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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실체, 수로왕ㆍ허왕후 무덤 발굴해 밝혀야"가야시대 정신적ㆍ문화적 가치체계는 `불교가 담당했다`
조민규 기자 | 승인 2017.10.31 11:45
▲ 허성곤 김해시장과 가야불교진흥원 이사장 인해스님 등이 자리했다.

"가락국 48년. 허황옥이 인도로부터 오빠 장유화상과 다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와서 왕후가 됐다. 즉 가야의 건국과 우리나라 불교의 최초 도래가 시간적으로 궤(軌)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2017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 학술대회`가 지난 28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김해문화원 공연장에서 관심을 끌었다.

학술대회의 주제 자체가 다소 가야불교 범주를 넘어서는 인상도 주지만, 가야불교를 하나의 담론(談論)으로 엮어가기 위해서는 고대 해상왕국 가야와 그 가야를 일군 가야인들의 풍부한 서사(敍事)를 듣고자 이번 학술대회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이라는 큰 주제로 8명의 발표자가 나섰다.

축사에서 인해스님(가야불교진흥원 이사장, 김해바라밀선원 주지)은 "신화나 설화는 그 당시의 사회성과 사상을 내포하기 때문에 과거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열쇠의 역할을 한다"며 "신화는 정사(正史)와 달리 사료를 분석할 때 부수적인 자료의 가치로만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해스님은 "신화는 민간의 시각에서, 비록 정사처럼 세련되지 않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서술되었기에 더욱 진솔하고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작성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인해스님은 "김해지역에는 가야불교와 관련된 전설이 20여개나 있다"면서 "가야불교 연결된 허황후의 신행길, 장유화상 사리탑 등은 씨족사회가 조작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님과 동시에 역사와 문화의 관계로 늘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고 피력했다.

가야불교에 대한 이해는 가야문화의 이해로 이어진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고 재해석한 것이다.

기조발표에 나선 박맹언 부경대 교수는 "고대 가야는 제철산업을 바탕으로 500여 년 동안 신라, 백제, 고구려에 뒤지지 않은 찬란한 문화를 형성했다"며 "가야 제철산업의 우수성은 역사기록과 고고학 유물에서 확인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최근 가야시대의 제련과 배소시설, 용해로, 단야로, 소성유구뿐만 아니라 철광석, 슬래그, 철재 등이 함께 나오는 제철유적이 김해 하계리와 여래리를 비롯하여 양산, 물금, 창원 봉림동과 성산패총에서 대규모로 발굴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가야는 당시 최고의 제철기술을 지닌 과학기술 선진국 이었을까?

그래서 박맹언 교수는 "지금부터 우리는 가야시대 철광산과 제철단지를 비롯해 외국과 교역한 항구를 찾아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해야 한다"면서 "가야가 철생산을 장악하는 집단을 형성한 합리적인 증거와 제철기술과 철제품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발표에서 유 리 부산대 교수는 "현장 `대당서역기`와 중현의 `아미달마순정리론` 등 불교 관련 문헌에서 아유타라는 동일장소에서 4~5세기 동시대에 활동했던 무착, 세친, 상좌 슈리라타 등에서 그 당시의 불교 상황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그동안 상좌의 활동지가 아유타라는 것을 현장은 언급했는데도 불고하고 확증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논사의 활동했을지도 모르는 아유타를 가상의 공간으로 간주했지만 중현을 통해서 동시대를 살았던 제논사의 활동지가 바로 아유타라는 실제의 공간임이 발혔졌다"고 확언했다.

즉 아유타는 불교학의 산실(産室)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창원대 송재근 교수는 "`가락국기`가 가진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진다"고 지적하면서 "`가락국기`를 신조처럼 떠받드는 태도가 여전히 성행 중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가락국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새로운 연구가 나왔으면 한다"고 토로했다.

송 교수는 "`가야사`하면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잃어버린 왕국` 내지는 `잊혀진 역사`이다. 잃어버렸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찾으면 되고 잊혀졌다면 다시 상기하게끔 하면 된다. 문헌적 사료가 없다고 손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 사료를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간단히 말해서, 수로왕과 허왕후의 무덤을 발굴해서 그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진아 교수는 "수로왕의 가락국은 가야연맹의 맹주였을 가능성 크다. 마치 가야연맹보다 약 500년 앞서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델로스 동맹에서 아테네가 명주였듯이, 가야연맹은 호머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상국가로 묘사했던 파에아키아처럼 `항구도시`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가야는 어느 정도 위상의 해상국가로 성장했을까?

이 교수는 "기원 직전부터 서기 500년경까지 일대를 주름잡을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만한 가치있는 교역이 철(鐵)이다"고 말하면서 "가야연맹의 베이스캠프였던 낙동강 유역은 풍부한 철광석 산지이다"고 주장했다.

류춘길 한국지질연구소 소장은 "금관가야는 김해라는 지명 그대로 철과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나라 고대(古代)를 대표하는 제철무역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제 됐다"고 전망했다.

류 소장은 "가야시대 초기 1세기 중엽의 김해평양 일원은 내만(內灣)으로서 바다환경이었다"며 "내만의 북서쪽에 위치한 장유에서 주촌에 이르는 지역은 해안 굴곡이 심하여 곳곳에 만입지가 발달했고 낮은 수심으로 인해 조간대가 넓게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최현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허왕옥 도래할 때 경유한 지명 가운데 `삼국유사`에서 그 위치를 명기한 것은 망산도와 승재, 만전(慢殿)에 두었다는 왕후사 세곳 뿐이다"면서 "망산도와 승재는 각각 `서울 남쪽의 섬`, `연하의 나라`라 한 것을 토대로 각각 전산도와 활천고개로, 왕후사는 지금의 장유 응달리 태정 마을 일원이다"고 비정(比定)했다.

이러한 미시적 지리정보 외에 더 읽어내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 원장은 "그것은 바로 허황옥으로 표상되는 외래집단의 도래라는 사실이다"고 해석하면서 "바다를 건너 온 허황옥 일행은 한사잡물을 배에 싣고 서남쪽 바다를 돌아서 가락국의 남쪽 해안에 도래했다"고 설명했다.

이정룡 두류문화연구원 연구원은 "허왕후의 행로는 서남쪽 내만으로 진입하여 가락국 궁궐에 이르렀으며 조만강 중상류의 강역에 형성된 당시의 물길을 따라 풍유동 일원(別浦津)까지 이동한 후 뭍에 내렸고 그 이후는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가늠했다.

인제대 권서용 연구원은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정사라고 간주하는 `삼국사기`의 역사기술 때문이다"라면서 "가야는 엄연히 500년간이나 존재햇음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적 역사관과 승자 중심의 왜곡된 역사 기술로 인해 `잊혀진 역사`였다"고 예단했다.

하지만 권 연구원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필도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들에 이르러 가야는 삼국(三國)에서 배제된 역사가 아니라 그들과 자웅(雌雄)을 겨룬 사국(四國)의 성원으로 복권하게 된다"고 자평했다.

가야의 정신적ㆍ문화적 가치체계는 불교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조민규 기자  cm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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