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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2>“50만 김해 - 근대50년” 50년 전 김해의 면적과 인구 생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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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2>“50만 김해 - 근대50년” 50년 전 김해의 면적과 인구 생활양식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0.10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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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해 김해군 1개 읍 9개 면과 김해시로 분할,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김해군과 김해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김해시대 열어

김해평야는 우리나라의 주요 곡창지대 하나이며, 비닐하우스 농사의 본고장으로 우리나라 최초 비닐하우스 집단 농업지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비닐하우스 농법은 전국에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토마토·딸기·오이·배추·꽃 등의 재배가 매우 활발

   
 
  ▲ 1970년대 김해 읍내 전경 내외동은 아파트 한 동 없는 농경지 였다.  
 

<제2회> 50년 전 김해의 면적과 인구 생활양식

김해 근대에서 현대까지
고대
가락국의 도읍지였던 김해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농경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인간생활의 터전이 되었는데, 부원동 등의 패총과 고인돌(지석묘)·고분군 등이 각 대학 박물관과 관계 연구기관에 의해 발굴되어 도처에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경에 고대국가의 틀이 잡히기 시작해, 삼한시대에는 구야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했고, 그것이 가락국으로 발전해 6가야국의 맹주국이 되었다.

서기 42년(삼한시대)에 김수로왕이 가락국를 건국해 10대 491년을 이어 가야연맹체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532년(법흥왕 19)에 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해 금관군이 되었다가, 680년(문무왕 20)에 다시 금관소경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김해소경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김해소경은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가 임해현으로 강등되었으나 곧 임해군으로 승격했으며, 971년(광종 22)에 김주도호부로 승격했고, 1000년(목종 3)에 안동대도호부로 개칭하였다.

1012년(현종 3)에 김주로 개칭해 방어사를 두었으며, 1018년 의안(지금의 창원)·함안과 칠원(지금의 함안군 칠원)·합포(지금의 마산시)·웅신(지금의 진해시 웅천)의 3현을 속군(현)으로 삼았다. 1078년(문종 32)에 동남해선병도부서사본영을 김해에 설치해 동남해 방비의 기지가 되었는데, 이 본영은 이후 존폐를 거듭하다가 1368년(우왕 4)에 폐지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밀양에서 일어난 반란을 방어사 김훤이 평정한 공으로 김녕도호부로 승격했으나, 1276년(충렬왕 2) 안렴사 유호가 살해되는 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08년에 다시 김주목으로 승격되고, 1310년(충선황 2)에 김해부가 되었다.

조선시대
김해부는 1413년(태종 13)에 김해도호부로 승격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때 김해부는 1,290호 1만6642명이 살았으며, 웅신현은 63호 641명이 살고 있었다.

1467년(세조 12)에 지방군제 개편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관하의 김해진관이 설치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9일에 김해성이 왜병에게 포위되자 부사는 성을 버리고 탈출했으나 고을 선비인 송빈·이대형·김득기·유식 등이 의병을 일으켜 대적하다 순절하였다. ≪김해부읍지≫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김해도호부의 호구수는 8,511호에 인구수는 3만3015명이었다.

   
 
  ▲ 1967년 삼계 신명마을 (도로공사 현장).  
 


근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으로 김해군이 되었으며, 1906년 대산면을 창원군으로 이관하고 양산군 대저면을 편입하였다. 1910년 23개 면을 14개 면으로 통합하고, 1918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김해면으로 통합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장유면 무계리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다. 1931년 11월 1일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3년 낙동대교가 준공되어 부산 구포와 연결되었으며, 1942년 10월 1일 진영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 1971년 김해경찰서 (서상동).  
 


현대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된 해에 대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 김해국제공항이 개설되었으며, 1978년 2월 15일 서낙동강 강동지역인 대저읍·명지면과 가락면 일부가 부산직할시 북구로 이관되었고, 다시 1989년 1월 1일 가락면·녹산면이 부산직할시에 이관되었다. 1976년 4월 20일부터 중부·동부·서부출장소를 설치했고, 1979년 5월 1일 다시 북부출장소를 설치해 4개의 출장소를 운영해 오던 중,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해 김해군 1개 읍 9개 면과 김해시로 분할되었다가,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김해군과 김해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김해시가 되었다. 1998년 9월 칠산동과 서부동을 통합하여 칠산서부동으로 개칭하였다.

 

   
 
  ▲ 1981년 김해시청 (서상동 국민은행 자리).  
 


자연환경

1)지형
김해시의 북부를 관류하다가 동북부에서 방향을 바꾸어 남류하는 낙동강이 밀양시·양산시 및 부산광역시와의 자연적 경계를 형성한다.

