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부원동, 봉황동 구획정리사업을 추진했던 당시 조합장을 비롯하여 일부 임원 그리고 공사 업체 관계자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김해가 왜 이처럼 불균형적인 도시가 되었는지에 대해 후세들이 알아둘 필요가 있고 또 이 공사들로 인하여 수많은 김해의 인재들이 비상하지 못하고 있으며 재력가와 인물들도 함께 몰락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 역사를 조심스레 쓰고 있다는 점을 관계자들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필자는 김해사람이 아니지만 옛 선인들이 하시는 말씀들을 누구보다 많이 듣다 보니 김해의 정기와 지운 풍운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다.
선인들은 김해 남산의 끝자락인 입이 잘려나가고 남산의 머리 즉, 용의 머리라고 하는 활천고개 또한 약 20미터 깊이로 파헤쳐지면서 목이 잘려나가는 형국을 보고 김해의 앞날이 큰 일 이라며 대 걱정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삼계동과 생림면 고개 사이에 우뚝 서 있던 동매산까지 토취장으로 개발하여 산 자체를 들어내고 말았다. 이 산이 없어지고 난 이후부터 김해 읍내의 기운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삼계동, 구산동, 대성동, 내외동, 동상동, 서상동, 봉황동, 부원동에는 폭우와 우박, 눈, 태풍 등의 큰 영향 없이 평온했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맴돌던 곳이었다. 이처럼 이곳이 명지였던 관계로 김수로 왕릉이 읍내 중앙에 육군공병 부대와 공병학교가 삼계동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삼계동과 생림면 사이의 정상고개에 우뚝했던 이 산을 들어내고 난 이후부터 몰아치는 겨울바람과 눈보라를 비롯한 폭우로 춥고 더운 지역이 돼 버렸다.
이 산을 토취장으로 허가받아 공사를 한 기업과 활천고개 도로공사를 했던 기업 그리고 남산을 들어낸 기업은 김해의 대표적인 향토 건설 회사였다. 이들 공사 이후 당시 경남도의회 부의장이었던 이 회사 창업주가 구속되었으며 이 사건 후유증으로 그분은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나름대로 김해를 위해 봉사도 희생도 많이 했으며 김해장학에 수억 원을 기부하여 김해장학회 탄생을 견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이 운명하고 이세들이 대업을 이어받았지만 이런저런 구설수만 난무할 뿐 기업은 예전 같지 않다는 설도 있다.
김해시청을 남산으로 이전시켰던 막강했던 조합장과 임원 그리고 김해 토호세력들 또한 부원동, 봉황동 구획정리조합사업 추진 이후 하나 둘 몰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시민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리지고 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그토록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며 김해를 좌지우지했던 그분들의 재산과 명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김해시의 가장 중심지역에서 왼쪽으로는 동 김해지역을, 오른쪽으로는 서 김해를 바라보며 김해에 들어오는 악제들을 막고 풍요와 안녕을 위해 수만 년을 자리 잡아왔던 남산이 지각없는 토호세력들에 의해 망가져 버린 후 일어난 형상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남산을 비롯한 산등선을 파내고 아파트 및 터널공사를 했던 9개 종합건설사가 모두 부도났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김해 토호세력들의 몰락도 삼계고개, 활천고개 등 남산의 분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또한, 김해의 아파트 건설사로 백조아파트를 지어 분양하여 큰돈을 벌어들이는 등 잘 나가던 이 회사도 내외동 임호산 상층부 능선을 파내고 아파트 공사를 한 이후 부도났다.
김해의 악재는 이들 공사업체와 토호세력들뿐만 아니라 읍내에 살고 있는 고만고만하던 중견 재력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하나 둘 가훈이 기울기 시작했다. 김해의 부자로 불리던 그들의 후손들조차 안정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일찍이 세상을 등지고 있기도 하다.
피할 수 없는 조상들의 업보를 자식들 대에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