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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9)-아유타국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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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9)-아유타국으로 가는 길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6.23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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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가락국은 해상별국(海上別國)으로 그 당시 이 지역에서는 최대 최강의 해운국이었음은 분명하다.

바다의 실크로오드
제3의 길은 광주(廣州^廣東)에서 시작하는 해로(海路)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돌아 마래카해엽을 지나, 갠지스강의 하구(河口)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통로는 인도의 배가 전담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뱅갈만에서 상품(商品^실크)을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 어느 지점에서 항행을 중지하고, 거기서 상품은 육로(陸路)로 서해안(西海岸)으로 운반되어 페르샤, 아랍 그리고 그 다음에 유럽의 무역상인(貿易商人)에게 사들여졌다.

……1세기의 끝무렵, 지중해 제국(地中海 諸國)에 수입(輸入)된 비단의 대부분은 해로(海路)로 운반된 것으로, 육로를 거친 것은 아니었다.

   
 
  허 공주의 항로 추정도.  
 

이것은 프랑스의 동양사료(東洋史料) 전문가인 류셋트 브르노아(Lucette Boulnois)가 쓴 <실크로드>의 증언이다.

동양의 실크를 매개로한 고대의 동서양 교류의 길인 실크로우드는 크게 새갈래의 루우트로 구분된다.

가장 북쪽 루우트인 스탭(초원) 루우트와 사막을 가로지르는 오아시스 루우트 그리고, 브르노아가 추정한 제3의 길인. 해상(海上) 루우트가 그것이다. 그런데, 실크의 수요가 피이크에 달하던 1세기말의 실크는 위의두 루우트를 거친 것이 아니라, 바다길을 거친 비단이었다는 것을 문헌과 고고학적 분석해서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현재 유럽에서 발견되는 1세기 말엽의 비단들은 중국, 북부지방(華北)에서 수집한 비단과는 다른 천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 비단들은 중국 남쪽(華南), 광주(廣州)를 거점으로 수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락국 일대를 변진(弁辰)이라고 불러, 기록한 한말(漢末)의 대표적 사서인 <삼국지(三國志)>가 증언한 가락국의 겸포(謙布)가 주축을 이룬 실크가 제3의 길로 유럽에 온 비단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가락국은 해상별국(海上別國)으로 그 당시 이 지역에서는 최대 최강의 해운국이었음은 분명하다.

이처럼 귀족들에게는 황금(黃金)의 무게와 맞바꾸어 거래되었다는 비단 생산지로서는 중국의 사서(史書)가 특기하는 비단 생산 능력을 가진 가락국이, 실크로우드 가운데도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해상 루우트와 무관할 리가 없을 것이다.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자락에 있는 수로왕비릉과 파사석탑.  
 

그렇다면, 수로왕과 왕후의 본국 아유타국은 이 실크 루우트로 해서 활발한 교류가 사전에 있었고, 왕후 간택의 중대사도 구(九)간들 몰래 진행하고 있었음이 분명 해진다.

   
 
  김수로왕비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  
 

남이 모르는 수로왕의 행동력-그것이 곧 천명(天命)을 받느는 분으로, 또 선지(先知)하는 초능력으로 범상의 눈에 비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왕후의 본국 아유타국(阿踰陀國)은 과연 어딘가?

왕후가 서기 48년 음력 5월중에 떠난 항구는 오늘 우리들의 지도에서는 어디가 될 것인가?

분명히 어국칭의 자리에서 왕후는 자기가 아유타국 공주라고 신분을 밝혔다. 이 신상발언에 이르기까지 약 1천5백자의 <가락국기>의 기록은 그것이 사실일 수 없다고 명백히 밝힐 수 있는 귀절이 없었다.

그리고 보면, 비록 `아유타국 공주`라는 것이 우리의 고대관(古代觀)과 동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을 황당한 얘기라 규정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은 왕후의 출자(出自)에 대해 언급한 모든 사료(史料)들을 모아 보고 그것을 살펴볼 일이 우리들의 해야할 일이다.

그 아유타국에 관해서는 같은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陀國)`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살핀 바있다. 이번에는 <김해김씨선원세보(金海金氏璿源世譜)>가 세전(世傳)해 온 가사(家史)의 문헌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일 자세하게 왕후의 본국에 언급한 기록은 우상(右相) 허목(許穆)의 <보주허태후능비음기(普州許太后陵碑陰記)>인데, 거기에태후(太后)의 성(姓)은 허씨(許氏)이며, 보첩(譜牒)은 아유타국군지녀(阿踰陀國君之女)라 기(記)하였고, 금관고사(金官古事)는 혹왈(或曰)하여 남천축국군지녀(南天竺國君之女)라 하였고, 우왈(又曰)하기를 자언(自言) 서역허국군지녀(西域許國君之女)하 하였고, 혹왈(或曰) 하기를 허황지국(許黃之國)이라 하였는데, 방외(方外)의 별국(別國)이라 그 일국(一國)을 호칭(互稱)하였음이니라.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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