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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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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4)
  • 도명 스님
  • 승인 2020.08.11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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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훼손된 견마도(망산도).
훼손된 견마도(망산도).

1).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망산도

본 연구자가 보기에는 망산도는 조선시대에 ‘만산도(滿山島)’로 불리던 섬으로써, 진해구 용원동과 가덕도 사이가 부산신항만으로 매립되기 전 용원동과 가덕도 사이의 견마도(牽馬島: 조선시대 滿山島)가 곧 망산도이다.

‘견마도(牽馬島)’라는 지명은 국립지리원에서 제작한 지도에 나오는 명칭이고, ‘만산도(滿山島)’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웅천현읍지'와 '웅천현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섬이다.

이 만산도에서 관측하면 정확히 서남쪽 모퉁이가 가덕도 좌측 끝 모퉁이에서 배가 연안을 따라 올라오면 갑자기 배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므로, '가락국기'에서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천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있었다(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라고 한 기사와 부합되며, 배가 북쪽에 있는 유주비각으로 향하면 관측된 배의 방향이 기사와 일치한다.

망산도는 유천간이 공주 일행을 찾아 마중나간 장소인데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 산 188번지로 알려졌으나 필자의 현지 답사와 '가락국기'의 기사 그리고 '신중동국여지승람' 및 '웅천현지도' 등을 검토한 결과 망산도는 과거 만산도라 불리는 주포 남쪽의 섬이다.

다만 ‘만산도’라는 명칭은 과거 망산도라 불리던 섬의 명칭이 시간이 지나면서 음운 변화에 의해 망산도가 만산도로 변했고 후대에 기록할 때 한자를 차자하며 고착화 되었고, 이후 만산도로 불러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만산도에서 관측하면 가덕도를 앞에 두고 동남쪽 바다와 서남쪽 바다 모두가 뚜렷하게 조망되며 육지에 있는 승점과 통신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국립지리원에서 제작한 지도에 나오는 ‘말무섬’이 망산도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만산도이자 현재의 견마도가 망산도이다.

2).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주포(主浦)

주포에 관한 문헌은 '가락국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영제 중평 6년 기사년(189) 3월 1일에 왕후가 붕어 하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끝내 (왕후가 백성들을)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함에 인하여 처음으로 와서 닻을 내린 나루마을(도두촌)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천기(茜旗: 검붉은 꼭두서니 깃발)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靈帝 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 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綾桍(袴) 高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라고 하는 기사에 처음으로 나오며, 그 다음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고적(古蹟)조에 나온다. 그러므로 주포의 처음 이름은 ‘도두촌’이었으며, 수로왕비 허황옥 왕후가 별세하고 나서 ‘주포’로 개칭한 것이다.

3). 망산도와 주포 이외의 지명

㈎. 승점(乘岾: 승재)

승점(乘岾)은 승재(乘岾)로도 발음이 가능하다. 다만 ‘승재’라 했을 때는 고개를 지칭하는 명사이고, ‘승점’이라 했을 때는 고개 또는 지역(땅이름)을 지칭하는 명사로 활용된다. '가락국기' 주석에는 “승점은 연하국(輦下國)이다.” 라고 되어 있어 가락국의 속국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하정룡, 이근직의 '삼국유사 교감연구'편을 보면 연하강(輦下岡)으로 되어 있어 곧 ‘가마가 내린 언덕이다.’ 라는 뜻의 지명으로도 볼 수 있어서, 승점은 오르는 지점, 오르는 고개, 높다란 고개란 뜻이 되고, 오르는 지점은 말을 탈수 있는 지점이란 뜻도 된다.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은 유천간에게는 망산도에, 신귀간에게는 승점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신귀간이 공주가 탄 배가 오는 것을 보고 망산도에서 봉화(횃불)로 신호를 하면 승점에서 확인하고 말을 타고 수로왕에게 보고하려는 장소가 승점이다.

공주가 도착할 때 “유천간 등이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선원들이 나루에 닿자마자 바로 다투듯이 육지에 내리어 경쟁하듯 뛰어오는데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라고 했으므로 승점은 망산도와 배를 대는 곳 두 지점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라야 하는데 그곳은 오늘날 녹산동 가주터널 위쪽 언덕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승점은 공주가 나중에 산령에게 비단바지를 바칠 때 내린 산 바깥 별포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오른 입구 산언저리 어디쯤 높은 언덕이 승점이다.

산도. 승점. 능현. 기출변. 유주지.
산도. 승점. 능현. 기출변. 유주지.

