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매일·YN뉴스 기획특집 - 카메라고발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만평 구돌이선생
時도 아닌 것이
이슈단체 ㅡ 이슈인물
커뮤니티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3)
상태바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3)
  • 도명 스님
  • 승인 2020.07.27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2). 선행 연구자들의 망산도

허명철(許明徹) : 김해문화원이 간행한 1987년도 '김해문화' 제5호에 ‘허왕후(許王后)의 초행(初行)길’ 이란 제목의 글에서, ‘망산도는 욕망산이다.’라고 했다.

그 전문(全文) 옮기면, 망산도(望山島)의 조건은 관망대(觀望臺)이므로 상당히 높은 산으로 이루진 섬이며, 승점(乘岾)에서 쉽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 '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조하면 金海都護府에 望山島城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망산도에 城…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상의 조건에 합당할 수 있는 지점은 진해시 용원동 '夫人堂' 서남쪽에 있는 오늘날 지도상의 '욕망산'이라고 본다.

이 山은 약 2천년 전에는 섬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望山島’라고 주장하는 진해시 용원동에 있는 ‘말무섬’ (지도상의 명칭)이라는 섬은 '駕洛國記'에 기록된 望山島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섬은 해면으로부터 높이가 5m 밖에 되지 않으므로 觀望臺로서 부적합하며 약 2천년 전에는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마저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에 대해 진해의 향토사학자 황정덕(黃正德: 1927~ 2015.)도 같은 견해이다('경남향토사논총' 제10집 98쪽).

그러나 욕망산(欲望山)은 육망산(陸望山)이라고도 하는 산이어서 멀리 바라보기는 좋지만 섬은 아니다. 물론 옛날 해수면이 높았을 때라도 섬이 아닌 육지이다. 

최헌섭 : 최헌섭은 ‘許黃玉의 加耶 渡來 經路’ 라는 제목의 글에서 “망산도는 고산자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 지금의 전산도를 적기하고 있어 이를 수용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런 견지에서 望山島에서 올린 횃불 신호를 기다리던 乘岾를 지금의 활천고개로 추정해 보았다.”라고 했다.

이정룡(李正龍) : 이정룡은 ‘허왕후의 가락국 도래 행로 파악’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望山島가 前山島이고 前山島의 일명이 卵山이라는 지리지의 기록과 김해시 삼정동의 전산 마을이 알매(알산) 마을인 것에 근거하여 望山島가 삼정동 전산 마을에 비정되며”라고 했다.

활천고개와 전산도. 우측 아래에 ‘전산’이라는 지명이 보이는 곳이 전산도이다.
활천고개와 전산도. 우측 아래에 ‘전산’이라는 지명이 보이는 곳이 전산도이다.

위 최헌섭이 乘岾을 활천고개로 추정한 과거의 활천고개 정상에서는 전산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활천고개에서 전산도를 바라 보려고 한다면 활천고개의 동쪽 너머 삼정동 쪽에서나 보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렇다면 현재 김해시청 청사가 들어서 있는 남산이 오히려 전산도와 아울러 주변의 바다를 관망하기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최헌섭과 이정룡이 말하는 전산도를 망산도라고 한다면, 능현이나 주포나 왕후사 등이 들어설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다.

김태식 : 김태식은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한국사 연구〉 (1998)에서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해 김해 평야가 생긴 것은 600여년 전부터의 일이며 이전에는 김해시 중심가 바로 남쪽이 바다였음이 밝혀졌다. 이에 이전의 바다안에 있었다는 섬인 前山島가 망산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망산도 즉 전산도는 조선후기(1861)의 〈대동여지도〉로 보아 칠점산과 명지도에 둘러싸인 내해의 작은 섬들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김해시 풍유동과 명법동, 이동에 걸쳐 여러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칠산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칠산을 망산도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칠산의 서남쪽은 반룡산이 자리한 내륙이지 바다가 아니기에 칠산이 망산도가 될수는 없는 것이다. 내해의 중앙도 아닌 측면의 칠산이 바다 서남쪽을 조망하기 좋은 망산도는 아닌 것이다.

