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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그림 '무릉도원 2' 작가를 찾았다
최금연 기자 | 승인 2019.08.20 16:12

김해 '행복1%나눔재단' 소장 '천원의 행복밥집' 전시 중인 대작 유화
1971년 작고한 북한 대표적 미술가 이석호(李碩鎬) 화백으로 밝혀져
소장자 1989년 구입했지만 작가와 작품에 관한 정보 없어 소장 전시
1997년 북한그림 경매자료와 2019년 7월 5일 오마이뉴스 통해 확인
그림 폭100cm 길이 240cm 화선지 흑지, 표구액자비만 1,000,000원

1987년부터 김해 수로왕릉 정문 앞 2층 김해불교문화원에서 운영하던 그림 판매장(대표 조유식)이 있었다.

나중에 1층으로 옮겨 '길 화랑'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했다.

김해불교문화원을 운영 하던 시절 중국을 오가며 그림을 구입하여 국내 화랑가에 판매하는 도매업자가 있었는데 그때 제법 큰돈을 주고 산 그림이 지금의 북한그림 '무릉도원'이다.

당시 국내 화선지 제작기술로는 국선지 이상 생산이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폭 1미터 이상에 길이 또한 2미터가 넘는 원지인 이 그림의 화선지는 북한의 화선지 생산 기술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주로 경남 의령에서 생산 되던 국내 화선지는 흰색 즉, 원색을 바탕으로 생산했지만 북한 그림의 화선지는 흑지였기때문에 그림을 본 김해 미술가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특별한 것은 그림을 볼 때는 일반 미술 작품으로 보이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유화임을 알 수 있다.

미술가들은 이 그림의 원료는 북한에서 생산되는 천연 돌가루를 응용하여 채색한 것이라고 평했다.

30년 동안 소장해 온 이 그림에 대해 정확한 작품명도 모르고 작가는 누군인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단지 북한 그림이라는 사실과 무릉도원일 것이라는 추정만 했을 뿐이었는데 지난달 우연하게 이 그림과 동일한 그림이 1997년 경매 사이트에서 고가에 경매되자 언론에서 크게 보도 했던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작가는 이석호 화백, 작품명은 '무릉도원 2'로 밝혀졌다고 했다.

북한 그림 전문가들로부터 확인을 받았다는 '무릉도원 2'는 현재 국내에서 보기 힘든 귀한 작품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이 떠받드는 유명 미술가의 대표작품이 김해에서 30년 동안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북한그림과 이석호 화백의 정취를 느껴 보자는 미술가들이 김해를 들리겠다는 전화도 자주 온다고 했다.

30년 전 그림 폭만 100cm가 넘고 길이 또한 240cm가 넘는 이 대작을 표구하여 액자로 제작하는 데만 1,000,000원이 들었으며 그림을 싣고 온 화물 운반비도 상당했다고 한다.

표구는 부산서 제일 잘 한다는 동래 범어사 단골 표구점인 부산 대학교 앞 표구점에서 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태가 양호했다.

그림 전시 장소 경남 김해시 가락로 29번길 4, 천원의 행복밥집

 

일관(一觀) 이석호(李碩鎬) 화백에 대한 오마이 뉴스 보도 전문
황정수의 서울미술기행 : 북촌·인사동편 12

북한이 떠받든 월북 화가, 그 특별한 이유

남과 북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서화가 일관 이석호

1945년 해방이 되자 광복된 조국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치달았다. 미술계도 보수적인 민족진영과 급진적인 진보세력으로 나뉘며 혼란스러운 해방공간을 지낸다. 이러한 혼돈은 6.25전쟁이 발발하며 각기 이념에 입각한 진영 논리에 따라 남과 북으로 나뉜다.

이런 결과로 친구들이었던 서양화가 김환기, 이중섭 등은 남쪽에 남고, 김용준, 이쾌대, 최재덕, 정현웅 등은 이념을 좇아 북쪽으로 향한다. 또한 동양화가 장우성, 배렴 등 보수적 성향의 인물은 역시 남쪽에 남고 이석호, 정종여 등은 북쪽으로 간다.

이런 극단적인 만남과 헤어짐은 이후 한국 미술사 방향의 추를 정 반대의 극지로 몰았다. 결국 남북 분단은 두 지역의 미술을 원천은 같으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양쪽 미술가들은 처음에는 각각 새로운 이념에 맞는 미술로 전환하며 신념에 찬 새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라 괴리감을 느낀 이들은 대부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변화에 따른 부침이 많았다.