 

 

지세를 보면, 시의 북반부는 낙동강의 유수에 의해 침식되어 단절되었다가 다시 돌출된 태백산맥의 지맥이 지나가 평지가 적고, 무척산(700m)·석룡산(495m)·금동산(463m)·신어산(630m) 등이 솟아올랐으나 차츰 고도가 낮아져 하구 쪽의 평야부와 맞닿아 있다. 대동수문은 밀물 때 바닷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며, 관개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김해평야는 낙동강의 상·중류에서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되어 이룩한 우리 나라 최대의 삼각주상의 충적평야이다

서쪽에는 북에서 남서쪽으로 해안산맥이 연속되어 비음산(510m)·용지봉(728m)·대종산(655m)·불모산(802m)·팔판산(801m)·화산(798m)·굴암산(621m)·보배산(479m) 등이 창원시와 진해시의 동부 경계를 이루며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2)강·하천
중앙부는 낙동강 삼각주의 거대한 평야부를 이루어 이 시의 시가지와 일부의 농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동부는 북쪽에서 낙동강이 유로를 바꾸어 부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며 남류하다가, 중앙의 삼각주 평야부를 배후지로 한 뒤 하구 부근의 명지도에 이르러, 유로가 두 갈래로 나뉜 동부의 본류와는 달리 폭이 현저히 좁아진 지류로서 남해에 도달한다.

낙동강에 유입되는 시역 내의 소하천으로는 주촌면 덕암리 쪽의 황새봉(393m)에서 발원해 주촌면·장유면을 관류하며 농경지를 형성하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조구천과, 진례면 산본리의 남쪽 용지봉에서 발원해 진례면·생림면을 북류하며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화포천을 비롯해 동쪽의 대조천·예안천, 시 중심부의 해반천, 서쪽의 진례천·주촌천·죽동천, 서남쪽의 내삼천·죽동천 그리고 남쪽의 율하천·사촌천 등이 있다.

   
 
  ▲ 1969년 외동진입도로(무점마을 방향).  
 

3)기후
기후는 대체로 해양성의 온난다습한 기후를 보이는데, 연평균기온 14.4℃, 1월 평균기온 0.9℃,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강수량은 1,427㎜이다. 서리는 10월 말부터 내려 이듬해 3월 초순에 끝난다.

4)지질
지질구조는 중생대 경상계 지층으로 덮여 있다.

김해군의 행정역사

 

김해군(金海郡)은 경상남도 김해시의 이전 행정 구역으로, 1995년 김해시에 통합되어 도농복합도시가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이 없던 1906년까지의 김해군은 현재의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김해시,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강동동·가락동·녹산동 일대에 해당한다.

