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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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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7)
  • 도명 스님
  • 승인 2020.08.2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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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이 소식을 들은 공주는 속으로 이 사람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고 자신의 미래를 가야에 던지리라 결정한다. 이 결정 후에 먼 항해에 대한 감사와 웃어른께 올려야 할 폐백을 먼 바다가 보이는 가야 끝자락의 우뚝한 보배산(명월산) 산령님께 바치기로 하고 배에서 하루를 묵는다.

이 산의 이름이 보배산, 보개산, 명월산이라고 하는데 인생의 참된 보배를 맞이한 산이다 하여 보배라 할 수도 있고, 탑의 탑머리 지붕 또는 부처님의 일산(日傘)을 보개라 하는데 불교식 명칭이며, 명월산이라는 것은 여성성을 달로 비유할 때 밝은 달과 같은 여성 허황옥의 덕(德)을 비유하여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만나기 위해 보낸 7월 27일은 숨 가빴던 하루였다. 아침 일찍 조정회의를 마치자마자 유천간과 신귀간을 공주를 맞이하러 보내었고. 또 공주 도착 보고를 받고 구간을 보내었다.

그러나 공주의 거절로 자신이 직접 별포촌에 유궁을 치고 30, 40여리 되는 그 길을 하루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적으로 가능할까 싶다. 그러나 음력 7월 여름의 하루는 일찍 해가 떠서 늦게 해가 지기에 숨 가픈 하루였지만 시간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문명화되기 이전의 고대사회는 소위 해를 따라 사는 삶이어서 해가 지면 일찍 자고 해가 뜨면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에는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으로 구분되지만 그 시대에는 모두가 아침형 인간이라는 동일한 패턴이며, 현재의 아침형 인간보다 더 이른 아침을 맞이했던 생활이었다.

배에서 하루를 보낸 공주는 별포나루 입구에서 잠시 배를 대고 승점으로 올라가 가마에서 내려 목적한 폐백 헌공을 산령에게 하고 난 뒤 산길을 따라 유궁이 있는 별포촌으로 갔다. 거기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수로왕과 만나 유궁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이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 김수로왕과 만나기까지의 주변 정황을 사실과 더불어 일부 추정을 해 보았다.

7. 맺는 말

역사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과거 속에 박제화 되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까지 분명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현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전수받은 것, 쌓여 있는 것, 주어진 값 등도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국가이건 개인이건 과거의 흔적과 전통 그 내용물은 너무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단군의 기록과 가야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망실하였을 것이며, 사람으로 치면 간이나 쓸개 등 중요장부가 빠진 부족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당대 최고의 권위에 있었고, 문·사·철을 두루 다 갖춘 일연스님의 노력에 의해 가야는 신비의 나라 안개속의 나라가 아니라 역사 속에 당당히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로 드러나게 되었다.

역사서술은 사관이라는 서술의 관점이 있어서 완전한 객관적 서술은 국가가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며 개인도 쉽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곳곳을 보면 되도록이면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은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려는 일연스님의 의도가 보여 진다.

그러므로 현재에서 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시간이 흘러 유물, 유적이 모손되고 망실되어 없다고 해서 또 전체 중 부분의 오류가 있다고 해서 '삼국유사' 전체에 대한 부정은 이 또한 불합리와 모순이라고 본다.

현대인의 잘못된 역사관 중의 하나는 현재를 기준으로 살아보지 않은 과거 역사를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랑게를 필두로 한 서양의 고증사학보다 더 일찍 동양에서는 사관을 두어 더 오랫동안 객관적 역사서술을 하였다.

문명의 발달사를 보아도 서양이 문명의 주체자가 되고 세계의 패권을 쥔 것은 수천년의 인류사에서 보면 불과 수백년 전에서 부터에 불과하다. 고대세계 4대 문명 중 3개 문명이 동양에서 발흥하였고 확장되었으며, 그 영향은 지금도 유효하다. 따라서 기원전후의 가야가 발전된 문명국가라고 해서 전혀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근세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해양 강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면이 바다로 싸여있는 반도라는 입지요건이 큰 요인이 작용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이베리아 반도나 이탈리아반도 그리스반도 등도 동일하다.

가야는 대륙을 등지고 해양과 마주하였고 또 낙동강을 통하여 바다에서 내륙까지 갈 수 있는 최고의 입지를 갖추었기에 강력한 해양 강국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황옥 도래경로를 재검토함에 있어서 본래 존재하는 1차 사료인 '삼국유사'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고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인종과 국경, 온갖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묶인 현대인들보다 자연과의 조화와 교감과 여러 가지 장벽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옛사람의 지혜와 영감은 뛰어나며, 열린 국가를 지향했던 호방한 가야의 도전정신은 대륙의 이민족에서 가야에 터를 잡고 자수성가한 수로왕과 해양의 새로운 문화를 가져와 가야에 접합시켰던 허황옥 왕후의 첫 만남으로부터 기인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본고를 서술함에 있어 '가락국기' 원문에 따라 경로를 탐색하고 역사 속 현장을 여러 번 답사하였으나 2000여년이라는 세월의 격차와 시대변화가 많은 단절과 상실을 가져왔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경로와 지명 곳곳에 남아있는 편린들이 실마리가 되어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기쁨과 함께 원 저자의 진실성과 '삼국유사'의 사실성을 접할 수 있었다.

역사 속 많은 사실이 시간 속에 묻혀 졌지만 본고가 '삼국유사'의 사실성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만 본 연구자가 잘못 인식하였거나, 표현상에 실수가 있었을 것이 염려되는 점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행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혜로운 눈 밝은 이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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