㈏. 도하륙, 유주(渡河陸, 維舟)

공주가 탄 배의 선원들이 다투듯이 육지에 내린 곳은 말무섬 동쪽 현재 유주비각이 있는 지점이다. 이 지점이라야 별포 나루터 입구 높은 언덕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주가 탄 배가 최초로 정박한 곳이지만 선원들만 내렸고 공주는 내리지 않은 걸로 보인다.

이후 공주의 도착 보고를 받은 수로왕이 환영 사절로 구간들을 보내나 “나는 평소 그대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하고 거절하였는데, 이후 수로왕이 직접 마중 오겠다는 전갈을 받은 공주는 배를 맨 곳에서 내리지 않고 하루를 배 위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 종궐(從闕)

공주가 구간으로 구성된 환영사를 거절하자, 수로왕은 자신이 직접 올 것을 암시하는 뜻으로 “그렇겠구나(然之).”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직접 관리를 인솔하여 종궐(從闕)에 온다. 이때 ‘종(從)’의 의미는 '궐을 따라'라는 동사의 의미도 있지만 신답평에 있는 본궐(本闕)에 종속된 지방의 관청이란 의미도 있다고 볼 것이다.

수로왕은 행차하여 종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에 만전(幔殿)을 설치하고 공주를 기다렸다. 종궐에서 공주를 맞이하기 마땅치 않았던지 어떤 이유에서 수로왕은 장막(帳幕)으로 임시궁전을 짓는다. 다만 이 서남쪽 60보(六十步)‘를 ’六千步의 오자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으나, 가락국의 궁궐에서 6,000보 쯤 떨어진 지역이라면 특정 지명이 나올 만한 거리이므로 오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한 그냥 궁궐에서 60보쯤 떨어진 곳이라면 굳이 유사들을 대동하고 나서서 장막을 칠 이유도 마땅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종궐의 규모를 생각해 보건대 공주와 함께 20여명 이상의 수행원과 15명의 사공이 유숙할 만한 공간이 있고 외해(外海)의 행정관청 및 숙사(宿舍)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이다. 여기서 종궐이 자리했던 곳은 현재 보배산(보개산) 아래 주포마을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종궐(가주동 497)과 만전(가주동 510-2) 추정 장소.
종궐(가주동 497)과 만전(가주동 510-2) 추정 장소.

㈑. 별포(別浦) 주포(主浦)

별포는 공주가 가락국 경내에 처음으로 와서 육지에 내리기 위해 배를 대느라 닻줄을 내린 곳인데, 공주가 이곳에 배를 댄 목적은 목적지 내지 목적지에 가까운 곳에 왔음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입국절차를 치루기 위함이며 그 중 하나가 산령에게 비단바지를 폐백하기 위해서이다.

공주는 험난했던 먼 항해를 희망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데 대한 감사를 올리기 위해 그 일대에서 가장 큰 산인 보배산 산신에게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올린다.

'가락국기'에 나타난 몇 구절 안 되는 공주에 대한 묘사는 공주가 덕스러우면서도 매우 지혜 있는 여인이란 것을 엿볼 수 있는데 목숨 걸고 그 먼 길을 오면서 도착 이후의 행동과 계획은 배에서 내리기전 이미 수립되어 있었으며, 환영사인 구간에 대한 거절, 수로왕의 직접적 영접과 산령에 대한 감사의 의례는 자신의 계획에 따른 실행이었던 것이다.

별포는 공주가 승점에 오르기 전에 내린 지점으로 산 밖 별포나루 입구라고 했으니 높은 고개인 승재의 아래쪽인 현 가주터널 부근 어느 지점으로 보아진다.

공주가 배를 처음 댄 곳은 별포나루 입구 어디쯤이나 별포는 어떤 지점이 아닌 나루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나루가 포함된 마을을 도두촌(渡頭村)이라 하였는데 그곳은 오늘날 주포마을이다.

원래 별포였다가 공주가 내린 곳이라 하여 주포(主浦)가 되었고 또 다르게 옥포라고 한다. 그것은 아마 공주의 이름이 許黃玉이라는데서 기인한 걸로 보이며 이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사기장(沙器匠)인 최웅택씨의 말로는 두포(頭浦)라고 하였다 한다.

별포란 서울특별시의 別자처럼 뭔가 특화된 항구, 특별하고 큰 항구라는 의미도 있는데 가야의 남쪽 외항으로 국제무역의 전진기지 인 듯한 느낌도 있다.

승점과 능현. 가주동 산174번지 일대.
승점과 능현. 가주동 산174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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