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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왕국 역사여행 <4>나를 이곳에 강(降)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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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왕국 역사여행 <4>나를 이곳에 강(降)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1.05.18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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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오백보(一千五百步)의 나성(羅城)을 주회(周廻)하고, 궁금전우(宮禁殿宇) 및 제유사(諸有司)의 옥우(屋宇)와 무고(武庫)와 창고(倉庫)의 땅을 축치(築置)하고, 환궁(還宮)하였느니라."수수께끼의 풍수를 풀이하면서 왕성(王城)의 자리를 정한 수로왕은, 궁전과 보좌하는 신하들이 들 집과 무기고(武器庫)와 창고가 들어설 땅의 외곽에 둘레 일천오백보의 외성(外城)을 쌓은 다음에 가궁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이 때 쌓은 외성의 길이 단위인 `보(步)`는 주척(周尺)의 단위로도 쓰이지만 보통 어른들의 한 발길이(50~60cm)를 말하기도 했다. 또 뒤에 나오는 기사에도 이 보(步)가 나오는데, 현재의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이 때의 보는 역시 사람의 한 걸음의 길이로 볼 수 있다.

 
   

결국, 수로왕의 장차 왕성의 제 시설을 세울 바깥 둘레의 성을 쌓고 돌아왔는데 그 둘레가 900m 남짓한 소규모의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숨에 축성을 마친 양으로 해석되는 문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외성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김해의 육지 사정이 여뀌잎처럼 좁았다는 데도 말미암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쌓은 성 안의 제 시설을 본궁(本宮)이라 하였고, 6년 뒤에 중궁(中宮)이 건설되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에는 원본 <가락국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가락고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토성......증토축성 지금유지상존(土城......蒸土築城 至今遺地尙存)`즉 이 기록에서 <가락국기>가 정리된 고려 문종(文宗, 1047~1083) 때만 해도 왕성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증토(蒸土)`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증토(蒸土)란 무엇인가? 오늘의 사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이 말은 그 글자의 뜻이 `찐 흙`, 즉 흙을 쪄서 단단하게 한 흙벽돌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찐다는 것은 김 올린다는 말이고, 따라서 물기를 말린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건조시킨 흙벽돌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을 수로왕이 위치를 정한 데 따라 척척 쌓아올린 작업을 한 것으로 생각해 본다.

왕성의 남쪽 경계인 회현리 패총에서 쌀이 나온 것처럼,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의 흙벽돌과 같은 흙벽돌이 수로왕이 건설한 가락국 외성의 건설 자재로 쓰여졌다 해도 엉뚱한 상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쌓은 외성 속에 가락국 본궁의 궁전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국내(國內)의 정장인부(丁壯人夫)와 공장(工匠)을 편징하여, 기월(其月) 이십일에 금양(金陽)을 자시(資始)하고, 삼십일에 기하여 역필(役畢)하였느니라. 그 궁궐옥사(宮闕屋舍)는 농격을 기다려 이를 작(作)하고, 그 해 시월에 경시(經始)하여 다음 갑진(甲辰) 2월에 성(成)하였느니라."즉 마무리 짖고, 농번기를 피한 다음, 12월부터 다음해 4월에 걸쳐 궁궐을 건축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로왕 즉위 3년의 2월, 새 왕궁에서 왕은 이제 본격적인 나라 살림 꾸리기에 착수하게 된다.

"구간(九干)등이 조알지차(朝謁之次)에 헌언(獻言)하여 아뢰된 `대왕께서 강령(降靈)하신 이래로 아직 호구(好仇)를 얻지 못하였사오니, 청(請) 컨대 신(臣)등이 가진 처녀(處女)의 절호(絶好)한 자(者)를 궁궐로 선입(選入)하여 항려(伉儷)로 삼으소서`라 하더라."천강(天降)의 의식을 거쳐 저들 위에 군림한 대왕이 아직 배필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긴 구간들이 이날 아침 대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마당에서, 저들의 피붙이 가운데서 간택해서 왕후를 삼아달라고 품의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해 7월 27일의 일이었다고 날짜까지 밝히고 있지마는 이 날짜는 음력이다.

수로왕 출현 당시의 연령을 15세로 치면, 때는 이미 21세의 청년왕이다. 그러므로 그 왕의 왕후를 저들의 혈족에서 간택해야만 한다는 것은 구간들이 오랜 동안 합의해 온 일이었들 것이다.

왕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작위(作爲)가 아닌 천명(天命)이었음을 6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한번 구간들에게 깊이 인지 시키려는 왕의 통치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염려할 바 아니다`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날이야말로 천명의 왕이 어떻게 범상(凡常)과는 다른가를 분명히 보일 준비가 완료됐다는 신호로 생각 할 수 있다.

`나를 이곳에 강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이루게 함에도 또한 하늘의 분부가 있으리니 너희들이 걱정할 바 아니다!`라고 잘라서 말한 수로왕은 숨돌릴 새도 없이 구간들에게 당장 거행할 저들의 소임을 일러주게 된다.

"마침내 유천간(留天干)에 명(命)하여 경주(輕舟)를 밀고 준마(駿馬)를 지(持)하여 망산도(望山島)에 이르러 입대(立待)하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 명하여 승점(乘岾)에 취(就)하게 하시더라."유천간(留天干)은 구간의 한 사람이다. 그 유천간이 경주(輕舟:근거리, 수심이 얕은 곳에 쓰는 배)와 발이 빠른 말을 함께 가지고 입대(立待:망을 보는 일)시킨 곳은 `망산도`라 기록했는데, 그런 섬은 지금은 이름조차 남지 않고 있다. 신귀간(神鬼干)을 보냈다는 `승점(乘岾)`이란 지명도 마찬가지다. 다만 <가락국기>에는 이 두 지점의 소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망산도(望山島)는 경남(京南)의 도여이니라. 승점(乘岾)은 연하국(輦下國)이니라."`경남(京南)`은 경도(京都)의 남쪽으로 곧 왕궁 바로 남쪽을 가리키며, `연하국(輦下國)`이란 기내(畿內)에 있는 한 고을로 왕궁에서 가깝지는 않아도 인접한 지역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옛날 강바닥이었던 곳이 넓은 평야가 되어 김해평야(金海平野)로 이름을 바꾼 이 지역이지만 오늘 우리들이 가장 신빙할 수 있는 한국지도인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 김해편에는 적어도 1864년(고종 원년, 김정호가 이 책을 완성한 해로 추정)까지만 해도, 망산도는 `전산도(前山島)`라는 이름으로 김해부(金海府)에서 5리 남쪽 강 위에 섬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망산도로 유천간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앞바다 서남쪽에서 북을 향해서 항진해 오는 비색(緋色)의 돛에 꼭두서니빛의 깃발을 단 범선(帆船)을 발견하는 즉시 봉화를 올려라. 그리고 승점에서 망산도의 봉화를 보는 대로 신귀간은 이런 이런 준비를 하여라`고 일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가 비색의 돛을 달고, 꼭두서니 빛의 깃발을 올린 것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그 배의 선적(船籍)과 그 배를 탄 이의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도 <가락국기>는 역대 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확한 사실(事實)의 기록임을 차차 알게될 것이다.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였고 가락국 500년의 왕도였다. 시조인 김수로왕이 창건한 가락국은 10()에 걸쳐 5백년 간의 사직을 보존하고 수로왕이 물려준 그대로의 강토를 지켜왔으니 경계를 살펴보면 수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황산(黃山.신라 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백제국경), 남쪽으로는 남해이었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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