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매일 PDF 지면보기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최근 김해종합뉴스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時도 아닌 것이
행복밥집
TV 방송 영상
커뮤니티
다시보는 부끄러운 김해 현장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2)
상태바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2)
  • 도명 스님
  • 승인 2020.07.21 0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 망산도. 좌측 하단에 유주비각.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 망산도. 좌측 하단에 유주비각.

2. 가락국과 수로왕비 도래(到來) 경로(經路)의 지리적 환경

수로왕은 가락가야(駕洛伽倻)로 불리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왕이고, 그 도읍지는 지금의 김해지역이며, 김해는 한반도의 동남단의 낙동강하류의 서안(西岸)에 위치하였는데 남쪽으로는 바다에 임해 있다.

그러므로 김해지역은 가야시대에는 해상교역을 하는 전초기지임과 동시에 바다와 관련한 국방상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울러 관리하는 동남해도도부서사(東南海道都部署使) 본영(本營)이 김해에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김해진관(金海鎭管)에 속하는 함안·칠원·김해·웅천·창원·진해·거제·고성의 군사권을 행사하는 별중영(別中營)이 김해진(金海鎭)에 설치되었으며, 김해부사가 별중영장(別中營將)을 겸직하였으니 김해의 지리적 환경이 국방상의 요충지임은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지금은 김해국제공항이 설치되어 있어서 세계를 누비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천혜의 지리적인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다.

수로왕비가 모국(母國)인 아유타국(阿踰陀國)을 떠나 가락국 수로왕에게 시집오느라 배를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하여 가락국 경내에 처음으로 도착하게 된 주포(主浦)마을은 현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에 속한 마을인데, 역사적으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웅신현(熊神縣) 또는 웅천현(熊川縣)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김해의 속현(屬縣)으로 있던 바닷가 고을의 동쪽 끝의 마을로서 김해와 접경한 지역이다.

웅천은 예로부터 남해안 해로(海路)의 요충지로서 많은 해군과 육군의 진(鎭)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허황옥 공주 일행의 배가 처음으로 닿은 유주지지(維舟之地)가 있는 망개산과 욕망산 자락에는 해군기지인 부인당포(夫仁堂浦)와 안골포(安骨浦)가 있었고, 육군기지인 신문진(新門鎭)과 청천진(晴川鎭)이 있었다.

위와 같이 김해지역과 웅천지역에 군사기지가 형성된 것은 바닷가라는 지리적인 환경에다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나, 조류(潮流)와 계절풍(季節風)의 영향 등을 감안했을 때 일본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항해하는 배들이 용이하게 드나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웅천(熊川)과 김해(부산시 강서구 구랑동)에 걸쳐있는 보배산(보개산. 명월산) 동북쪽 자락의 구량촌(仇良村: 九朗里) 수참(水站)은 왜(倭)의 사신(使臣)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왜(倭)’라는 용어는 신라 문무왕 10년(서기 670년) 12월에 왜가 ‘日本’이라는 국호로 개칭하기 전의 國名이다.

그러므로 허황옥 공주의 배가 가락국에 올 때 웅천 앞바다를 경유하여 지금의 용원동에 있는 유주비각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은 우연(偶然)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세월 따라 환경이 바뀌다 보니 당시에 인구에 회자되던 지명이 지금은 아리송하여 여긴지 저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라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람마다 추정하는 장소가 제각각인 실정이다.

3. 허황옥 도래 경로의 지명과 장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황옥의 도착 일자와 경로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서기 48년) 7월 27일 김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는 왕비가 될 사람을 마중하러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 승재)’에 가게 했다. 이에 망산도에서 기다리는 유천간의 눈에 비단 돛을 단 배가 천기(茜旗)를 휘날리며 서남쪽에서 나타남에 유천간 등이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자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는 유주지(維舟址)와 관련한 도하륙(渡下陸) 기사가 있다.

또 수로왕이 ‘종궐(從闕)’ 아래 서남쪽 60보 쯤에 만전(幔殿)을 설치한 기사가 나온다. 또 왕후는 산 바깥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맸으며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고 그 언덕에서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그것을 폐백삼아 산신에게 바쳤다고 했는데, 훗날 왕후가 별세하고 난후에 비단바지를 바친 곳을 ‘능현(綾峴)’이라고 했다.

또 왕후가 다가오자 수로왕은 장막궁전인 유궁(帷宮)에서 맞이했다. 또한 유천간이 망산도에서 기다릴 때 갑자기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기를 단배가 나타났다고 했으며, 훗날 천기(茜旗)가 들어 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망산도·승점·유주지·종궐·별포·능현·유궁·기출변을 각각 허왕후의 도래 경로의 특정 장소로 보고 그 장소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1). 망산도(望山島)

망산도(말무섬).
망산도(말무섬).

'가락국기'에, 수로왕 7년 무신년(서기 48년) 7월 27일 九干들이 수로왕에게 신하들의 딸 중에서 배필을 천거하겠다고 하자, 수로왕은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의 자신의 배필 역시 하늘의 命이 있을 것이라며 거절하며 留天干과 神鬼干에게 망산도(望山島)와 승점(乘岾: 승재)에 가서 왕비가 될 사람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망산도와 승점은 가야사 관련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청이나 부산광역시 등 행정당국에서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를 망산도라고 하며, 이 망산도에는 1954년에 세운 ‘望山島’라는 비석이 있다.

그리고 망산도와 유주비각을 1988년부터 경상남도에서 기념물 제89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여 왔으나, 2007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망산도의 소재지가 경상남도에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되어 2008년 4월 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망산도 근처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산197번지에 유주비각이 있으며, 이 유주비각에는 1908년(순종 2)에 세운 유주비(維舟碑)가 있는데 비신(碑身)은 높이 175㎝, 너비 76.5㎝, 두께 35㎝의 석비로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 허씨 유주지지(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地)’라고 새겨져 있으며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89호 이다. 이 비석을 보호하는 유주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현 망산도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현 망산도는 먼 바다를 조망(眺望)하기에 부적당한 시야가 가리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서기 48년경이라면 해수면이 높아서 만조(滿潮) 때 과연 섬으로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연구자들은 다양한 위치를 망산도로 추정하지만 공감을 얻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가야시대 1세기 중엽의 고김해만. -(류춘길. 가야시대 김해 일원의 고환경 연구. 2017년도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 학술대회’ 116쪽에서 인용함.)
가야시대 1세기 중엽의 고김해만. -(류춘길. 가야시대 김해 일원의 고환경 연구. 2017년도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 학술대회’ 116쪽에서 인용함.)

위 지도는 1세기경의 김해지역의 해수면 상황을 고려하여 복원한 바다와 육지 그리고 섬 등을 나타낸 고김해만의 모습인데, 여기에 의하면 현재의 말무섬은 해수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