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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김해 사충신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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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김해 사충신 재조명한다
  • 최금연 기자
  • 승인 2018.12.03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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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인제대 인정관에서 `김해성(城) 사충단 학술회의`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의병의 시초가 된 `김해 사충신`이 이제사 온전한 예우를 받을 모양이다.

오는 7일 인제대 인정관 대강당에서 `김해성(城) 사충단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김해시가 주최하고 인제대박물관이 주관하며 김해 사충신과 관련한 논문 발표와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된다.

▲김태영 동서대 교수의 `임진왜란 김해성 전투` ▲임종욱 진주교대 교수의 `사충신의 묘갈ㆍ행장ㆍ비문`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의 `김해성 사충신과 향촌사회의 변화` ▲조구호 경상대 남명학연구원 교수의 `사충단 향사과정과 역사적 전개`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질 계획이다.

김해 사충신은 ▲송빈(1542~1592) ▲이대형(1543~1592) ▲김득기(1549~1592) ▲류식(1552~1592) 등 4명의 의병장으로 왜적에 맞서 김해성(城)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순절했다.

김해 의병은 관군 없이 싸웠다. 하루만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나흘 동안 줄기차게 싸웠다.

김해부사와 초계군수가 달아난 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김해 사람 수백 명은 관군 없이 성을 지켰다.

먼저 초계군수가 달아나고 김해부사는 군수를 잡으러 간다는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고 성 밖으로 도주했다.

성은 결국 중과부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적들은 투항을 권고했지만 네 사람은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의병들과 함께 끝까지 적들 한가운데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수백 의병들도 모두 죽었다.

며칠 뒤 송빈의 군사 양업손(梁業孫)이 시쳇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살아나와 김해읍성의 장렬한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 덕분에 네 충신들은 전란이 끝난 1600년(선조 33) 병조참의 등 벼슬을 추증받았다. 하지만 그뿐, 다시 역사 속에 묻혔다.

1708년(숙종 34), 이순신의 현손 이봉상이 김해부사로 와서 `금주지(金州誌)`를 보다가 김해읍성 전투의 전말을 알고 감격했다. 그가 나서서 조정에 건의한 끝에 송담서원이 건립되었다.

1833년(순조 33)에는 표충사(表忠祠) 사액도 받았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지만 1871년(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 등의 상소에 힘입어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서원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되었다.

시는 김해성으로 쳐들어 온 왜적에 맞서 사흘 간 성을 지키다 순국한 음력 4월 20일을 정해 매년 제례를 올리며 우국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다.

임원식 시 문화재과장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해 사충신을 조명해 잘 알려지지 않은 김해지역 의병 연구에 의미 있는 첫 발을 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해 사충단 표충회에서는 네 분을 향사(표충사) 하는 송담서원지(松潭書院誌)를 발간했으며 서원지를 통해 역사적 사실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못하고 있는 김해 의병사의 진실이 소상하게 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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