김해행정역사

1914년의 행정구역과 현재의 행정구역 비교
1914년 김해 2011년 현재 김해
구·읍·면 동·리
하계면
(下界面)
[3]
신용리, 내룡리, 설창리, 죽곡리, 의전리, 본산리, 여래리, 우동리, 진영리, 방동리, 하계리, 좌곤리, 사산리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 내룡리, 설창리, 죽곡리, 의전리, 본산리, 여래리, 우동리, 진영리, 방동리, 하계리, 좌곤리, 시산리
이북면
(二北面)
[4]
가산리, 가동리, 장방리, 시산리, 신천리, 용덕리, 명동리, 안곡리, 퇴래리, 병동리, 안하리 김해시
한림면
가산리, 가동리, 장방리, 시산리, 신천리, 용덕리, 명동리, 안곡리, 퇴래리, 병동리, 안하리
생림면
(生林面)
금곡리 금곡리
사촌리, 나전리, 봉림리, 생철리, 도요리, 안양리, 마사리, 생림리 김해시
생림면
사촌리, 나전리, 봉림리, 생철리, 도요리, 안양리, 마사리, 생림리
상동면
(上東面)
여차리, 감로리, 매리, 대감리, 묵방리, 우계리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 감로리, 매리, 대감리, 묵방리, 우계리
하동면
(下東面)
수안리, 주중리, 주동리, 예안리, 초정리, 괴정리, 조눌리, 대감리, 덕산리, 월촌리 김해시
대동면
수안리, 주중리, 주동리, 예안리, 초정리, 괴정리, 조눌리, 대감리, 덕산리, 월촌리
좌부면
(左部面)
[5]
남역리, 어방리, 삼방리, 마마리, 지내리, 불암리, 동상동, 북내동, 부원동, 강창리 김해시 삼정동, 어방동, 삼방동, 안동, 지내동, 불암동, 동상동, 서상동, 부원동, 강동
우부면
(右部面)
[6]
화목리, 풍유리, 음법리, 이동리, 삼계리, 삼산리, 답곡리, 외동리, 내동리, 회현리, 흥동리, 전하리 화목동, 풍유동, 명법동, 이동, 삼계동, 구산동, 대성동, 외동, 내동, 봉황동, 흥동, 전하동
주촌면
(酒村面)
선지리, 천곡리, 망덕리, 농소리, 내삼리, 양동리, 덕암리, 원지리 김해시
주촌면
선지리, 천곡리, 망덕리, 농소리, 내삼리, 양동리, 덕암리, 원지리
진례면
(進禮面)
[7]
고모리, 담안리, 송현리, 산본리, 청천리, 시례리, 송정리, 신월리, 조전리, 신안리 김해시
진례면
고모리, 담안리, 송현리, 산본리, 청천리, 시례리, 송정리, 신월리, 조전리, 신안리
장유면
(長有面)
[8]
유하리, 내덕리, 신문리, 부곡리, 무계리, 대청리, 삼문리, 관동리, 율하리, 장유리, 응달리, 수가리 김해시
장유면
유하리, 내덕리, 신문리, 부곡리, 무계리, 대청리, 삼문리, 관동리, 율하리, 장유리, 응달리, 수가리
가락면
(駕洛面)
[9]
대사리, 북정리, 제도리, 상덕리, 식만리, 죽동리, 죽림리, 봉림리 부산
강서구
강동동, 식만동, 죽동동, 죽림동, 봉림동
대저면
(大渚面)
[10]
출두리, 사덕리, 대지리, 평강리, 소덕리, 도도리, 사두리, 덕두리, 맥도리, 울만리 대저동
명지면
(鳴旨面)
조동리, 평성리, 중리, 신전리, 동리, 진목리, 신호리 명지동, 신호동
녹산면
(菉山面)
[11]
범방리, 구랑리, 미음리, 지사리, 생곡리, 녹산리, 화전리, 송정리 범방동, 구랑동, 미음동, 지사동, 생곡동, 녹산동, 화전동, 송정동
  •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 756년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칭하여 양주(良州, 현 양산시)에 속했다.
  • 940년 김해부(金海府)로 강등되었다.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임해군(臨海郡)으로 승격하였다.
  • 971년 김해부
  • 995년 영동도(嶺東道)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였다.
  • 1012년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다.
  • 1018년 의안군·함안군·칠원현·웅신현을 속군·속현으로 삼았다.
  • 1270년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 1293년 금녕현(金寧縣)으로 강등되었다.
  •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다.
  • 1310년 김해부로 강등되었다.
  • 1413년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승격하였다.
  • 1895년(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진주부 김해군(金海郡)으로 개편되었다.
  •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개편되었다.
  • 1906년 대산면을 창원군에, 양산군 대상면·대하면을 김해군에 편입하였다.
  • 1914년 4월 1일 대저면·가락면·좌부면·우부면·진례면·장유면·이북면·하계면·녹산면·주촌면·상동면·하동면·생림면·명지면 이상 14면으로 개편하였다.
  • 1918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김해면으로 합면하였다. (13면)
  • 1928년 4월 1일 하계면을 진영면으로 개칭하였다.
  • 1931년 11월 1일 김해면을 김해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2면)
  • 1942년 10월 1일 진영면을 진영읍으로 승격하였다.(2읍 11면)
  • 1943년 1월 18일 가락면 식만리 일부를 김해읍에 편입하였다.
  • 1944년 하동면을 대동면으로 개칭하였다.
  • 1973년 7월 1일 대저면을 대저읍으로 승격하였다. (3읍 10면)
  • 1978년 2월 15일 대저읍, 명지면 등을 부산직할시 신설 북구에 편입하였다.(2읍 9면)
법률 제3014호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대저읍 일원 북구 일부
가락면 일부(대사리, 북정리, 상덕리, 제도리)
명지면 일원(신호리 제외)
명지면 신호리 녹산면 일부

생활양식과 특산물
김해평야는 거의 전부가 현재의 낙동강 서쪽에 발달되어 있다. 낙동강 서쪽의 넓은 삼각주는 원래 경상남도 김해의 땅이었다. 1980년대 이후 부산의 시역이 확장됨에 따라 지금은 거의 전부가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 평야는 우리나라의 주요 곡창지대의 하나이며, 비닐하우스 농사의 본고장으로서 토마토·딸기·오이·배추·꽃 등의 재배가 매우 활발했다.

   
 
  ▲ 1967년 지내ㆍ안동ㆍ삼정ㆍ어방 지구 (비닐하우스 단지).  
 

김해지역이 우리나라최초 비닐하우스 집단 농업지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비닐하우스 농법은 전국에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김해평야라는 명성을 얻어 면서 1등급 쌀의 곡창지대로 잘 알려 져 있기도 하다.
김해 농가들의 지붕의 재료는 당시 김해평야갈대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갈대집도 거의 없어졌다. 죽림강 서쪽과 김해 시가지 남쪽에는 전체 평야에서 지면이 가장 낮은 땅이 넓게 분포한다. 김해시 화목동과 부산광역시 봉림동이 이에 속한다.

