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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4>“50만 김해 - 근대50년” 있을것 다 있는 살기 편한 내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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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4>“50만 김해 - 근대50년” 있을것 다 있는 살기 편한 내외동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2.02.08 0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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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취재 시리즈-14- “50만 김해 - 근대50년”

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터미널, 법원, 종합병원, 보건복지센터, 문화원, 시민 스포츠센터,
대규모 공원, 대형유통점, 영화관, 전통시장, 금융기관 10여 곳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만 해도 내.외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신못(연지공원)에서 해반천 둑길을 따라 전하동(칠산서부동)까지. 둑길 아래 약 2~3미터 논에 펼쳐진 각종 비닐하우스 재배 단지가 장관을 이루었다.

전하동과 김해문화원(현 김해터미널 자리) 사이에는 당분이 많은 포도밭이 있어 청춘남녀 들로부터 인기를 받기도 했다.

포도밭에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 밑에 앉아 한 알 두 알 포도 알을 먹여주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때 그 시절 김해의 명소이기도 했다.

달콤한 포도 맛에 취한 데이트족들 대부분이 결혼까지 하여 자녀와 함께 이곳 추억의 포도밭을 찾기도 했었다.

대성동에서 내동교를 지나 우암마을까지 들 가운데(중앙)를 가로질러 쭉~욱 펼쳐진 흙먼지
폴폴 날리던 신작로(도로)를 따라 내동 사람들도 아이들도 내동 물고구마도 김해 읍내로 나올 수 있었다.

그 시절 내 외동은 비옥한 토지 덕분에 벼농사가 발달했지만, 양계장과 축산농가도 상당히 많았었다.

1993년 당시 한국토지개발공사가 내외동의 옥토 농경지 58만 평을 택지로 조성하면서 농지는 몽땅 사라졌고 대신 김해시 최초 인구 10만 명을 기준으로 하는 신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한때 택지개발에 포함된 농지들에 대한 최소 수억에서 수십억 원의 보상금을 받아 떼부자가 된 졸부들이 김해를 활보하고 다니며 득세를 부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상이 물려준 문전옥답도 보상금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이 많다.

김해 최초의 신도시 개발지역치고는 도시가 불균형적으로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마을마다 이면 도로들이 끝까지 연결되지 않아 불편하고 김해문화원 바로 뒤편의 동일 아파트는 약 1킬로 이상 돌고 돌아야 아파트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신도시 개발을 할 때 가장 먼저 바둑판 모양의 도로부터 설계한 이후 공동주택, 일반주택, 공용부지 조성을 하고 있지만, 이곳은 예외가 되었다.

그 이유는 제2의 김해시장으로 불리던 김해를 망쳐 놓은 김해 5적 중 한 사람의 고집 때문이었다.

토지공사는 당초 봉황에서 주촌고개까지 왕복 4차로의 직선도로를 확정하여 신도시 설계를 마쳤다.

하지만 이 도로 예정지에 포함된 문화원 원장이었던 유 모씨(작고)는 문화원 수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버티기 시작했고, 토지공사와 김해시장이 20여 차례 설득과 협상을 통해 당시 문화원 용지보다 약 배 이상 넓은 부지와 현 위치 주변 도로변에 부지와 신축 건축비를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2년여를 끌고 미루어 온 토지공사는 결국 문화원 수용을 포기하고 약 5억 원의 수정설계비를 들여 지금의 도로구조와 아파트 단지로 변경한 것이다.

58만 평, 그 넓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오직 단 하나 김해 문화원만 뎅그라니 세워져 있다 보니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김해문화원은 신도시 착공 3년 후 감사원의 감사지적에 따라 강제 수용되어 철거되었지만, 그 좋은 호조건은 사라진 후였고 신도시 평면도는 완전히 지그재그로 엉망진창 도시로 전락 오늘의 불균형적인 도시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고집이 국가사업도 바꿔 놓을 정도로 당시 김해 토호 세력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때 그분은 우리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고 50만 시민이 이용하기에는 협소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김해문화원 건물은 지금도 침하 중이다.

김해시 전체의 축소판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내 외동은 참 살기 좋은 곳이다.