분단 전에 상당한 권위를 누렸던 이들은 지속해서 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오히려 대단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으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한 이들이 전면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주의 노선을 택한 북쪽에서 더욱 강하였다. 분단 전에 남쪽 미술계에서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김용준, 이쾌대 등은 얼마 후 전면에서 사라진 반면, 정현웅, 이석호, 정종여와 같은 화가들은 북쪽에 가서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승 김은호와 이석호

북쪽으로 간 화가들 중 가장 뚜렷한 활동을 한 이색적인 화가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일관(一觀) 이석호(李碩鎬, 1904-1971)이다.

이석호는 일제강점기에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제자로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1906-1978) 다음으로 이른 시기에 김은호 문하에 입문한 서화가이다. 그는 김은호와 만났을 때 이미 서예를 익혀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재주를 눈여겨 본 김은호가 자신의 화숙으로 이끌어 들여 제자로 삼은 특이한 경우이다.

이석호는 본래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한문 사숙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우며 훌륭한 서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서예로 활동하였는데, 1928년 무렵부터 김은호의 눈에 띄어 문하생이 되었다.

이석호는 본래 서예와 문인화를 주로 하였으나 김은호의 화숙에 다니며 점차 채색화에 전념하여 공부하였다. 그래서인지 보통 이석호의 초기 작품 세계를 평가할 때 전통적 채색화법을 배웠다고 기술하나, 실제 현전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다른 김은호의 제자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의 작품 소재와 주제는 주로 산수화에서 꽃·새·동물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이들 작품은 북종화 계열의 채색화라기보다는 남종화에 기반을 둔 채색화처럼 보이는 것이 많다.

또한 기법 면에서 보면 섬세한 사실적 묘사의 채색화를 잘하였다고 전하지만, 오히려 그의 장기는 문인화적 요소가 강한 채색화였다. 이는 그가 본래 서예에 깊이 빠져 일가를 이루고 있어 서예에서 나오는 '문기(文氣)'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의 매화 작품은 꽃보다는 가지를 중심으로 그렸는데, 잔가지의 굴곡을 심하게 표현하여 회화적 분위기를 한껏 내고 있다. 그림에 어울리는 화제 또한 수준급이어서 대개 높은 격조를 보인다.

이석호는 김은호의 화숙 낙청헌(絡靑軒)에서 멀지 않은 안국동에 단칸 셋방을 얻어 처자와 생활하면서 그림과 글씨를 열심히 익히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과묵해 말이 별로 없고 침착한 편이었다.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곰같이 우직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글씨와 그림은 누구보다 간결하고 섬세하여 마치 여성의 서화를 보는 듯 할 정도였다. 또한 그의 큰 체격답게 유도가 3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품성이 얌전하여 자신의 무도 실력에 대해 조금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석호는 1929년부터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고, 1934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에 거듭 입선하였으나 실력에 비해 뛰어난 성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이는 문인화적 취향이 강한 그의 작품이 당시 화단의 경향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36년에는 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조중현(趙重顯)·이유태(李惟台) 등과 김은호의 제자들 모임인 후소회(後素會)를 조직하여 1943년까지 6회의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1948년에는 당시 뜻을 같이 하던 친구들과 중요한 전시회를 연다. 이석호, 김기창, 정종여, 이팔찬, 이건영, 조중현, 박래현 등 7인이 모여 동화화랑에서 '동양화 7인전'을 연다.

이 전시회는 반응이 좋았던 데다 친구들의 호흡도 좋았다.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회원들을 규합하여 '서울동양화연구소' 개설한다. 이들 모두 그림에 대한 욕구가 절실하였던 때라, 이 연구소 시절에 그린 작품들 중에 뛰어난 작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석호의 뜻밖의 월북

6.25전쟁이 일어나 남북으로 분열되자 당시 진보 지식인들 중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많은 이들이 북쪽의 사회주의를 택해 월북한다. 보란 듯이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인물들 뿐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색채를 잘 보이지 않던 진중한 지식인들 중에도 상당수가 북쪽을 택해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화가 김용준이나 시인 정지용 등은 그리 급진적인 성향의 예술가들이 아니었는데도 북쪽을 택해, 그들의 월북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석호가 사회주의 사상을 택해 월북한 것 또한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는 평소 체격이 크고 남성적으로 보였지만 품성은 늘 유순했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크게 두드러진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석호는 북쪽의 편에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석호의 후배로 역시 김은호의 문하생인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은 당시 이석호가 사상적 전환을 보인 순간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이석호는 해방 후 혼란기에 좌우 갈등이 심각하여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노출할 당시에도 별로 자기 속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동안 행적이 묘연해지더니 6.25가 터지기 2개월 전쯤 이른 식전에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들고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석호는 별말 없이 방으로 들어와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의 행적을 물으니 더듬거리며 대답을 피하더란다. 대신 가방 속에서 조그만 화첩을 꺼내더니 거기에다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고 하였다. 아침상을 차려주며 화첩을 두고 가면 그려 놓을 테니 다시 와서 가져가라 하였다.

