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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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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 이균성 기자
  • 승인 2008.07.18 20:1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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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황후릉 내에 있는 파사석탑  
 

구지봉에서 내려오면 허황후릉이 보이고 그 조금 아래에 파사각이 있다. 바로 파사석탑을 모신 곳이다.
파사석탑은 현재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김해시 구산동 119-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파사석탑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에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陀國所載來).

파사석탑은 네모난 기단 위에 형식과 모양을 갖추지 않은 탑신이 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탑은 원래 호계사라는 곳에 있었는데 절이 폐사되면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고종 10년(1873년) 김해부사였던 정현석이 이 곳으로 옮겨다 놓았다.
탑을 보호하는 파사각은 1993년 5월에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보면 호계사는 질지왕 2년-452년(질지왕은 장왕(莊王)이라고도 부른다. 가락국 제8대 왕으로 451년에 즉위하여 492년까지 41년간 재위 하였고 왕후사도 같은 시기에 창건한다)에 세운 절이다.

파사석탑을 살펴보면 석재 중간중간 옅은 붉은 색을 볼 수가 있다. 탑을 구성한 돌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닌 것 처럼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도 이처럼 적고 있다. "탑은 사각형이며 5층으로 그 새겨진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희미한 붉은색 무늬가 있고 그 성질이 조금 무른데 이 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班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이 탑은 허황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바다의 바람을 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해서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파사석탑은 원래 네모형의 돌로 만들어졌다고 삼국유사에도 적고 있는데 재미난 사실은 파도의 신을 잠 재운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 탑의 돌 일부를 몸에 지니고 고기잡이를 가면 파도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어 몰래 조금씩 떼어가 원래 사각형의 돌이 지금과 같은 원형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탑이 가지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경우에 따라 우리나라의 불교역사가 다시 씌여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김해의 향토사학자들은 우리나라 불교의 전래를 허황후가 싣고 온 이 파사석탑을 들어 그 역사를 다시 기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황후의 오빠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승려였고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불가에 입문해 성도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칠불(七佛)을 든다. 또 불교史 상 본격적으로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AD 1세기 말 이후이고 그 이전에는 탑에다 사리를 봉안해서 모시는 무불상(無佛像) 시기였으므로 허황후가 가야로 온 그 시기에는 불상이 아닌 불탑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이 서울터를 잡는 대목에 있는 "이곳은 협소하기가 마치 삼엽과 같다. 그러나 빼어나게 아름다워 16나한(羅漢)이 머물 만한 곳이다.(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에서의 나한은 바로 불교용어란 것이다. 다른 향토사학자는 파사석탑이라는 명칭에서 `婆娑` 란 것이 한자가 아니고 범어(汎語)라고 말한다. 즉 `파` 는 발음이 바(Bha)로 의미가 유(有)이고 `사` 는 발음이 사(Sa)로 체(諦)라는 것이다. 유체(有諦), 곧 `일체의 지혜가 현증한다. 나타난다` 라는 의미로 풀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견해를 달리 한다. 불교의 전래를 입증하려면 佛(불상이나 불탑),法(경전), 僧(승려)가 동시에 있었던 사실이 증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수로왕 시대에는 가야가 작은 나라이거나 연맹체의 형태로 겨우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시기라 불교를 받아들일 만한 사회적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근래 김해나 인근 지역에서의 유적 발굴에서 불교관련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드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불교전래의 순서를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명시하고 있고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에서도 불교가 전파 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것.
 
하기는 삼국유사에도 "당시 이 땅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체로 상교(像敎)가 들어오지 못하여 이 땅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도 절을 세웠다는 기사가 없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있다.(然于時海東末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질知王二年壬辰 置寺於基地 又創王后寺 至今奉福焉)"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어느 주장이 옳은지 밝힐 역량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김해지역에는 허황후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음에 감사한다는 표시로 김해 분산 정상에 해은암(海恩庵)을 짓고,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아버지 수로왕과 어머니 허황후를 기리기 위해 천태산에 부은암(父恩庵)을, 남쪽 무척산에 모은암(母恩庵)을 세우고, 또 자암산에 자은암(子恩庵)을 세웠다는 사실 등 전승되어 오는 사실들이 참으로 많다. (자암산은 김해 진영읍 본산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마을 뒷산으로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리고 있는 산이다. 예전에는 本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전승되는 사실들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해석되어야 할까? 이 과제에 대한 연구는 현세와 우리들의 후세, 가야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균성 기자   kslee473@yn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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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jdcjtk 2008-08-27 22:46:09
수로왕과 왕비가 부암, 모암, 자암을 창건하였고,부암은 부은암으로, 모암은 모은암으로 후대에 개칭되었다지요? 다만, 자은암은 창건될 수도 없거니와 자암이 복원된다 해도 자은암이 될 수는 없겠지요? 전체적으로 기사의 내용이 연구를 많이 한 결과인 것 같아 앞으로 기대가 됩니다.

김인택 2008-07-28 18:52:11
원문을 같이 실으니 새롭네요.구지봉에 이어 계속 쓰실겁니까?관심이 가는 기사입니다.이기자님은 봉하마을 많이 써시던데요.이런 역사기사도 잘쓰시네여 ㅋ

감사 2008-07-25 20:10:52
현직 교사로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아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역사탐방은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실텐데...이 기자님!! 계속 연재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힘이야 드시겠지만.아무튼 좋은 기사 주시는 영남매일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 2008-07-25 20:05:31
현직 교사로서 감사를 드립니다.아이들에게 유익한 기사입니다.역사기행은 많은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실텐데..이 기자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앞으로 계속 연재해 주시길 바랍니다.특히 원문을 같이 써주셔서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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