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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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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6)
  • 도명 스님
  • 승인 2020.08.19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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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허황옥 공주 가락국 도착.
허황옥 공주 가락국 도착.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5. 도래 경로와 시간적 추이

1). <도래 경로>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공주의 신분으로 항해하여 온 2만5천여리의 긴 노정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길을 '가락국기'와 '김해명월사사적비'를 참고하여 탐색하면 주요 공간은 가락국의 남쪽 현 진해구 용원동 앞바다의 망산도와 명월산 아래 별포(주포)를 무대로 하여 일어나고 있다.

사실 어찌 보느냐에 따라서는 복잡하거나 다양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고 작은 공간이다. 그러므로 허왕후의 초행길이자 신행길의 주요무대는 본궐이 있는 내항(內港)이 아니라 종궐이 있던 외항(外港)이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국빈이나 최고의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는 비행가 없던 시절이므로 나라의 국경초입 육지나 바다일 수밖에 없고, 바다에서 맞이했으니 외항인 것이다. 이 땅 가야와 첫 인연을 맺은 열여섯 살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신행길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기출변으로 와서 망산도에서 관측되었고, 망산도 서북쪽에 있던 유주지에서 처음 배를 댔다가 구간을 맞아 내리지 않겠다고 의사표시를 하였다. 이후 수로왕이 직접 오고, 명월산 아래 별포촌 유궁에서 수로왕이 기다리겠다는 소식을 듣고 유주지에서 음력 7월 27일 하루를 배에서 보낸다.

다음날 별포나루 입구 산자락에 배를 대어놓고 명월산 산령께 폐백을 올리기 위해 승재에 오른다. 승재에서 산령께 폐백한 후 산길을 따라 별포촌에 가서 수로왕을 만나고 유궁에 거한다. 유궁에서 7월 28, 29 이틀을 지내고 오전에 출발하여 신답평 본궁에 들어올 때 정오쯤이었다.

◆ 기출변→망산도 유주→별포진 입구→승재(승점)→유궁→본궁→별포는 나중에 주포가 되고 승점은 나중에 능현이 된다.

2). <시간적 추이>

㈎. 7월 27일

망산도 서남쪽에서 공주의 배가 관측되어 망산도 서북쪽 유주지에 배를 댐. 구간이 와서 공주를 모셔가려 하나 거절함. 구간이 수로왕께 정황을 보고하니 수로왕이 직접 근처에 행차하여 유궁을 치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수로왕의 전갈을 특사로부터 받고 유주지에서 하루를 지냄

㈏. 7월 28일, 29일

공주는 먼 항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산령께 폐백하기 위해 별포진 입구에서 내려 승점에 올라서 가마에서 내려 폐백하고 산길을 따라 유궁이 있는 별포촌으로 가서 마중 나와 있는 수로왕을 만나서 유궁에 든다. 유궁에서 이틀을 보낸다.

(다) 7월 30일

가락국기에서는 공주가 7월 27일에 와서 수로왕과 만나 이틀밤을 보내고 궁궐 도착한 날이 8월 1일로 나온다.

27일 와서 수로왕과 통신하는데 거의 하루가 걸려서 하루는 배에서 쉬고 28일 수로왕과 만나 29일까지 이틀을 보내고 30일에 대한 언급은 없다.

역리학자 법오스님에 따르면 고대 기원전후에는 홀수달은 긴달로 보아 30일까지 있었다고 본다면, 29일 뱃 사람을 보내고 궁궐에 도착하기전 하루를 더 보냈다고 봐야한다.

태정리 태봉 부근의 옛 임강사(臨江寺)는 왕후사가 변하여 되었다는 옛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궁이 있는 봉황대쪽을 맞은편에서 잘 조망 되며, 경치가 좋은 태정리 인근에서 하루더 머물다 갔을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만전 자리가 아닌 두 번째 만전을 설치 한곳을 후대에 전해 졌을때는 두 번째라는 것은 사라지고 만전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졌고 그곳에 절을 짓고 왕후사라 했는데 나중에 임강사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비교적 후대인 조선시대에 임강사를 지으면서 이미 오래전 폐사된 왕후사의 역사와 전통을 끌어와서 임강사에 덧붙였을 수도 있다.

(라). 8월 1일

아침에 타고 온 배를 일찍 보내고 수로왕과 공주 잉신 내외는 함께 수레를 타고 많은 물건을 싣고 본궁에 돌아오니 정오쯤이었다.

6. 도래 전후의 주변 스케치

'가락국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를 통한 가야에 대한 기사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가야유물들을 보면 가야는 강력한 군사력과 철 무역을 통한 경제력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우수한 문명국가였다.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극성이 다른 만큼 또 거리가 멀고 이질적인 요소가 함께 만나면 더 발전되는 경향이 있는데 김수로의 대륙문화와 허황옥의 해양문화가 만난 지점이 가락국이고,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히 사람과의 만남 또는 결혼이라는 가치를 넘어선 하나의 문화와 또 다른 새로운 문화의 만남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하겠다.

대개 세상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과 현상들은 단독현상이 갑자기 일어나기보다 점진적인 여러 요소들이 잠재해 있다가 어느 임계점에 이르면 현상이 발생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2만여리나 되는 먼 이국땅에서 공주 신분인 허황옥이 가야라는 이 땅에 올 때는 단순히 결혼이라는 단수의 목적으로 이 먼 길을 목숨 걸고 왔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물론 대단한 효심을 가진 현숙한 여인이라면 부모님의 지엄한 명을 거역할 수 없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도 결혼 동맹 내지 경략결혼으로 딸을 시집보낸다 하더라도 가까이 있는 주변국도 아니라서 직접적인 국가적 이익이 발생하기 어렵기에 이 또한 온전한 대답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 항해의 또 다른 가능성은 아유타국의 불안한 정세를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가락국 내지 수로왕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아유타국에서 잘 알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허황옥이 부모의 명을 따라 항해를 나섰을 때 파신의 노여움을 사서 항해에 실패하고 돌아오니 부왕이 말하기를 이 탑을 싣고 가면 파도가 잠잠해질 것이라 하면서 파사석탑을 싣고 오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 기록되어 있다.