   
 
  내외동 풍물단 정기공연 모습.  
 

보통의 인구 10만 도시에 없는 문화의 전당과 스포츠센터, 수영장, 빙상경기장을 비롯한 연지공원, 거북공원 등 10여 곳의 공원들, 그리고 교육중심지역으로 교육 열기가 높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원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

영화관, 대형유통점, 장바구니를 싱싱하게 해주는 저렴한 전통시장까지 상권 또한 잘 형성돼 있다.

한국대표 중앙금융기관들이 내외동에 집중돼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지역이 김해의 경제 중심 신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호산과 함박산, 경운산이 내외동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으며 가락 고찰 임호산 흥부암,
함박산 대법륜사, 경운산 경운사, 김해불교의 요람 수인사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가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고 마을의 액운을 막아 주고 있다는 조사 스님들의 말씀도 전해 온다.

해마다 장관을 이루는 경운산 해맞이 축제 행사는 주민들과 타 지역민들까지 찾아오게 하고 있다.

경운산이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해맞이 명소가 된 것은 떠오르는 햇살의 기운이 김해시 청사와 내외동 아파트 단지 위를 거쳐 경운으로 밀려와 해맞이객들의 가슴으로 흡수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새해 기운을 가득 담고 산에서 내려오면 수인사에서 새해 떡국 잔치가 벌어진다. 내외동 자생단체들과 수인사에서 매년 마련하고 있는 떡국대접은 매해 3천여 그릇이 뚝딱 하고 없어질 정도로 맛도 인기도 높다.

이 모든 것이 통장, 반장, 자생단체 임원과 회원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 덕분에 내외동이 발전하고 주민이 화합하며 행복해 지고 있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격찬이다.

특히 내외동 풍물 단은 격조 높은 연주 실력으로 수많은 공연을 펼치고 있어 김해시민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별 부녀회 등 자생단체가 펴고 있는 각종 봉사사업과 활동들이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내외동을 만들고 있다.

2011년 1월 말 기준 내외동 인구는 87,628명이며, 면적은 5.34㎢이다.
84개 통과 534개 반이 있으며 법정 동은 내동,외동으로 나뉘어 있다.

내외동은 경운산 기슭을 중심으로 북쪽 마을을 내리, 바깥쪽 마을을 외리로 불려오다가 1914년 내리를 내동리, 외리는 봉곡리와 병합하여 외동리로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내리와 외리로 변경되었으며 1947년 내동과 외동으로 개칭되어 오던 중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면서 김해시 동 명칭 변경확정 및 동장정수조례(김해시조례 제98호)에 따라 행정동으로 내외동이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동(內洞)
우 암 (牛岩)
쇠바위(金岩)가 소바위로 바뀐 곳으로 지금의 연지공원 주변이다.

경운산 (慶雲山)
옛날 운첨산(雲站山), 조선초기까지 운첨사(雲站寺)가 있었다.
김해읍지에 김일손이 운첨사의 승려 지집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다. 해발 378m로 산위에는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산행을 즐기고 있음

내동지석묘(內洞支石墓)
선사/청동기시대 유물/ 선사유적, 고인돌/ 김해시 내동 469
1990년 12월 20일 문화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97호 지정받았다.
경운산록에 있는 유적으로 1976년 발굴됨. 기원전 3~4세기경 주거지로 세형동검, 무문토기 조각, 홍구조각, 석제방수차, 흥구대 등이 출토되었으며 지금은 김해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신지(新池)
신못이라 하며 옛날 늪이었는데 확장하여 저수지로 쓰다 지금은 연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평지(坪地)마을
평전마을이라고 하며, 옛날 평전리로 지금의 연지공원 위에 있었다.

외동(外洞)
옛날 거인리로 마을 앞 정자나무인 은행은 경상남도에서 나무대신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수령 500년, 높이 18m, 둘레 5.5m)

굴바위
경운산에 있는 흔들바위를 굴 바위라 불러지고 있다.

거북산
외동 서쪽의 거북모양으로 생긴 산.

대밑골
거북산과 함박산 사이의 골짜기.