당시 김해군 명지면은 대부분 세사(細沙)를 주로 하는 사질토양(砂質土壤)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파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파(대파)는 부산·서울 등의 대도시로 출하된다. 명지면(현 부사 강서구 명지동)은 해발고도가 2∼3m에 지나지 않지만 바다에 면해 있기 때문에 낙동강의 홍수 피해 위험이 적어서 일찍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60년대 김해군 대저면(현 부산 강서구 대저동)도 배 밭이 유명했다.

부산 경남 의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대저에서 배를 사먹고 낙동강 둑길을 따라 대동면 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며 낙동강을 구경하고 대동면 안막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가로질려 구포 나루터까지 가는 뱃길 유람은 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낭만과 즐거움을 절대 느낄 수가 가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양계장(닭)과 양돈(돼지). 축산(소)농가가 발달 해 있었다.
김해군 진영의 특산품인 진영단감도 유명 했다.

   
 
  ▲ 1974년 서상동 5일시장(현 범환상가 일대).  
 

이 때문에 김해장날의 우시장 등 가축시장은 전국에 잘 아려져 있었고 장터의 소국밥 과 돼지국밥도 유명 했었던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칠산 참외와 한림. 상동 딸기도 큰 인기를 누리는 장수 특산품이 되었으며 진례도자기의 역사도 김해 문화와 전통예술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김해는 넓은 들녘과 비닐하우스 등에서 나오는 각종 농산물과 육류(개란. 닭. 돼지. 소고기) 구매와 판매가 수월하여 농촌지여이지만 도농 도시와 같은 경제가 이루어 져 있었다.

전쟁으로 피난 왔던 가난한사람들도 김해의 생산품을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생선종류와 교환 다시 김해로 와서 판매하므로 해서 수입이 톡톡 했던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 때문에 김해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부지런하면 절대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말들이 전해 오기도 한다.

각종 축산 농사를 비롯한 비닐하우스와 특산물 농사로 큰돈을 손에 진 농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김해 읍내 술집으로 몰려들어 매상을 올려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해읍(지금의 동지역)은 여자가 있는 일명방석집이라고 불이는 술집과 여인숙이 넘쳐 났던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물론 육군 공병학교가 김해에 있기 때문에(지금 북부동 자리)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65세 이상 연세 가 든 어르신들은 꼭 한번 들려 술한잔하고 싶은 던 그곳 구산동 잉꼬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1914년 봉황대에서 본 왕릉주변.  
 


4.19혁명 김해출신 전무영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4,19 혁명에 참여했다 절명한 김해출신 열사 전무영(全武永 경남 김해군 1941~1960.4.19) 도 있다. 59년 3월 중앙대학 신문학과에 입학 재학중. 1960년 4월 19일 학우들과 함께 학교를 뛰쳐나와 혁명대열의 선두에 에서 가방을 든 채 부정을 규탄하면 학생들을 이끌고 원각사 앞까지 진출했다가 오후 5시 원각사 앞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절명했다.

역사의 전환기에 속해 있던 김해는 근대 50년 동안 수없는 행정의 변천과 도시이탈 외지인 유입으로 그 추억의 역사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땐 그랬구나 하는 김해의 근대사를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을 가져 본다.

►역대 김해 군수
1대군수 한봉섭, 2대군수 신양재, 3대군수 박재관, 4대군수 황남팔, 5대군수 손찬조, 6대군수 이성태, 7대군수 이경호, 8대군수 이백순, 9대군수 최수경, 10대군수 김영곤, 11대군수 박동선, 12대군수 김기현, 13대군수 정명철, 14대군수 하용옥, 15대군수 서정화, 16대군수 김현규, 17대군수 김철년, 18대군수 노이식, 19대군수 박용범, 20대군수 강삼희, 21대군수김영완, 22대군수 윤희윤, 23대군수 황대영, 24대군수 전병출, 25대군수 문백, 26대군수 김창수, 27대군수 윤병열, 28대군수 이광열, 29대군수 박찬규, 30대군수 박지근, 31대군수 노재은, 32대군수 하계열, 33대군수 이덕영, 34대군수 김태웅
( 다음호에 계속) 

   
 
  ▲ 1914년 분성산에서 본 김해 중심 시가지 멀리 임호산이 보인다.  
 
   
 
  ▲ 1969년 활천고갯길 (동상동).  
 
   
 
  ▲ 1960년 김해군청 (서상동).  
 
   
 
  ▲ 1973년 진영읍 시가지.  
 
   
 
  ▲ 1967년 임호산에서 본 김해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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