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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보다 높은 벼슬 받은 최초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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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보다 높은 벼슬 받은 최초 의병장
  • 편집부
  • 승인 2022.09.23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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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보다 높은 벼슬 받은 최초 의병장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경남매일 2022.1.13.일자보도>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으로는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과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금강산의 사명대사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곽재우 장군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라고 사람들에게 많이 인식되어져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효시는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이 김해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김해성 전투에서 의병을 끌어모아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김해 출신의 사충신 송 빈, 김득기, 이대형, 유 식 4명의 의병장이 그 주인공이다.

 먼저, 송 빈, 김해 하계리(진영)에서 태어나 8세부터 공부를 시작홰 곧 문리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는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부사 서예원이 고을의 명망이 있는 선비이므로 함께 의논하자고 청한 것에 답변으로 팔성사(진례면 신안리)에서 독서 중인 장자 정백에게 모를 모시고 아우와 함께 집안을 잘 다스리라고 하며 김해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대형은 김해 활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독서에 힘써 고을에 공론으로 천거됐으나 채용되지 못했으므로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활천리에서 어버이를 봉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0세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두 아들이 소매를 잡고 같이 가기를 칭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장정 백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며 송 빈, 김득기, 유 식과 함께 성을 지켰다.

 김득기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입신출세할 때가 아니라고 향리에 돌아와 유유자적 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김해성으로 들어오자 도포 한 벌과 한 줌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며 병중의 아내 신씨와 작별하고 입성해 동문의 수비를 맡았다고 한다.

 4명 중 마지막 의병장으로 유 식은 어릴 때 부터 학문에 몰두하다가 벼슬 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강개한 뜻을 품고 살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월당진(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 온 것을 보고 "우리 집안이 대대로 국은을 입어왔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가인과 더불어 집안 노북을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김해인물지>에 기록돼 있던 사충신을 보면 1952년 4월 14일과 15일 각각 하루 만에 함락되고 있던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맡았고, 김해성에 주장이 성을 나가버린 상황에서도 4월 17일부터 20일까지 무려 4일을 버텼다. 사충신과 김해 백성들이 처절하게 싸우다가 순절하거나 포로가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또, <송담서원지>와 <송담서원약지>에 기록되어 있는 사충단, 송담서원, 표충사의 연혁을 보면 영조 18년(1741년) 표충사가 1708년에 세워졌으나 집사자가 조정에 무자년을 무술년으로 잘못 혼동 보고하는 바람에 훼철대상에 포함돼 훼철됐다. 정조8년(1784년), 경상도 유림들의 표충사 재건 상소로 진례면 신안리 무송에 복설됐다.

 순조 원년에는 순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2번째 훼철됐다. 순조 24년(1842년) 도내 유림들의 20년에 걸친 복원 상소로 순조의 윤허를 얻어 다시 복설되고 사호를 올려 송담서원, 송담사로 다시 불리었다. 고종 5년(1868년)에는 송담서원, 표충사가 흥선대원군이 서원 훼철령에 의해 3번째 훼철됐고 동년에 삼충실기가 간행됐다.

 그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46년까지 36년간 일본의 탄압으로 향사를 받들지 못했지만 1946년 사충신의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오래도록 전승하며 김해 사충단 표충화를 결성 후 매년 순절일인 음력 4월 20일 향사를 받들었다.

 1952년 창의순국 360주년 기념식을 관민일치로 성대하게 거행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현재의 동상동 161번지로 이전하며 송담서원과 표충사를 복원하는 등 사충단, 송담서원, 표충사가 현재 위치에 오기까지는 많은 곡절과 과정이 있었다.

 사충단, 송담서원, 표충사가 현재 위치에 오기까지 많은 곡절과 과정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고종 12년(1875년) 송빈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이대형은 가선대부 호조 참판, 김득기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유 식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됐다. 참판은 종2품 관직으로 현재의 차관을 말하는데, 김해부사(종3품)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품계의 벼슬을 추증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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