외동고개
명선지(名仙池)고개라 하고 주촌면과 경계가 됨

지목 길
흥동과 경계이며 함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모유정(慕裕亭)
중종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유용(柳墉)이 기북정을 지었는데 순조 5년(1805) 거인리로 옮기고 지금은 미식재(未息齎)의 현판이 걸려 있다.

봉곡(鳳谷)
나비가 춤추는 모양의 지형 때문에 무접(舞蝶)이라고 부른다. 고종초 정현석부사가 중국 남경의 금릉의 경승을 본받아 林虎山을 鳳鳴山이라고 하고 이 마을을 봉곡리라고 고쳤다가 1914년 외동리에 병합되었다.

줄띠
임호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로 줄띠라는 풀이 많이 자생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

화티바위
무접마을 뒤에 있는 바위로 화투모양으로 생겨다 하여 화티 바위로 불러지고 있다.

   
 
  내외동 연지공원 전경.  
 

내외동의 심부름꾼 통장들

내외동 1통장 김윤선
내외동 2통장 김유진
내외동 3통장 조은숙
내외동 4통장 김정선
내외동 5통장 남성희
내외동 6통장 이병옥
내외동 7통장 박성국
내외동 8통장 민영주
내외동 9통장 조명제
내외동 10통장 류미애
내외동 11통장 이수종
내외동 12통장 이윤순
내외동 13통장 윤기만
내외동 14통장 박순만
내외동 15통장 우점순
내외동 16통장 김영옥
내외동 17통장 주정순
내외동 18통장 안지숙
내외동 19통장 박진현
내외동 20통장 김판수
내외동 21통장 윤희병
내외동 22통장 이정희
내외동 23통장 김순남
내외동 24통장 조영희
내외동 25통장 정헌섭
내외동 26통장 유다경
내외동 27통장 최인실
내외동 28통장 홍회자
내외동 29통장 주재홍
내외동 30통장 허혜영
내외동 31통장 박영숙
내외동 32통장 이인숙
내외동 33통장 김숙기
내외동 34통장 김화정
내외동 35통장 김규명
내외동 36통장 김점순
내외동 37통장 김정효
내외동 38통장 박숙희
내외동 39통장 박영희
내외동 40통장 박호정
내외동 41통장 이미숙
내외동 42통장 오상택
내외동 43통장 박정복
내외동 44통장 임세숙
내외동 45통장 정영미
내외동 46통장 김영철
내외동 47통장 임영수
내외동 48통장 강복임
내외동 49통장 정호일
내외동 50통장 이경희
내외동 51통장 문점순
내외동 52통장 박순점
내외동 53통장 박영숙
내외동 54통장 손정애
내외동 55통장 김미란
내외동 56통장 이강원
내외동 57통장 김경숙
내외동 58통장 이성철
내외동 59통장 홍미자
내외동 60통장 정대민
내외동 61통장 박동식
내외동 62통장 권희순
내외동 63통장 이명원
내외동 64통장 박애선
내외동 65통장 김금희
내외동 66통장 권창숙
내외동 67통장 정영숙
내외동 68통장 김성미
내외동 69통장 임미영
내외동 70통장 도영란
내외동 71통장 박선아
내외동 72통장 이경화
내외동 73통장 서찬성
내외동 74통장 박미화
내외동 75통장 박이순
내외동 76통장 김형진
내외동 77통장 서은희
내외동 78통장 이경희
내외동 79통장 박명화
내외동 80통장 백석배
내외동 81통장 황영순
내외동 82통장 강상옥
내외동 83통장 남택진
내외동 84통장 송미정

내외동의 일꾼들... 자생단체

내외동 청소년지도위원회 
내외동 자연보호협의회 
내외동 적십자봉사회 
내외동 바르기살기협의회 
내외동 새마을부녀회 
내외동 새마을협의회 
내외동 발전위원회
내외동 통장단 
내외동 주민자치위원회
내외동 청년회 
내외동 연지지구대 여성명예소장
내외동 체육진흥회
내외동 그라운드골프동호회 
내외동 노인회
내외동 아파트자치부녀회 연합회
내외동풍물단
내외문화의집자원봉사회
내외동자율방범대
연지지구대 생활안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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