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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함께 이 곳을 한번 찾아 가보세요.
  • 취재팀
  • 승인 2011.07.02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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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북부동 화정유적공원, 열녀비.효녀비.고분 등 야외 박물관

김해 북부동 화정 유적공원은 김해시 삼계동 산38-7번지 일대에서 1999년 2월 23일부터 7월2일까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의 유구 110기를 확인하고 여기에서 토기, 철기 등 총 520여점의 각종 유물을 출토했다.

   
 
  ▲ 효자,효부비.  
 
발굴 조사된 유구 중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6~7세기 김해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古墳) 10기를 유적의 보존관리와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화정유적공원' 으로 옮겨 복원해 역사교육현장으로 운영 중이다.

화정 유적공원에는 청동기시대 고분과 주거지 그리고 530평 규모의 충효공원이 들어서 있다. 충효공원에는 지역 내 문중 또는 개인이 관리하는 충절비 9개, 효성비 16개, 열녀비 11개 등 36개 비각들이 이전, 관리되고 있다. 조선시대 효자∙효녀비와 열녀비,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배치문 의사 기념비 등이 대표적이다.

   
 
  ▲ 화정18~23호분.  
 

화정 18~23호 고분

화정유적의 정상부에 위치한 규모가 가장 큰 무덤이다. 타원형의 중앙에 여러명을 합장할 수 있는 석실을 만든 후에 다시 주변에 2기의 새로운 석실을 덧대어 만들었다.

또, 3개의 수혈식석곽묘를 덧대어 마치 여러기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각 무덤을 만든 시대는 다르다. 가장크고 가장 먼저 만들어진 21호 묘는 석실,묘도,연도가 갖추어져 있다.

석실에는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시상이 4개 확인되었는데 이는 4명이 매장되었음을 말해준다. 사람이 묻힐때 마다 새로운 시상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별도의 무덤을 만들어 사람을 묻을 때 동시에 부장관도 마련되었다. 21호 묘보다 후에 만들어진 23호 묘는 방형의 석실로 시상은 7개였다. 3기의 수혈식석관묘 <18호 묘, 19호 묘, 47-2호 묘>는 규모가 작고 각각 일인용의 매장시설이다.

이 유적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이후인 6세기에서 7세기 전반 사이에 만들어진 김해지역의 지배자 집단 묘역으로서 금관가야 멸망 이후의 김해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 화정47~48호.  
 

화정47~48호 고분

유적의 중간 사면에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묘와 횡구식석실묘이다.

횡혈식석실묘인 47호분은 화정유적의 무덤 중 구조가 가장 잘 남아있다. 봉분의 뒤쪽에 빗물이 바깥으로 흘러가게 하기위해 만든 구가 설치되어 있다. 원형의 봉분중앙에 석실이 만들어져 있고 석실의 북쪽에 부장품을 넣은 아주작은 석관 1기가 있다.

석실의 형태는 방형이고 부분적으로 다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실을 축조하였다. 천정부는 남아있지 않지만 석실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궁륭형으로 추정된다.

시상은 3개로 석실우측에 마련되었고, 연도는 돌을 채워 넣어 폐쇄하였다. 최초의 시상에서 금동제 이식 1쌍이 출토 되었다.

47호분의 봉분을 일부 파고 만든 48호분 횡구식석실 1기와 제사유물을 넣은 수혈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석실의 형태는 장방형이고 석실 입구는 돌을 채워 넣어 막았다. 제사용수혈에서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화정유적공원내 충효공원에 세워져있는 효자∙효부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자식들과 며느리에게 하사하는 비석으로 오늘날로 치자면 표창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효자∙효녀비는 아무나 하사 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고귀한 비석으로 효를 행함에 하늘이 감동할 지경이 되야 받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 열녀비.  
 

열녀비

효자 효부비와 같은 종류의 비석이지만 열녀비는 남편을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아내에게 하사되는 비석으로서 흔히 수절한 과부가 평생 재혼을 하지 않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심에 임금이 하사하는 가장 큰 상이기도 하다.

열녀비가 세워지는 고장은 정조, 지조 등으로 전국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고 그 자손들은 열녀가 탄생한 가문의 자손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 의사 배치문 기적비.  
 

의사 배치문 기적비

의사 배치문(1890-1942)은 1919년 4월 8일 목포시 창평동에서 독립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 1921년 3월 중국에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1923년 5월 임시정부 국민회의 참석, 다음해 귀국 후 1928년 1년 6개월 옥고, 출옥 뒤 호남평론기자, 신간회 목포지회장을 맡아 활동 1941년 체포되어 1942년 5월 20일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1982년 8월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며 이 비석을 세웠다.

기적비에는 배치문 선생의 생애기가 새겨져 있어 일제시대 독립 운동가의 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유적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설이 도심 속에 있지만 이런 시설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시민들이 많다.

김해시도 교육기관도 전화하여 물어 보았더니 거기에 그런 유적 공원이 있었느냐며 되레 반문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시설 관리도 엉망이다.

유적물을 소개하는 안내 표지에는 내용이 떨어져 나가고 없이 흉물스럽게 방치 돼있다.
이 유적공원 주변은 화정글샘 도서관을 비롯하여 초 중 학교가 있지만 학생들의 학습장이나 역사 유적 교육장으로 할용 되지 않고 있는 아쉬움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철 자녀들과 함께 화정공원의 분수대를 돌며 산책도 하고 바로 옆 유적공원을 찾아 열녀비. 효행비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들려주는 가치 있는 여유를 가져 보시길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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