부왕이 말하기를 이 탑을 싣고 가라 할 때에는 이 탑이 공주의 먼 항해를 보호해 주는 호신의 신령한 역할을 믿었다. 신령함은 금방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탑에 영험함이 실렸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파사석탑의 조성연대는 훨씬 그 이전일 것이다. 탑은 종교적 상징물로써 기원 전후에서는 흔히 불족적(佛足跡), 연화좌(蓮花座: 蓮華臺), 法輪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 상징물이다.

흔히 목숨을 걸 수 있는 여러 가치들이 있지만 특히 종교에서는 순교마저도 할 수 있는 전통들이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전 세계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회자되고 있는 기원전 3세기의 인도 아쇼카 대왕은 인도를 통일과 화합으로 최고의 국가 경영을 하였으며 그 중에 불교의 홍보를 위해 세계 여러 곳에 전법단을 보냈으며 그리스 로마와 아랍 세계, 중국, 특히 스리랑카에는 왕자 마힌다와 공주 상가미타를 보내어 두 남매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최초의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쇼카 대왕의 전법 300여년 이후에 온 허황옥은 일설에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불교전파의 종교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도 가야권역의 여러 사찰의 연기(緣起) 설화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 시대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이지만 가야와 아유타국이라는 두 사람의 출신국은 그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군상 중 상인들은 이익과 필요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국경과 거리, 불편한 환경조차 극복하고 교역을 하는 것은 물론 전쟁 중에도 목숨을 걸고 장사하며 이익을 쫓는 것이 상인의 특성이다.

당시 사천의 늑도(勒島)라는 조그만 섬도 국제적인 교역 항이라는 게 발굴을 통해 증명되었는데 동시대의 가야는 조그만 섬인 늑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육군 기마병과 해양선단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력과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인 제철생산품을 바탕으로 해상 교역의 중심에 있던 국제적인 해양문명국이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가야라는 국가의 인지도는 꽤 브랜드화 되어 주변국으로 알려졌을 것이며 그 나라의 통치자인 젊은 총각 군주 김수로왕은 이미 명망 있는 군주로써의 입지를 갖추었을 것이다.

문헌에 나타나는 김수로왕의 성격은 석탈해와의 경우처럼 싸울 때는 과감하게 싸우고, 신라의 분쟁을 조정해 주기도 하며 수도를 정할 때 직접 길지(吉地)를 선택하고, 먼 이국에서 온 배필을 위하여 직접 마중 가는 등등의 것을 종합해 오면 김수로왕은 과단성과 용맹함 지혜와 자비 그리고 덕성을 갖춘 거의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모든 그의 행적들이 허황옥과 만나기 전인 비교적 어린나이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김수로왕은 교역하는 상인을 통하여 허황옥의 부모에게 알려졌을 것이고, 아울러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사전에 듣고 있었을 것이며, 이에 밀사를 보내어 허황옥의 부모와 교감이 있었을 걸로 사료된다.

그에 뒷받침 될 수 있는 것이 북방의 이민 집단 출신인 김수로가 구지봉에서 일종의 상징조작을 통해 왕이 됐으나 그 이전의 기득세력인 구간과의 미묘한 힘겨루기가 있었을 터이다.

그러기에 구간들이 조알(朝謁) 때 자신들의 딸 중에서 배필을 고르기를 청하나 김수로왕은 “자신은 하늘의 명으로 왕이 되었으니, 왕후를 삼게 하는 것 또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치 말라.” 하고, 단호히 구간의 청을 거절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수로왕은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구간이라는 기득세력에 혼인하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배필을 왕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먼 이국에서 취하기로 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바탕에는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기에 광활한 대륙의 거리 관념에서 보면 인도라 하더라도 절대 불가능한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제정일치의 고대 사회에서 권위를 확보하는 것의 일환으로 김수로왕은 자신의 배필이 올 것이라 예언하고 구체적 장소를 지시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허황후 부모와 사전적 교감이 있었기에 공주의 배에 붉은 깃발을 달게 하고 그 깃발을 단 배가 오면 봉화를 올려서 서로 확인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공주가 도착했다는 신귀간의 보고를 들은 수로왕은 매우 기뻐하였고(上聞欣欣) 안도하였던 것이다. 김수로왕은 구간이라는 최고의 환영사를 보냈지만 공주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흔히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쉽게 허락하지 않기도 하지만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자존심과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게 아니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목숨 걸고 그 먼 길을 수로왕 당신을 위해왔는데 당신은 그냥 않아서 나를 맞이하려는가 하는 핀잔과 자신의 배필이 될 수로왕이 어떤 사람인가 한번 떠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주가 거절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수로왕은 과연 그렇다(然之)라고 그 의도를 알겠다고 하였다. 입장을 바꿔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공주는 지혜 있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오히려 속으로 미소 지었으리라,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공주가 있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겠노라, 거기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노라는 전갈을 보낸다.

부산강서 옥포마을 비상급수시설 벽에 허황옥 공주가 배에서 내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부산강서 옥포마을 비상급수시설 벽에 허황옥 공주가 배에서 내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허왕후 도래 경로 지도.
허왕후 도래 경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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