그랬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상을 물리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 휑하니 사라졌다고 한다. 필시 북쪽으로 넘어가 헤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고, 친구들의 그림을 한 점씩이라도 받아가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에서 이석호의 활동

이석호는 6·25전쟁 후 북한으로 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조선화분과위원장과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과 초빙교원 등을 지내며 사회주의 아래의 북쪽에서도 성공한 미술인이 된다.

대개 북쪽으로 넘어간 화가들은 새로운 정치 체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의 미술활동을 한다. 개인적인 정서보다는 체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의 미술을 지향하였다. 사회주의의 집단적 삶을 옹호하는 내용이거나 정치적 목적을 찬양하는 것이거나 지도자의 삶을 우상화는 그림 등 목적을 위한 미술을 주로 하였다.

이전에 서정적 취향의 그림을 그렸던 김용준, 정종여 등의 작가들이나 자연친화적인 인상파 미술에 경도되었던 김주경, 길진섭 등 서양화들도 모두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석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동안 자신이 지녀온 미술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정치적 선전물로서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이석호만은 자연을 소재로 한 낭만적 성향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이색적인 일이었다.

북쪽에서 지낸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 활동이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석호의 경우는 제법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북쪽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으며 지냈고, 1971년 사망한 후 20년이 지난 1992년 평양 예술교육출판사에서 '조선화 화가 리석호의 화첩'이라는 대형 도록을 출판하는 등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이 도록에는 그의 작품 일천여 점 중 200여 점의 풍경화와 화조화가 실려 있다.

당시 북한의 실정에서 이렇게나마 좋은 화집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정일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이석호의 작품은 특히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좋아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자 김정일의 지시로 전시회를 열고 도록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북한이 이석호를 이만큼 떠받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북한이 늘 자신들이 조선화의 전통적인 화법이라 자랑하는 '몰골(沒骨)기법'을 다른 기법들과 배합하여 당의 주체적인 문예사상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석호의 공적이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몰골기법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외곽선을 그리지 않고 대상을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오히려 일본 근대기의 '신남화'에서 유행한 '몽롱체(朦朧體)'와 유사한 것이다.

당시 북한 화단은 조선화의 과제로 화조화, 풍경화 뿐만 아니라 인물화에서도 몰골기법을 널리 도입하여 표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조선화의 민족적 형식을 사회주의적 내용에 맞게 보다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 미술계가 이석호의 몰골기법을 후배 화가들에게 올바로 전승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도록을 만든 것이다. 그만치 이석호의 몰골법은 북한 조선화의 기준이 되었다. 북한 화단은 이러한 방법론을 북한 미술의 주체의식이라 생각하였다.

이 도록을 살펴보면 산수화와 화조에 이르는 다양한 그의 작품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본래 이석호의 특징인 치밀하고 섬세한 화조화와 사실적인 채색화로서의 풍경화도 있고,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인 소품들도 간간히 끼어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백두산, 금강산을 그린 산수화와 소나무를 그린 작품이다. 백두산과 금강산 그림은 북한의 자랑인 명산을 기리는 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금강산 그림은 6.25전쟁 전 서울에서 활동할 때부터 즐겨 그리던 것인데, 북으로 간 다음부터 더욱 열정적으로 그린 듯하다.

기법적인 면에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때 사용하던 일본화의 수묵 몽롱체를 기반으로 하여 중국화의 활달함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색채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으로 느껴진다.

소나무를 그린 대작들도 눈에 띈다. 푸른 채색을 인상적으로 구사한 소나무 그림들은 정교하기도 하거니와 사실적 묘사가 매우 생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의 이러한 소나무는 중국 채색화와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개성이 보이는데, 이러한 면은 후대 북한 화가들이 소나무 그림을 주된 소재로 활용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수많은 화조 작품들도 있는데, 이들 그림은 모두 이석호의 서예로 닦여진 유려한 필치가 잘 발휘된 것들이다. 대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석호는 북쪽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며 화가로서의 삶을 잘 산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이라는 어려운 시대를 겪으며 살아간 이석호이지만, 화가로서는 체제가 다른 남북 양쪽 모두에서 비교적 행복한 삶을 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 이석호와 그 부인, '리석호의 화첩'(예술교육출판사, 1992)

최금연 기자  bbs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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