑이 형상같다고 임호산이라 부르며 호랑이의 벌린 입이 너무 험악하다고 악산이라고도 부른다. 가락국 장유화상이 이 호랑이의 입이 되는 곳에 절을 세워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다고 안민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전설에는 가락국 9대 겸지왕(숙왕)때 여의낭자와 정혼한 황세장군을 왕이 유민공주의 부마로 삼았으므로 여의는 파혼의 고민끝에 죽고 황세 또한 여의를 그리다가 죽어 버렸다. 유민공주도 경운도사를 따라서 임호산에 들어가 입산수도했으므로 산 이름을 유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암

소바위이며, 쇠바위(金岩)가 소바위가 됐다고 하기도 하고, 소(牛)같이 생긴 바위의 형상을 따서 우암(牛岩)으로 부르기도 한다.

외동고개

일명 선지고개. 김해시 외동과 주촌면과의 경계가 된다.

애기릉

내동 1통 뒤에 있는 조그마한 분지를 말한다.

수인사

운참사의 옛터에 경운재가 있다가 1956년 수인사를 세웠는데 5층석탑이 있다.

봉곡

나비가 춤추는 모양의 지형 때문에 무접(舞蝶)이라고 한 것을 지금은 무점이라고 부른다. 고종초에 정현식부사가 중국 금릉(남경)의 검승을 본받아 임호산을 봉명산이라고 하고 이 마을을 봉곡리라고 고쳤다. 1914년 외동리에 병합되었다.

물레바위

우암뒤의 바위이며, 그 아래는 계곡이다.

모유정

중종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류용이 공북정(拱北亭)을 지었는데, 순조5년(1805) 기인리로 이전하였다 미식재라고도 하다가 1987.5 운산재로 고쳤다.

대밑골

거북산과 함악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당산할머니

1통의 새 각단에 있는 바위 너덜이며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은 형국이다. 정원 초 3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경원교

대성동과 연결하는 다리로서 1992년 준공했다. 이 다리에서 대성동 3거리까지의 길을 구지로라고 이름지었다.

경운산

높이 398m로 옛날 운참산으로 조선초기까지 운참사가 있었다. 읍지(邑誌)에 김일손(金馹孫)이 운참사의 승 지즙(僧智楫)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다.

거인리

외동의 옛명칭이며, 마을 앞의 정자나무인 은행은 도나무로 지정되어 있다.(수령 500년, 높이 18m, 둘레 5.5m 이다.)

거북산

외동 서쪽의 거북모양으로 생긴 산이다.

무접

외동 임호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나비가 춤추는 형국이라 해서 무접(舞蝶)마을이라고 하여 지금은 무점이라고 부른다. 고종초에 정현석 부사가 중국 금능(金陵:南慶)의 경승을 본 받아 임호산을 봉명산(鳳鳴山)이라 하고 이 마을을 봉곡리(鳳谷里)라 고쳤다.

고조산

분산(盆山)줄기의 끝인데 개가 엎드린 모양(복구형伏狗形)이라고 개혈(穴)이라고도 부른다. 부원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이 산의 남단에 있었던 공동묘지가 없어지고 취토장이 되었다가 그 자리에 시청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산은 원뫼뿌리라고 하며, 분성산(盆城山)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좌룡맥(左龍脈)이 이곳에서 반전(返轉) 하여 읍내를 되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므로 고조산(顧祖山)이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말기까지 이 산에 성황당(城隍堂), 기우단(祈雨壇) 등이 있었다.

호계천

현재 부원 8통과 부원 9통을 관통해 지나며 북쪽으로는 부원 3통과 부원 12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보통 남문밖다리라고 부른다. 1933년 국도 개통과 함께 호계교가 가설되어 오랫동안 김해읍의 입구가 되어 왔다. 남쪽은 강창포(江倉浦)에 이르고, 세월이 오래되어 모래가 쌓이므로 정조 14년(1790년)에는 내를 곧게 만들었다. 순조(純祖)31년(1831년) 직천(直川)은 읍기(邑基)에 해롭다고 부사 권복(權馥)이 또 다시 곡천(曲川)으로 고쳤다고 한다.

남지터

현재 김해중학교 앞에 있었던 큰 못터이다. 이 못은 정조 13년(1789) 부사 김우현(金禹鉉)이 읍기(邑基)에 도움이 되고, 부민(府民)에 좋다고 하여 새로 판 못이다. 주위가 1,020척(尺)이었다. 1956년 4월 못의 북부에 김해중학교가 들어서고, 1977년 2월 김해군청(현 가야세무서)을 착공하여 1978년 4월 준공되었으나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양장골

양중골 이라고도 하며 불암과 지내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양장(良將)은 양동(良洞)으로도 불려졌으며 그 서쪽 이수(梨樹)의 동쪽에는 흰 학이 숲에서 춤추는 모양의 백조무림형(白鳥舞林形)의 명당이 있어 다자손(多子孫) 대부귀(大富貴)의 땅이라고 한다.

배중개

이수(梨樹)라고 하며, 예종때 지리지에 활천리의 이수개원(梨樹介院)이 있다고 했는데, 남역에서 청석의 남정원을 지나 이곳에서 고개를 넘어 대동면으로 가는 역로에 있었던 원우(阮宇)였다. 또한 배징개라고도 했는데 이는 풍랑시 배를 정박하였기에 불려진 이름이다.

평지말

내동 2구, 평전(坪田)이라고도 했으며 동네가 비록 산 바로 아래에 있으나 대체로 평평하고 모양이 말처럼 생긴 지명임. (참고자료/ 김해의 역사)

(영남매일. YN뉴스,  '김해바로 알기'  기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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