4. 망산도와 주포 위치에 대한 소론

'가락국기'에서 '망산도는 수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望山島 京南島嶼也)'라고 했고, 수로왕이 유천간에게 빠른 배와 말(輕舟駿馬)을 주어 망산도에서 허왕후를 기다리게 한 곳이다.

이에 유천간이 망산도에서 기다릴 때 홀연히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허황옥이 탄 배가 나타났으므로 유천간이 망산도에서 횃불을 들어 신호를 보내니 배가 나루에 닿았으며 뱃사람들이 육지에 내렸다.

그러므로 망산도 인근에 배를 매어놓고 뱃사공 내지 공주 수행원이 내렸던 곳인 현재의 진해구 용원동 산197번지에 유주비(維舟碑)와 유주비각(維舟碑閣)이 세워져 있으며, 공주(허왕후)가 닻을 내리고 처음으로 내렸던 곳은 뱃사공 내지 수행원이 내렸던 곳과는 조금 떨어진 ‘주포(主浦)’라고 한다.

따라서 '가락국기'의 원문을 보면 자세하지 않으나 현지의 유주비각과 연계하여 보면 뱃사람들이 내렸던 장소와 공주가 내렸던 장소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산천조에서 “명월산은 김해부 남쪽 40리에 있다(明月山 在府南四十里).” 하였고, 또 같은 조의 ‘신증(新增)’편에 “주포(主浦)는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명월산(明月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主浦 在府南四十里 源出明月山 南流入海).” 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후에 간행된 모든 '김해읍지'에서 그대로 전재하여 기술하고 있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 웅천현 산천(山川)조에서 “주포는 현(縣) 동쪽 30리 김해부 경계에 있다(主浦 在縣東三十里 金海府界).”고 하였다. 

말무섬. 유주암. 견마도 일대 지형도(1990년대).
말무섬. 유주암. 견마도 일대 지형도(1990년대).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 본 '가락국기' 및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김해읍지'와 '웅천현읍지'의 문헌에서 말하는 주포의 위치와 합치될 수 있는 장소는 현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 주포마을과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옥포마을이 연접(連接)한 곳이 ‘주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문헌 기록과 달리 이정룡의 말대로 서남쪽 10리 정도에 불과한 김해시 풍유동 일대를 주포라고 한다면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그 이후의 모든 기록을 부정하며 폐기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물론 최헌섭도 위 각각의 문헌을 고찰하였으나 이정룡과 마찬가지로 전산도를 망산도라고 추정하고 보니 결론(맺음말)에서 주포를 비정(比定)할 장소를 택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망산도는 그야말로 공주 일행의 배가 올 만한 바다에서 오고가는 배를 잘 볼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오고가는 배와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섬이라야 하며, 부근 육지에 배가 임시로라도 정박할 수 있는 나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망산도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관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망산도라고 할 만한 다른 곳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욕망산은 섬이 아니기 때문에 망산도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전산도는 망산도가 되기에는 지정학적으로 부적절한 장소라서 당장 진해구 가주동에 있는 주포마을을 부정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진다.

즉 망산도에서 신호하는 횃불을 보고 공주가 내린 도두촌 나루를 훗날 허왕후가 돌아가신 후 ‘주포’라고 고쳤다는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하는 무리수가 따른다.

'웅천현읍지' 산천 주포 기사.
'웅천현읍지' 산천 주포 기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웅천현 산천 주포.
'신증동국여지승람' 웅천현 산천 주포.
웅천현지도. 1872년 '영남지도'에 있는 웅천현의 독립된 지도인데, 망산도가 만산도(滿山島)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경상도 지역의 독특한 발성에 따른 음운의 변이과정에서 망산도의 ‘망’이 음운의 변이에 의해 ‘만’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망산도. 주포. 견마도. 전산도 주변 위성사진.
망산도. 주포. 견마도. 전산도 주변 위성사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